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부: 완결 - 진실 발견과 마지막 이별
# 『바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날 아침, 유나는 일찍 짐을 꾸렸다.
"서울로 올라가요."
학교가 시작된다는 거짓말. 방학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지켜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예의였다.
펜션 어머니는 딸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말리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도시락을 싸주었다. 그녀의 손길에는 아무런 원망이 담겨 있지 않았다.
"조심히 가라. 그리고... 네가 옳아."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유나는 앞만 보며 걸었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그 뒷모습에서 나는 단단한 결심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신은 이미 선택했어요. 그냥 인정하기 싫을 뿐이죠."
그녀는 돌아서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슬픔보다는 차라리 실망이 담겨 있었다.
"저는 누군가의 두 번째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나는 이미 선택했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버스가 왔다. 낡은 시외버스였고, 엔진 소리가 거칠었다. 유나는 짐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가 창문을 열었다.
"언제 다시 와요?"
나도 모르게 물었다.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거짓말. 그러나 그 거짓말 속에는 서로에 대한 마지막 배려가 담겨 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그 버스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버스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더 서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서영과 마주쳤다. 그녀는 마을 어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떠났구나."
"네."
"후회하지 않아?"
"모르겠어요."
"그럼... 이제 시작이네."
그날 밤, 펜션은 텅 비어 있었다. 펜션 어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혼자 마당에 앉아 별을 보았다. 유나가 없는 이곳이 이렇게 허전할 줄은 몰랐다. 공기조차 다르게 느껴졌다.
그때 서영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꿈속의 인물 같았다.
"혁지야."
오랜만에 들어보는 내 이름. 그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응?!"
"미안해."
"뭐가요?"
"여기까지 쫓아온 것."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온 게 싫지는 않다고 말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복잡해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미소였다.
"복잡한 게 좋을 때도 있어..."
그날 밤, 나는 서영과 함께 별을 보며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
유나가 떠난 후, 나의 일상은 다시 단조로워졌다. 펜션 일을 하고, 바다를 보고, 때로는 서영과 마주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단조로움 속에서도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영은 여전히 하나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질투도, 호기심도 아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마치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오후, 서영이 펜션을 찾아왔다.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왔고, 표정도 평소와 달랐다.
"잠깐 나와."
우리는 해안가 바위 위에 앉았다. 바다는 잔잔했고, 멀리 수평선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후회하고 있지?"
그 애를 보내준 것 말이냐는 뜻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안 해도 알아. 네 얼굴에 다 쓰여있어."
"그럼 왜 물어보세요?"
"확인하고 싶어서."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도 후회하고 있다고. 나를 놓아준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라는 그녀의 질문. 우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서영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유나와의 시간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었다.
"생각해 봐. 급하지 않아."
서영은 일어나서 돌아갔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무언가 결정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며칠 후, 나는 결정했다. 아니, 결정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그날 밤, 나는 서영의 집을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자 그녀가 나왔다.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결정했어?"
"네."
"뭘?"
"당신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 미소에는 승리감 같은 것이 스며 있었다.
집 안은 간단하게 꾸며져 있었다. 몇 개의 가구와 책들, 그리고 작은 꽃병 하나. 서영다운 공간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고, 불필요한 것은 없었다. 한쪽 구석에 낡은 앨범 하나가 보였다.
"차 마실래?"
"네."
그녀가 차를 끓이는 동안, 나는 집 안을 둘러봤다. 책장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소설, 시집, 그리고 몇 권의 사진집. 그런데 그 낡은 앨범이 계속 신경 쓰였다.
"뭘 보고 있어?"
서영이 차를 들고 와서 물었다.
"저 앨범이요."
"아, 그거... 별거 아니야."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마치 숨기고 싶은 것을 들킨 사람의 표정이었다.
우리는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차는 따뜻했지만, 분위기는 어색했다. 무언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 우리 사이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정말 괜찮아?"
서영이 물었다.
"뭐가요?"
"나를 선택한 것."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선택이라기보다는 포기에 가까웠으니까.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왜요?"
"넌 아직 나를 몰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속에는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서영과 함께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녀의 체온, 그녀의 향기.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달랐다.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계속 유나를 생각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들, 그녀의 떠나는 뒷모습. 그리고 그녀가 남기고 간 공허까지.
며칠 후, 나는 하나의 약국 앞에서 서영을 기다리고 있는, 서성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아니, 질투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았다.
"뭐 하고 있어?"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펜션 어머니였다.
"아, 그냥..."
"서영이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펜션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웠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진짜 사랑은 기다려주는 거야.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유나는 널 기다려줬어. 하지만 서영이는..."
펜션 어머니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그때 약국 문이 열리고 서영이 나왔다. 그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기다렸어?"
"네."
"미안해. 하나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우리는 함께 걸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펜션 어머니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그날 밤, 서영의 집에서 나는 다시 그 앨범을 보았다.
"그거 정말 궁금해?"
서영이 물었다.
"조금요."
"그럼 볼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예감에 휩싸였다.
***
서영이 앨범을 가져왔다. 낡고 오래된 앨범이었다. 표지는 갈색으로 바래어 있었고, 모서리는 해져 있었다.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옛날 사진들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내게도 전해져 왔다.
앨범을 펼치자 오래된 흑백사진들이 나타났다. 대부분 70년대, 80년대 초반의 사진들 같았다. 빛바랜 추억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내 어릴 때 사진이야."
서영이 한 장을 가리켰다.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한복을 입고 서 있었다. 표정이 무척 진지했다.
"예쁘네요."
"그때는 그랬지."
우리는 계속 사진을 넘겼다. 가족사진, 학교 사진, 친구들과의 사진. 평범한 성장앨범이었다. 하지만 점점 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나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사진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30대 정도의 여자, 그리고 5살 정도의 남자아이,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십 대 소녀.
남자아이는 나였다. 어린 시절의 나. 분명히 나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 사진은..."
내 목소리가 떨렸다.
서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치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의 얼굴이었다.
"이 여자는 누구예요?"
"그건..."
"내 어머니잖아요. 어머니..."
사진 속의 여자는 분명히 내 어머니였다.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십 대 소녀는...
"당신이네요."
서영은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들통난 사람의 모습이었다.
"설명해 주세요."
"진정해."
"설명하라고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서영이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당신이 누구예요? 정말로 누구예요?"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재정렬되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들, 모든 감정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서영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희 어머니와 나는... 친척이었어."
"친척?"
"먼 친척. 어머니 쪽 친척동생이었지."
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혼란스러웠다. 충격과 동시에 묘함이 들어왔다. 역함이, 알 수 없는 흥분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그럼 우리가 했던 일들은..."
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말할 수 있었겠어?"
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밤바다가 검게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였는데... 점점 다른 감정이 생겼지만."
"다른 감정?"
"넌. 언니를 닮았어."
그녀는 말을 멈췄다.
"정말로?"
"널 사랑하게 됐어."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서영이 나를 대하는 방식, 그녀의 복잡한 감정,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느꼈던 이상한 매혹됨, 기시감, 지울 수 없었던 파동.
"이상했어요."
내가 중얼거렸다.
"뭐가?"
"당신과 있을 때... 마치 어머니 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데 동시에..."
"동시에?"
"끌렸어요."
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네가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동시에 남자로 보였어."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기의 무게가 우리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공기마저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요?"
내가 물었다.
"모르겠어."
"계속할 수 있을까요? 이런 관계..."
서영은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 마음도 복잡했다. 역겨움.. 그리고 끌림을.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
그날 밤, 나는 펜션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잠들 수 없었다. 계속해서 그 사진이 떠올랐다. 어머니, 어린 나, 그리고 십 대의 서영.
나는 결국 금지된 욕망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인식이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며칠간 나는 서영을 피했다. 펜션에서 일할 때도, 마을을 돌아다닐 때도, 가능한 한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피할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녀에 대한 갈망이었다.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을 자체가 좁았고, 갈 곳도 많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나는 해안가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피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피하고 있구나."
"네."
"왜?"
"두려워서요."
서영은 내 옆에 앉았다.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자신도 무섭다고 말했다. 이 감정이. 모성인지, 사랑인지, 아니면 다른 뭔 가인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했다. 나를 놓아주고 싶지 않다고.
그 말이 내 가슴 한구석을 건드렸다.
"저도요."
그날 밤, 나는 다시 서영의 집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의 선택이었다. 금기를 딛고, 무릅쓴 발걸음이었다.
"왔구나."
"네."
"후회하지 않을 거야?"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어요."
그날 밤, 우리의 관계는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더 격렬하고, 더 절망적이고, 더 급진적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강한 욕망을 끌어냈다.
"어머니 같아요."
내가 중얼거렸다.
"그게 이상한 거야. 나도 네가 아이 같으면서 동시에 남자 같아."
우리는 서로를 안았다. 금기의 무게 속에서. 죄악감과 동시에 해방감도 느꼈다.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내 어린 시절, 서영의 외로웠던 시간들. 이 금기적 관계가 오히려 우리를 더 솔직하게 만들었다.
"언니가 죽고 나서, 나는 계속 네가 궁금했어."
서영이 말했다.
"왜요?"
"언니는 너를 정말 사랑했거든. 마지막까지. 그리고 부탁했었어."
그 말에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래서 나도 널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네 어머니의 사랑을 대신해서."
"그럼 지금 느끼는 감정은 가짜인가요?"
"아니야. 진짜야. 하지만 복잡해."
정말 복잡했다. 모성애와 연인 간의 사랑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었다.
며칠 후, 나는 하나를 만났다. 그녀는 약국에서 혼자 있었다. 평소보다 더 조용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과 잘 지내고 있어?"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네."
"조심해."
"뭐가요?"
"서영은 복잡한 사람이야. 사랑과 소유욕을 구분하지 못해."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정확한 지적 같았다.
"하나 씨는 서영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상처받은 사람이기도 하고."
"어떤 상처요?"
"그건 본인이 말해야 할 일이지."
하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서영에게 물었다.
"하나 씨가 당신에 대해 말하더라고요."
"뭐라고?"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서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순간 굳어지는 얼굴이었다.
"모든 사람이 상처를 가지고 있어."
"어떤 상처요?"
"말하고 싶지 않아."
"저에게도 요?"
서영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치 오래 묻어둔 상처를 꺼내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없었어. 어렸을 때부터."
"돌아가셨어요?"
"아니야. 날 버렸어."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서영의 소유욕, 그녀의 복잡한 감정들. 모든 것이 설명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네 어머니가 나에겐 더 특별했어. 처음으로 만난 진짜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거든."
"그래서 저를..."
"그래 그래서 널 더욱 놓아주고 싶지 않아. 언니의 일부 같은 느낌이니까."
나는 서영을 꽉 안았다. 우리는 둘 다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통해 치유받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방법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동시에 더 깊은 상처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
어느 날 아침,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서영이 나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서영은 지금의 서영이 아니라,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서영의 것이었다.
꿈속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라고.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때 나는 깼다. 서영이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꿈꿨어?"
"네."
"어떤 꿈?"
"어머니 꿈이요."
서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마치 같은 꿈을 꾼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어?"
"떠나라고 하셨어요."
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생각해 온 결론에 도달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언니가 옳은 것 같아."
"네?"
"우리,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아."
나는 깜짝 놀랐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왜요?"
"이건 옳지 않아!"
"처음부터 옳지 않은 걸 알고 있었잖아요."
"그래. 그런데 그때는 몰랐어. 하지만 이제는 알아."
서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새벽 바다가 회색빛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나는 확고한 결심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네??"
"소유하고 싶었던 거야."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정확한 자기 진단이었다.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네게 투영하고 있었어. 그리고 넌, 나에게서 어머니를 찾고 있었고."
"그게 나쁜 건가요?"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 하지만... 결코 옳은 건 아냐."
서영은 돌아서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이상한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오래된 짐을 내려놓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혁지야, 진짜 모성이 뭔지 알아?"
"뭐?"
"놓아주는 거야. 소유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이 펜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유나를 놓아주었다. 유나가 원하는 대로. 묻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고.
"펜션의 그녀를 봐. 그녀가 진짜 어머니야. 자식을 놓아줄 줄 아는."
서영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보는 순수한 미소였다.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은 듯해. 너를 진짜로 사랑한다면 놓아줘야 한다는 걸."
"서영..."
"그리고 나, 하나와 함께 갈 거야."
"왜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해.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 끼리니."
그때 나는 알았다. 서영과 하나 사이에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더 깊은 이해. 남자인 내가 절대 접근할 수 없는 그녀들만의 세계.
"언제 떠나세요?"
"내일."
"어디로요?"
"몰라.. 그냥 멀리. 아주 멀리."
그날 밤, 나는 서영과 마지막 밤을 보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대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우리의 복잡했던 감정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마치 오래된 친구의 이별 같았다.
"후회하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아니야. 이게 맞는 것 같아."
"저는 후회할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럴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게 될 거야."
새벽이 되자 서영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수순을 밟아가는 느낌이었다.
"어디 가세요?"
"같이 하나를 만나러 가자."
"왜요?"
"작별 인사는 해야지."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고마웠어."
"뭐가요?"
"나를 사랑해 줘서."
그 말에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다음날 아침, 서영과 하나는 함께 마을을 떠났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두 여자는 나란히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들 사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 흐르고 있었다.
버스가 왔다. 서영이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봤다.
"잘 살아."
서영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신도."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그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버스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더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남서풍이었다. 서울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바람이었다.
***
중년이 된 나는 펜션이 있던 자리에 서 있다. 건물은 헐렸고, 그 자리에는 작은 상가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바람은 여전히 같은 곳에서 불어온다. 남서풍. 그 바람 속에는 여전히 그 여름의 기억들이 살아 있다.
아이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아빠, 바람이 뭐라고 해요?"
나는 웃으며 답한다.
"안녕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정말요?"
"응. 바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그때 정말로 남서풍이 불어온다. 서울 쪽에서. 이십여 년 전과 똑같은 방향에서.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쉰다. 그 바람 속에는 여전히 그 여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영의 향기, 유나의 웃음소리, 하나의 침묵.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나쳐간 시간의 흔적들.
"아빠도 바람한테 인사해요."
아이가 말한다.
"그래, 해볼까?"
나는 손을 들어 바람에게 인사한다.
"안녕."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어준다. 마치 대답하는 것처럼.
"아빠, 바람이 대답했어요!"
"그러게. 바람은 예의가 바른가 봐."
아이와 나는 손을 잡고 걸어간다. 바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리고 나는 안다. 언젠가 이 아이도 자신만의 바람을 만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바람이 아이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삶이다. 바람을 따라 흘러가면서도, 때로는 바람에 맞서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
바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바람은 다만, 시간이 지나면 방향을 바꿀 뿐이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아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 작은 존재도 언젠가 나를 넘어서려 할 것이다. 그것이 아들의 숙명이고, 아버지의 운명이다. 나처럼. 내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사랑은 놓아주는 것이라는 걸. 서영이 가르쳐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
"바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바람이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