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2
# 『바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첫 번째 작가노트에서는 감성적 접근을 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이론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차가운 분석이 아닌, 따뜻한 이해의 시선으로.
이 소설을 쓰기 전,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이토록 고통받고, 동시에 행복해하는가?
오랜 사유와 관찰 끝에 나는 다음과 같은 정의에 도달했다:
연애*는 사회가 만든 관계의 '틀(프레임)'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다.
사랑*은 감정의 기울기이고,
연대*는 감정의 윤리이며,
정사(正事)*는 감정의 밀도다.
이 셋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된다.
정사*: 여기서는 단순한 성적 관계가 아닌,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깊은 만남을 의미한다.
좀 복잡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보자.
연애라는 틀 안에 있지만 진정한 사랑이 없는 관계들이 있다. 반대로 연애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깊은 사랑이 흐르는 관계들도 있다. 펜션 어머니가 혁지에게 보여준 것이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
이 소설의 모든 관계는 이런 관점에서 그려졌다.
이 이야기는 사실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모성이란 무엇인가?"
내 주변을 보면서 늘 궁금했다. 어떤 여성은 자연스럽게 모성을 발휘하는데, 어떤 여성은 그렇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혈연관계가 아닌데도 진정한 모성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또 뭘까?
긴 관찰과 사유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모성은 생물학적 가능성으로 주어지지만,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학습과 환경에 달려 있다.
서영이라는 인물이 바로 이 복잡성을 보여준다. 그녀 안에는 타고난 모성적 충동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건강하게 발현되지 못하고 소유욕과 뒤섞여 버렸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경험 때문이다.
반면 펜션 어머니는 생물학적 출산과 무관하게 발현되는 모성의 완벽한 예다. 그녀는 혁지가 누구인지, 어떤 사정으로 왔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줄 뿐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진정한 모성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15화에서 서영이 "진짜 모성이 뭔지 알아? 놓아주는 거야"라고 말하게 했다.
전통적으로 모성은 성스러운 것으로, 성적 끌림은 본능적인 것으로 분리해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두 감정 모두 '누군가를 향한 강렬한 몰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상대방과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도 비슷하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서영과 혁지의 관계에서 이런 복잡함이 드러난다. 그녀는 혁지를 조카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남자로 끌린다. 이 모순적인 감정이 그들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고 금기적으로 만든다.
근친상간이 왜 금기가 되었을까? 단순히 생물학적 이유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근친은 사랑과 연대와 정사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 완전함이 너무 강력해서 사회가 두려워한 것이 아닐까?
서영과 혁지는 법적으로는 근친이 아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금기적이다. 이런 미묘한 경계선에서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성 간의 로맨틱한 사랑 외에도, 동성 간의 깊은 우정, 혈연을 넘어선 가족애 등이 있다.
하나와 서영의 관계는 이 소설에서 가장 신비로운 부분이다. 두 여성은 마을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간다. 하나는 독살 의혹으로, 서영은 정체불명의 도시 여자로.
그들 사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해가 있다. 같은 억압을 경험한 사람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그런 연대. 이것을 굳이 '동성애'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이다.
실제로 이런 관계를 본 적이 있다. 내 친구 중에 힘든 시기를 함께 겪은 두 여성이 있었는데, 그들 사이의 유대는 일반적인 우정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서로의 아픔을 말하지 않고도 이해하는, 그런 깊은 연결.
유나가 혁지에게 보여준 것은 건강한 연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혁지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한다. 자신이 두 번째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그런 자존감의 표현이다.
"크리스마스쯤?"이라는 거짓말 속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음이 동시에 담겨 있다. 이런 이별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성숙한 사랑의 증거다.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랑과 연대와 정사의 다양한 조합을 보여주려 했다.
서영과 혁지*: 강렬한 사랑과 정사는 있지만 건강한 연대가 부족한 관계. 서로를 소유하려 하지만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유나와 혁지*: 따뜻한 사랑과 건강한 연대가 있는 관계. 정사보다는 순수한 감정적 교류가 중심이다.
하나와 서영*: 깊은 연대만이 존재하는 관계. 설명할 수 없지만 강력한 결속.
펜션 어머니와 혁지*: 무조건적인 모성애. 혈연을 넘어선 진정한 가족애.
이런 다양한 조합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흔히 '연애'라는 단어로 남녀 간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연애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틀'일뿐이다. 그 틀 안에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반대로 연애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관계에 더 깊은 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
혁지와 서영의 관계는 연애라는 틀로는 설명할 수 없다. 혁지와 유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감정은 연애라는 사회적 범주를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이 모든 분석이 단순한 이론적 호기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의 경험과 관찰에서 우러나온 것들이다.
나 역시 사랑과 소유욕을 구분하지 못해 관계를 망친 적이 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내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였던 경우도 있었다. 서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반대로 정말 순수한 연대를 경험한 적도 있다. 힘든 시기에 아무 조건 없이 도움을 준 사람들, 내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붙잡지 않았던 사람들. 그런 경험들이 펜션 어머니와 유나라는 인물을 만들 수 있게 해 줬다.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이론과 감정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너무 이론적으로 접근하면 딱딱해지고, 너무 감정적으로만 쓰면 깊이가 없어진다.
특히 13화에서 근친적 진실을 드러내는 장면은 정말 어려웠다. 충격적이면서도 자극적이지 않게, 복잡하면서도 이해할 수 있게 쓰려다 보니 몇 십 번을 고쳐 썼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진정한 이해는 분석이 아니라 공감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서영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려면 그녀의 입장이 되어봐야 했고, 혁지의 혼란을 그리려면 그 나이의 남성 심리로 돌아가야 했다.
이런 주제를 다룬 한국 소설이 많지 않다는 것도 이 소설을 쓴 이유 중 하나다. 우리 문학에서는 사랑을 다룰 때 너무 순수하거나 너무 자극적인 두 극단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 중간 지점, 인간의 감정이 실제로 작동하는 복잡한 영역을 그리고 싶었다.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그저 인간적인 이야기를.
이런 분석을 늘어놓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읽기 경험이다. 나의 의도보다는 여러분이 이 소설에서 발견하는 것들이 더 소중하다.
혹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랑에 대해, 관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면 더욱 좋겠고.
무엇보다, 이 소설이 사랑의 복잡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사랑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그 복잡함이야말로 인간다운 것이다.
이 모든 탐구를 통해 내가 도달한 결론은 단순하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상처받고, 치유되고, 다시 사랑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해하려 한다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는 모든 감정의 진실이 담겨 있다. 우리는 그 진실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든 감정의 경계를 허물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