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작가노트 1
# 『바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어떤 계절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은 다르다. 바람은 돌고 돌아, 언젠가 같은 방향에서 다시 불어온다. 다만 우리가 그 바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이 소설은 그런 바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어느 여름이 내게 찾아온 것은 우연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여름을 기억해 낸 것이 우연이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재개발로 사라진 서울 근교의 한 동네를 지나다가 문득 멈춰 섰다. 이미 새 아파트가 들어선 그 자리에, 30년 전 여름의 잔향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단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름이면 찜통이 되던 낡은 집의 기억. 그 집에 있던 한 여자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감싼 채 부엌을 오가던 그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 침묵의 무게를 글로 옮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막상 쓰기 시작하니 쉽지 않았다. 그 여름을 어떻게 글로 만들 것인가? 더운 공기, 끈적한 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을. 나는 몇 번이나 원고를 엎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소설을 쓰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노르웨이의 숲』의 서정적 절제,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그 기법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키를 단순히 모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소설이 주로 도시적이고 모던한 감수성을 다룬다면, 나는 좀 더 끈적하고 원시적인 감정들을 탐구하고 싶었다. 하루키의 인물들이 쿨하고 이성적이라면, 내 인물들은 더 본능적이고 충동적이기를 원했다.
그 결과가 이 소설이다. 하루키의 기법은 빌렸지만, 그 안에 담은 것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움직인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감정이 오기 전에 이미 그것을 감지한다. 무언가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미세한 온도의 변화를. 바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이 상징을 떠올린 것은 실제 경험 때문이었다. 몇 년 전, 나는 남해안의 한 어촌 마을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바람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을 목격했다. 남서풍에서 북동풍으로, 단 몇 분 만에 공기 전체가 달라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바람이야말로 시간과 기억을 연결하는 가장 완벽한 매개체라는 것을.
이 소설에서 바람은 감정의 전령이다. 의식보다 먼저 도착해서 우리에게 무언가 다른 시간이 시작될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바람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우리의 기억을 흔들어놓는다.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신경 쓴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지 않고도 사랑을 전달하는 방법. 욕망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도 그 뜨거움을 느끼게 하는 방법. 금기를 명명하지 않고도 그 무게를 전달하는 방법.
이런 기법을 익히기 위해 나는 많은 연습을 했다. 특히 13화 근친 진실 발견 장면은 스무 번도 넘게 고쳐 썼다. "근친"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으면서도 그 충격을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몸소 깨달았다.
진짜 감정은 설명되는 순간 식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가장 깊은 아픔은 "아프다"라고 말하지 않을 때 더 절실하게 전달된다. 가장 강렬한 끌림은 "끌린다"라고 표현하지 않을 때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상황만 제시하기로 했다. 젖은 셔츠, 담배 연기, 낡은 흑백사진, 버스 창문 너머로 흔드는 손. 이런 것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해서 과거로 들어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단순히 극적 효과를 위한 구성이었다. 하지만 쓰다 보니 이것이 필연적인 구조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억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직선적이지 않고, 순서대로 오지도 않는다. 어떤 냄새, 어떤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20년 전의 어느 여름을 고스란히 되살려놓는다.
나 역시 그랬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과거의 어떤 기억들이 불시에 찾아왔다. 첫사랑의 기억, 아버지와의 갈등, 그리고 지금은 이해할 수 있는 어른들의 복잡한 감정들. 그 모든 것이 뒤섞여서 이 이야기가 되었다.
중년이 된 혁지가 아이와 함께 그 마을을 다시 찾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아버지가 된 지금, 그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했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아들도 자신에게 똑같은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이 시간의 순환이고, 세대의 숙명이다.
이 깨달음은 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내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내가 반항적이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답답해했던 이유도.
이 소설에는 네 명의 여자가 나온다. 그들은 모두 내가 실제로 만났거나 관찰했던 사람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
서영은 사랑과 소유욕 사이에서 헤매는 복잡한 여자다. 그녀의 모델이 된 사람은...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사람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그 감정이 순수한 것인지 왜곡된 것인지는 당사자도 모르는 복잡함이었다.
유나는 건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여자다. 그녀는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연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상대를 기다려주지만, 자신이 두 번째가 되는 것은 거부하는 자존심. "크리스마스쯤 돌아올 거예요"라는 거짓말 속에는 마지막 예의와 배려가 담겨 있다. 이런 이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생각한다.
하나는 이 소설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다. 그녀는 어떤 면에서는 나 자신의 투영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받지만 변명하지 않는 모습, 그 침묵의 의연함. 서영과 그녀의 관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연대다. 상처받은 사람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그리고 펜션 어머니가 있다. 그녀는 내가 어릴 때 만났던 한 분을 모델로 했다. 시골 할머니였는데, 정말로 묻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으면서 필요한 것을 내어주는 분이었다. 그분을 통해 나는 진짜 모성이 무엇인지 배웠다.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균형 잡기였다. 너무 직접적이면 진부해지고, 너무 암시적이면 독자가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3부에서 서영과 혁지의 관계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처음 초고에서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썼다. 하지만 읽어보니 너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다. 그래서 몇 번에 걸쳐 점점 더 절제된 방향으로 수정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버전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또 하나의 고민은 대화량이었다. 하루키 스타일을 추구하면서도 한국적 정서를 살리려다 보니, 대화를 얼마나 줄여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3부는 특히 여러 번 고쳐 썼다.
이 소설을 읽을 독자들을 생각해 보면 복잡한 마음이 든다.
20대 독자들은 아마 유나에게 가장 많이 공감할 것 같다.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30-40대 독자들은 혁지의 혼란과 방황에 이입할 것이고, 50대 이상 독자들은 아버지 세대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바라볼 것이다.
여성 독자와 남성 독자의 반응도 다를 것 같다. 여성 독자들은 서영과 유나, 하나의 관계에 더 주목할 것이고, 남성 독자들은 혁지의 심리에 더 몰입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독자들은 이 소설이 불편할 수도 있다. 금기적인 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조차 이 소설의 의도된 효과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여러분은 답답할 수도 있다.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숨기고, 왜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것들은 설명서가 없다. 사랑도, 이별도, 후회도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상황들을 경험할 뿐이고, 그 의미는 각자가 찾아야 한다.
이 소설의 혁지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서영과의 관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유나를 놓아준 것이 옳았는지, 그 모든 여름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그는 다만 기록할 뿐이다. 그날의 바람 방향을, 그녀의 젖은 머리칼 냄새를, 버스가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이제는 확신한다.
여러분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분만의 의미를 찾아가기를 바란다. 내가 숨겨놓은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의 경험과 연결되는 지점들을 찾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소설에는 아쉬운 점들이 있다. 하나라는 캐릭터를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버지의 심리도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현재 시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시간의 층위가 더 풍부해졌을지도 모른다.
서영과 혁지의 관계를 그릴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그 복잡한 감정의 본질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였다. 모성에 대한 동경과 성적 끌림이 뒤섞인 그 묘한 감정을,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실하게 그려내는 것. 몇 번이나 선을 넘나들었다. 너무 직접적이면 품위를 잃고, 너무 우회적이면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도전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고백할 것이 있다. 이 작품을 쓰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반딧불이」와 『노르웨이의 숲』의 관계를 많이 생각했다. 「반딧불이」는 짧은 중편이었지만, 그 안에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장편의 모든 씨앗이 들어있었다. 나 역시 이 소설을 쓰면서 비슷한 마음이었다.
지금 이 중편은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이다. 하지만 동시에, 언젠가 더 큰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도 품고 있다. 하나의 과거사, 아버지와 아들의 더 깊은 갈등, 유나의 약혼자와의 본격적인 만남, 서영의 어린 시절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은 암시로만 남아있지만, 언젠가는 완전한 서사로 펼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완벽한 소설은 없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장편이 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경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떤 독자는 이 소설이 슬프다고 할 것이다. 어떤 독자는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둘 다 맞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대개 슬프기도 하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있을 것이다. 그 바람을 느낄 수 있다면, 당신도 이미 어떤 새로운 계절의 시작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202x 년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밤
원고를 마무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