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서문:낙화명부(落花名簿)

_햇살 한 줌 들지 않는 곳, 두 개의 버전에 대하여

by leehyojoon ARCH

작가 서문: 낙화명부(落花名簿)

_햇살 한 줌 들지 않는 곳, 두 개의 버전에 대하여




시에서 소설로: 두 번째 망명


이 소설은 한 편의 시에서 시작되었다.


"부디 나를 잊으소서, 이 노래도 잊으소서."



이 구절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인간의 생명이 권력의 영속성을 증명하는 도구로 소모될 때, 그 세계의 중력은 얼마나 뒤틀려 있는가?


나는 그 시를 읽고 한동안 쓰기를 멈추었다.


처연했다. "부디 나를 잊으소서"라는 구절이 한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저항이 스스로를 무효화하는 그 역설이 너무 강렬했다.


시녀는 시인이 주인공 삼았다. 나는 석공을 화자로 삼기로 했다. 그 노래를 듣고 무너져내리는, 살아남은 석공을.


진행 중이던 다른 작업을 멈췄다. 이것부터 써야 했다. 가슴이 뛰었다.


전작 『심장 아래, 피보다 따뜻한 것들』에 등장하는 번역가 사토는 이렇게 말한다. "번역은 일종의 망명이에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떠나는 일이니까."


나는 이것을 시에서 소설로의 망명이라 부른다. 시의 언어를 떠나 서사의 언어로. 6행을 떠나 11장으로. 압축을 떠나 확산으로.


시는 암시한다. 소설은 구현한다.

시는 한 줄로 쓴다: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돌방."

소설은 한 장으로 쓴다: 석공이 도면을 그리고, 빛의 경로를 계산하고, 두 번의 꺾임을 설계하는 과정.


망명은 배신이다. 원작을 떠나는 일이니까. 시의 압축을 포기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또 다른 형태다. 시가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해주는 일이니까. 시의 본질을 다른 형태로 되살리는 일이니까.


『귀환하지 않는 자들』https://brunch.co.kr/@knightflit/272에 이어, 이것은 나의 두 번째 망명이다.





왜 이 소설을 쓰는가


고대 순장 제도는 실제로 존재했다. 왕이 죽으면, 그를 섬기던 사람들이 산 채로 무덤에 들어갔다. 자발적 동행이라 불렸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름은 지워졌고, 노래는 돌 아래 묻혔다.


나는 그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화하고 싶지 않았다. 아름답게 쓰되 잔인함을 숨기지 않고. 서정적이되 냉혹하게.


석공은 무덤을 만든다. 완벽한 어둠을 설계한다. 빛이 한 줌도 들어가지 않도록. 그는 기술자다. 하지만 그가 만드는 것은 142명의 무덤이다.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시녀는 무덤에 들어간다. 비단 옷을 입고, 향을 바르고, 차가운 흙바닥에 앉는다.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그 노래는 땅 위로 솟지 못한다. 돌이 막는다.


상궁은 흔적을 지운다. 머리카락을 태운다. 한 줌씩. 연기가 오른다. 재만 남는다. 명을 따른다. "잊으라."


이것이 내가 써야 했던 이야기다.





상태적 리얼리즘


이 소설은 '상태적 리얼리즘'이라는 방법론으로 쓰였다. 감정을 명명하지 않고,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며, 상태만 기록한다. 손이 떨리고, 문이 닫히고, 연기가 오른다. 독자는 측정값을 통해 의미를 추론한다.


자세한 방법론은 각 버전의 서문을 참조하시오.





낙화명부(落花名簿)의 특징


이 소설은 하나의 시에서 시작되었지만, 두 버전은 시를 다르게 다룬다.

Version A는 시를 온전히 제시한다.

Version B는 시를 해체하여 서사에 녹인다.


자세한 것은 각 버전의 서문과 에필로그를 참조하시오.


Version B에서

시는 해체된다. 직접 인용되지 않는다. 대신 건축으로, 행위로, 상태로 변환된다.


독자는 소설을 처음 읽을 때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두 번째 읽을 때, 혹은 에필로그를 읽은 후, 시의 파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소설 전체가 하나의 시였다는 것을.





왜 두 개의 버전인가


나는 하나의 서사를 두 가지 방법으로 쓰고 싶었다.


Version A가 먼저 공개된다. 6장. 단일 경로. 하나의 필연. 압축과 생략의 서사. 최소한의 문장으로 최대한의 긴장을. 하드보일드 리리시즘. 서정적 언어로 감싼 냉혹한 세계.


Version A가 완결된 후, Version B가 시작된다. 같은 이야기지만 다른 경로들. 분기와 중첩의 서사. 6장부터 11장까지, 각 장에는 2-3개의 버전이 있다. 어떤 시점에서 볼 것인가. 누구의 경험을 따라갈 것인가. 어떤 결말을 선택할 것인가. 독자의 선택이 텍스트의 현실을 결정한다.


둘 다 상태적 리얼리즘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 상태를 배치하는 방식이 다르다.


Version A에서 석공은 무덤을 만들고 떠난다. 하나의 경로.


Version B에서 독자는 선택한다. 석공의 시점인가, 시녀의 시점인가. 석공이 견디는가, 파괴하는가. 상궁이 기억하는가, 지우는가. 성문에서 누구를 만나는가.


Version A만 읽어도 완결된 작품이다. 하나의 이야기로서 충분하다.


Version B까지 읽으면 같은 사건이 얼마나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지 경험하게 된다.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현실로 분기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개인적인 말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시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142명을 어둠 속에 가두는 일. 그들의 죽음을 기록하는 일. 12살 시녀가 무릎을 끌어안고 차가운 흙바닥에 앉는 장면을 쓰는 일. 석공의 손이 떨리게 하는 일. 상궁이 머리카락을 한 줌씩 태우게 하는 일.


이 모든 장면이 잔인했지만, 동시에 아름다웠다.

시가 그랬듯이.


시가 나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기 때문이다.


사토의 말처럼, 번역은 망명이다. 하지만 그 망명을 통해서만 진정한 고향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시의 언어를 떠나야만, 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망명은 배신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또 다른 형태다.





독자에게


이 소설은 시의 아름다움과 처연함을 최대한 살리려 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잔인함을 가리지 않는다.


폭력이 있다. 죽음이 있다. 구원이 없다. 카타르시스도 없다. 인물들은 고통받고, 견디고, 때로 무너진다.


당신은 먼저 Version A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압축된 서사가 주는 긴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Version A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다.


하지만 Version B가 시작되면, 선택할 수 있다. 같은 이야기의 다른 경로들을 따라갈 수 있다. 분기하는 서사 속에서 선택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망치든건축가 2026년 2월

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