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 부대끼는 이 저녁에
그리운 이는 어딜 가고
스산한 겨울 꽉찬 바람에
길가에는 겨울 향 가득하다
가을 내 한가히 풀 뜯던
들가 누렁소
벌써 제 집 찾아가고
이젠 불어오는 찬바람엔
까막이 지즐댄다
있고 없음이야
가슴으로 살아가길
이 겨울, 이 바람엔
그리움이 타오른다
헤어져 떠난 이 나루터로 되돌리고
못내 아쉬움이 내 발길 되짚는다
등불 아래
반짝이는 가로등
버티던 잎은 그저 흩뿌리
이젠 애처롭기까지
그대 손잡곤
그리 걸어가자
그리 뛰어가자
그저 기대는 접고서 ㅡ.ㅡ
201✘. 2. 9.
겨울이 오면 찬바람이 몸에 부딪혀 온다. 부대끼는 느낌이다. 부드럽게 스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와서 부딪히는, 그게 겨울 바람의 인사라는 걸 나이가 들수록 더 잘 안다. 스치는 것과 부딪히는 것은 다르다. 스치는 것은 지나가지만 부딪히는 것은 남는다. 몸에 남고, 기억에 남고, 그 계절의 냄새로 남는다.
올해도 그런 저녁이 있었다. 그 저녁에 오래된 블로그를 열었다. 201✘년 2월 9일. 오후 여섯 시에 올린 시 하나가 거기 있었다.
제목은 꽉찬 겨울이었다.
그때의 나는 실제로 꽉 차 있었다. 다만 무엇으로 꽉 찼는지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 무렵 나는 독립한 직후였다. 20년 넘게 다른 사람의 설계 아래서 일하다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건 사무소를 차렸다. 건축의 세계는 냉정하다. 학력이 중요하지 않다. 박사 타이틀도 곧잘 무시된다. 실력과 네임밸류만으로 살아남는 세계다. 안주하는 순간 끝난다는 걸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몸으로 안다.
그럴듯한 말들이 원래 그렇다. 듣기엔 좋고 살기엔 차갑다.
사무소는 집 근처였다. 걸어서 몇 분 거리였지만 거의 그곳에서 살았다. 집과 사무소의 경계가 흐릿했다. 아니, 경계가 없었다. 사무소가 집이었고 집은 가끔 들르는 곳이었다. 책상에 앉으면 팩스가 보였다. 내 컴퓨터 바로 옆이 팩스의 자리였다. 마치 팩스와 한 팀이 되어 일하는 기분이었다. 프린터는 바삐 움직이는데 팩스만 한가했다. 가끔은 팩스가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듯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일이 없다는 건 그런 거다. 기계도 눈치를 준다.
짙은 밤이었다. 유독 더디게 흘러가는 밤. 창 너머로 무수한 불빛들이 보였다. 저 불빛들 중에 내 팩스에 번호를 누르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밤이 반복됐다.
야참을 먹었다. 하루 여섯 끼를 목표로 세웠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책상 앞에서 먹었다. 평화롭고 조용하고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그러나 모르는 사람끼리 어쩌다 동석하게 된 것처럼 묘한 거리감 속에서 먹었다. 상대는 팩스였다. 눈앞에 있어도, 매일 함께 있어도, 가슴속은 세계의 끝처럼 멀었다.
그 밤 문득 눈을 들어 하루키의 책을 찾았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그 제목이 그때의 나를 정확하게 설명했다. 세계의 끝에 앉아서 하드보일드하게 버티는 것. 비는 내리고 있었다. 창 너머 회색 거리를 적시는 비. 프린터는 여전히 종이를 토해내고 있었다. 작은 소음. 불면의 밤은 그리도 깊어갔다.
그 공간에서 시를 썼다. 오후 여섯 시. 천수답에서 비를 기다리는 제사장처럼, 일을 기다리며 앉아 있던 그 사무소에서.
찬바람 부대끼는 이 저녁에. 그리운 이는 어딜 가고.
그리운 이. 지금 그 사람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름도 잘 안 난다. 살아남으려 필사적이던 시절에는 그리움을 제대로 붙들고 있을 여유가 없다. 버티는 일에 모든 감각을 쏟고 나면 그리움 같은 것을 꺼내 들여다볼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니 사람은 지워지고 온도만 남는다.
그 저녁의 찬바람, 그 겨울의 냄새, 누군가를 그리워하던 가슴의 온기 — 그것들만 남아서 지금도 겨울이 오면 다시 차오른다. 얼굴도 이름도 없는 그리움.
사람이 지워지면 감정만 순수하게 남는다.
그 감정이 매년 겨울마다 찬바람을 타고 돌아온다.
길가에는 겨울 향 가득하다고 썼다. 그 향이 좋아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향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썼을 것이다.
가을 내 한가히 풀 뜯던 들가 누렁소는 벌써 제 집을 찾아갔다. 누렁소는 갈 곳이 있었다. 가을이 끝나면 제 집으로 돌아가면 됐다. 나는 그때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몰랐다. 사무소가 집이었고 집이 사무소였으니 돌아갈 곳과 버티는 곳이 같은 자리였다.
독립이란 제 집을 새로 짓는 일인데, 집이 다 지어지기 전의 겨울은 어디서 버티는 건지.
까막이 지즐댄다. 지즐댄다는 말은 사전에 없다. 내가 만든 말이다. 그런데 그 소리가 들린다. 지저귀는 것도 아니고 울부짖는 것도 아닌, 찬바람 속에서 까막까치가 내는 그 소리를 나는 지즐댄다고밖에 쓸 수 없었다. 언어가 세상을 다 담지 못할 때 사람은 새 말을 만든다.
그때의 나에게 있는 말로는 담기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있고 없음이야. 가슴으로 살아가길. 이 겨울 이 바람엔.
이 세 줄 앞에서 자꾸 멈추게 된다. 짧은 줄들인데 오래 머물게 된다. 일이 있을지 없을지,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 그 모든 있고 없음을 머리로 계산하다 지쳐서 그냥 가슴으로 살기로 한 것 같다. 팩스가 울릴지 안 울릴지, 프린터가 바쁠지 한가할지 — 그것도 있고 없음이었다.
선언이라고 하기엔 너무 조용하고, 체념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단한 말.
이 겨울 이 바람엔 — 이라는 단서가 붙은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영원히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움이 타오른다. 차가운 겨울 한복판에서 불이 타오른다. 차가운 것들 사이에 있을 때만 뜨거운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따뜻한 계절에는 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겨울이어야 불이 보인다.
헤어져 떠난 이의 나루터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나루터는 내게 언제나 떠나보내는 장소다. 배가 강을 건너가고 나면 물결만 남는 그 자리. 물결도 곧 잠잠해지고 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흐른다. 그게 나루터의 잔인함이다.
그 자리에 아직 서 있는 것처럼 못내 아쉬움이 발길을 되짚었다. 앞으로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두고 온 것들, 포기한 것들이 찬바람 속에서 자꾸 살아났다.
그리움이란 게 꼭 사람에게만 향하는 건 아니다. 안정적이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결정을 내리기 전의 그 순간에 대한 그리움 — 그것들도 타오른다. 겨울이면.
등불 아래 반짝이는 가로등. 버티던 잎은 그저 흩뿌린다. 이젠 애처롭기까지.
버티던 잎이다. 그냥 떨어진 게 아니다.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떨어진 것들이다.
버텼기 때문에 애처로운 것이다.
그걸 보면서 애처롭다고 썼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나였던 것 같다. 등불과 가로등이 겹쳐 켜진 저녁 하늘 아래, 버티다 흩뿌려지는 잎들과 나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 잎들을 보면서 애처롭다고 했지만 사실 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대와 손잡곤. 그리 걸어가자. 그리 뛰어가자. 그저 기대는 접고서.
손잡고 걷고 싶고 뛰고 싶었다. 그런데 기대는 접었다. 이 말이 그 사람에게만 향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팩스가 울리기를 기대하지 말자. 이번 달이 버텨지기를 기대하지 말자.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대하지 말자.
기대를 하나씩 접어두고 그냥 걷는 것이다. 그게 그 겨울의 방식이었다. 체념인지 결심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 그때도 몰랐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썼을 것이다. 모르는 채로 정확하게.
ㅡ.ㅡ
말로 다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이모티콘이라고 하기엔 너무 쓸쓸하고 마침표라고 하기엔 너무 열려 있는.
열린 채로 남았다. 그 겨울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년이 넘었다. 그 사람 얼굴이 잘 안 난다. 그런데 그 저녁의 찬바람은 난다. 팩스가 팔짱 끼고 쳐다보던 그 밤도 난다. 창 너머 불면의 불빛들도 난다. 등불 아래 흩뿌리던 잎들도 난다.
기대를 하나씩 접어두던 그 감각도 난다.
겨울이 오면 또 찬바람이 부딪혀 올 것이다.
그래도 걸어갈 것이다.
기대는 접고서.
꽉찬 겨울은 그렇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