1부: 과거 - 서영과의 관계 형성과 파탄
# 『바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아이가 물었다.
"파도가 먼저예요, 바람이 먼저예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답했다.
"바람이 먼저야."
"왜요?"
"바람이... 먼저 인사를 하거든."
그때, 바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십여 년 전과 똑같은 방향에서.
아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작은 존재도 언젠가 나를 넘어서려 할 것이다. 그것이 아들의 숙명이고, 아버지의 운명이다. 나처럼. 내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
*1989년 여름, 서울 근교
나는 지금, 남해안 끝자락의 작은 어촌 마을에 있다. 기찻길이 바다와 만나는 이곳에서, 하루에 네 번 열차가 마을을 가르며 지나간다. 하지만 이 마을에 서는 기차는 없다.
가끔 바람의 방향을 기억할 때가 있다. 잊고 지내다, 문득 그것이 떠오르면 그 계절도, 그 표정도 따라 나온다.
이곳은 내가 한동안 피신해 지냈던 곳이다.
대학 입시 결과를 확인한 건, 재수학원 기숙사 복도 끝 유선전화를 붙잡고 선 늦은 겨울 오후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떠났고, 2인실에는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수험번호를 누를 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기계음으로 흘러나오는 차가운 통보. 불합격.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녀'였다.
집에 있을 그 여자. 아버지보다 한참은 젊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조용한 그 여자.
나는 그날 이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친구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길이 몇 달간 이어질 줄 몰랐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나는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친구집에서, 다른 친구집으로, 때로는 찜질방에서 밤을 보냈다.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쫓기듯 여러 여자들과 정사를 했다. 그러면서 의식적으로 집 복귀를 늦췄다.
아버지는 몇 번 연락했다. 돌아오라고. 하지만 나는 핑계를 댔다. 친구와 여행을 간다고, 아르바이트가 바쁘다고, 다시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그런데 정작 나 자신도 왜 집에 가기 싫은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막연한 불편함 같은 것. 감정이 없어서 그냥 건너뛴 것들이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자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친구들도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고, 아르바이트도 끝났다.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이제는 느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회피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여름날 오후, 나는 서울 근교 아버지의 집 앞에 섰다. 지하철 끝자락에서 버스로 한 번 더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서울 경계 어디쯤의 골목 안쪽 집.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오래된 2층 단독주택. 단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름이면 찜통이 되고, 겨울이면 냉장고가 되는, 고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집. 방기 된.
현관문을 열었을 때부터 달라진 것들이 보였다. 몇 달 전 내가 마지막으로 이 집을 떠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부엌에서 고무장갑을 낀 채 손을 털고 있는 그녀. 말없이 나를 보던 눈동자.
"왔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몇 달간 회피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지.
***
그녀의 이름은 서영이었다.
아버지가 그녀를 소개한 적은 없었다. 동거녀라고 설명한 적도, 아내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그녀도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거리'였다. 그게 편했다.
나는 그대로 2층 빈방에 짐을 내려놓고, 문을 닫았다. 책상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고, 벽에는 오래전 붙였던 시간표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날 밤, 부엌에서 밥 짓는 소리와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웠다. 내 방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그녀의 그림자가 거실을 건너가는 게 보였다.
그때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의 발소리를 처음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 그녀는 거의 무음의 존재였다.
이제 나는 왜 집에 오기 싫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수학원에 있을 때부터, 친구집을 전전할 때부터, 나는 줄곧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웠다.
며칠 후, 아버지가 출장에서 돌아왔다. 출장이 예정보다 빨라졌다며 회사 후배의 급작스러운 사고를 들먹였다. 그는 짐을 풀며 서영을 불렀고, 서영은 조용히 맥심 커피를 내왔다.
나는 그 장면을 거실 문틈에서 바라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마치 나에게는 외국어처럼 낯설었다.
그때 나는 집안의 변화를 제대로 보게 되었다.
현관 신발장 위의 작은 화분, 거실 소파의 쿠션 배치, 심지어 TV 리모컨이 놓인 각도까지 모든 것이 정확히 계산된 듯 배열되어 있었다. 벽시계의 위치, 식탁 위 소금통의 각도, 거실 스탠드의 높이.
그녀는 몇 년 전부터 이 집에 있던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나중에는 점점 더 확실하게 이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던 사람.
이것은 더 이상 아버지의 집이 아니었다. 서영의 집이었다.
아버지는 때때로 자신의 집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서영은 그가 좋아하는 방식 그대로 커피를 내왔다.
어느 날 밤, 나는 물을 마시러 1층으로 내려가다가 멈췄다. 아버지의 방에서 들리는 소리. 규칙적이고 짧은, 마치 의무를 수행하는 듯한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스며 나오는 침묵.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는 있었지만, 그녀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녀의 영역에 침입자로 들어왔다는 듯한 서영의 긴장을.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에 변수로 등장한 나에 대한 그녀의 경계를. 그리고 그녀가 이 집에서 감내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그해 여름은 끈적했다. 낡은 선풍기는 목을 좌우로 흔들며 뜨거운 바람만 내뿜었고, 내 마음은 그보다 더 굽굽했다.
서영은 내가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들어주었고, 무표정 속의 공감이란 걸 알려주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식탁에 앉아 국을 뜨지 않았고, 내 방 근처로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부엌의 불이 꺼진 밤이면, 나는 그녀의 방문 아래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스탠드 불빛을 보며 잠들었다.
나는 그녀의 향기를 기억한다. 케라스타제 샴푸의 냄새가 아니라, 바람에 말라가는 젖은 머리칼의 냄새. 그 모든 장면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는 하나의 계절로 묶여 있다.
남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날의 시작이었다.
***
아버지가 다시 출장을 떠난 건 내가 돌아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일주일 정도."
그는 캐리어를 끌며 현관에서 말했다. 서영은 그의 정장 재킷을 정리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2층에서 그 장면을 내려다봤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도, 일상은 시작되었다. 서영과 나, 둘이 다시 그 집에 남겨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의식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그 의식은 며칠에 걸쳐 서서히 쌓여갔다.
서영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할 때 보이는 목덜미. 그녀가 2층으로 올라갈 때 나무 계단을 밟는 발소리. 밤늦게 욕실에서 나올 때 복도에 남겨지는 약한 향기. 이런 것들이 하나씩 내 감각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덥죠?"
어느 날 오후, 서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고 있었고,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면 원피스의 목 부분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에어컨 이야기가 나왔다. 아버지가 거부했다는 것, 곧 이사 갈 집이라는 핑계. 재개발 얘기였다. 우리는 임시거주자였다.
나는 유리컵에 보리차를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컵을 받을 때, 우리의 손가락이 잠깐 스쳤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이 더위 속에서도.
서울법대 이야기도 나왔다. 아버지의 기대. 나의 망설임.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2층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만 들렸다.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소리.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서영을 제대로 바라봤다. 늘어진 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목덜미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대충 감싼 채, 모든 사물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
그녀는 아버지보다 한참 젊었지만, 이 집에서만큼은 완전한 주인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녀가 1층 화장실에서 샤워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2층 내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페이지를 넘기지도 않은 채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샤워가 끝난 후, 그녀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거실로 나왔다. 나는 계단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얇은 면 옷 위로 물기가 배어 있었다.
"많이 덥지?"
그녀가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요."
"선풍기 하나 더 가져다줄까?"
"괜찮아요."
하지만 그녀는 창고에서 작은 선풍기를 하나 더 꺼내왔다. 2층까지 올라와서 내 방문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
"이거라도 틀어놔"
그때 우리 사이의 거리는 1미터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젖은 머리에서 나는 샴푸 냄새.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돌아서려다 말고 내 방 안을 잠깐 들여다봤다.
"정리 좀 해놔. 이렇게 어수선하면 마음도 복잡해져..."
그녀가 내려간 후, 나는 정말로 방 정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 방을 다시 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음날 오후, 소나기가 내렸다. 갑작스럽고 격렬한 비였다. 마당에 널린 빨래들이 다시 흠뻑 젖었고, 서영은 황급히 뛰어나가 빨래를 거둬들였다. 나도 따라나가 도와주었다.
비에 젖은 채로 현관에 들어선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녀의 얇은 블라우스가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내 티셔츠도 마찬가지였다. 물방울이 그녀의 이마에서 턱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현관에 혼자 남아 그녀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날 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새벽 2시쯤, 나는 목이 말라 1층으로 내려갔다.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거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서영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잠옷 차림으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잠이 안 와?"
그녀가 먼저 말했다.
"네. 당신도요?"
"비 때문인 것 같아."
나는 그녀 옆에 앉았다. 소파는 작아서 우리의 어깨가 거의 닿을 듯했다.
"무슨 생각하고 계셨어요?"
시간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말. 빨리 가는 것 같으면서도 천천히 가는 것 같다는 말. 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빗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다.
이 집에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내가 말했을 때, 그녀는 나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빛이 보였다.
그게 좋은지 나쁜지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답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빗소리와 우리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체온.
그때, 그녀의 손이 내 손등에 닿았다. 실수 같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침묵이 거실을 채웠다. 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후회나 두려움이 아닌, 오래전에 이미 결정된 것에 도달한 얼굴.
나는 그날 밤, 내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그날 아침, 우리는 늦잠을 잤다.
방안에는 땀과 숨, 그리고 젖은 피부 냄새가 머물렀다. 바깥에선 비가 잦아들고 있었고, 간밤에 젖은 골목이 햇빛에 말라가는 소리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나는 창가에 던져둔 셔츠를 입으려다 말고 멈췄다. 그녀는 아직 침대에 누워 있었고, 커튼 사이로 빛이 그녀의 허리선을 감싸고 있었다.
"이거, 꿈일까."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숨을 쉬는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다.
나는 그녀가 깨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건 말보다 더 진한 확신이었다.
그 후 며칠간 우리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우리는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갔다. 낮에는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밤에는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서영은 여전히 그녀만의 거리를 유지했다.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지도 않았고,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임시적인 것임을 아는 사람처럼.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어느 날 밤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냥 여름을 보내고 있는 거야."
"그게 전부예요?"
"응. 그게 전부야."
하지만 나는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내게는 새로웠다. 아침에 일어나는 모습, 커피를 마시는 습관, 책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손짓.
그녀는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했다. 마치 자신을 관찰당하는 것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처럼.
어느 날 오후,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몇 년 전부터."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당신에게."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안전한 사람. 그게 중요해."
"사랑은요?"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어. 필요는 알겠지만."
그 대답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녀가 나와 함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출장이 일주일 더 연장된다는 내용이었다. 서영은 전화를 받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더 할 수 있게 됐네."
그녀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기쁜 것도, 걱정하는 것도 아닌, 그저 사실을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거실에서 함께 TV를 봤다. 별로 재미있지 않은 드라마였지만, 우리는 끝까지 봤다. 그보다는 서로 옆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넌 뭘 하고 싶어?"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지금요?"
"아니요. 앞으로."
나는 생각해 봤다. 하지만 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요."
"계속?"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계속은 없어. 모든 건 언젠가 끝나지."
그 말이 예언처럼 들렸다. 나는 불안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하지만 잡아주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두었을 뿐이었다.
그날 밤도, 그다음 밤도, 우리는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쌓일수록,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끝이 곧 올 것이라는 것도.
***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낯익은 발소리.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가.
나는 얼어붙었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한순간에 마치 도둑이라도 된 듯, 무언가를 훔쳐버린 사람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셔츠를 움켜쥐고, 서둘러 입었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벽 옆으로 몸을 피했다. 현관 쪽에선 짐을 내리는 소리, 열쇠 꾸러미가 식탁 위에 던져지는 소리, 그리고 천천히 다가오는 발자국.
방문이 열렸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는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내 셔츠 단추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것, 그녀의 맨발, 침대 위의 구겨진 시트, 눅눅한 공기—그 모든 것을 말없이 읽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나는 말이 막혔다. 아버지의 눈빛은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그것은 실망을 넘어선, 포기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서영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그녀는 더욱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나를 거실로 불렀다. 서영은 부엌으로 피했다.
"설명해 봐."
아버지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아버지..."
"설명하라고 했다."
나는 무엇을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단순한 육체적 끌림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둘 다였으면서 동시에 둘 다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버지는 한참을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는 모르는구나."
"뭘요?"
"네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날 밤, 나는 그녀의 방 앞에 섰지만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우리는 한 지붕 아래에 있었지만, 이전보다 더 먼 거리에 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나에게 도시 외곽의 작은 연수원을 추천했다.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거기서 몇 달 지내며 생각해 봐. 네가 뭘 원하는지."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수원에서 일주일은 견딜 수 없었다. 규칙적인 생활, 강제적인 교육 프로그램, 무엇보다 서영과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마련된 듯한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그녀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나는 연수원을 떠났다. 아버지에게 연락하지 않고, 더 멀리,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집을 떠나던 날, 그녀는 현관에 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일부러 자리를 피했다.
"같이 가요."
나는 마지막으로 말해봤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난, 못가. 언젠가 넌, 날 지우게 될 거야. 그럴 바엔, 지금이 나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바람은 같은 방향으로 불지 않아."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마당을 스치듯 지나간 그림자였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계절이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그 여름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
"바람은 같은 방향으로 불지 않는다."
그녀의 말은 틀렸다.
바람은 돌고 돌아,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
다만 우리가, 그 바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