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생당한 이의 안도
# 고양이가 사라진 화요일의 오후
*소설*
## 방생당한 이의 안도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끝났다. 그리고 동시에 시작되기도 했다. 어떤 이야기들은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 시작과 끝이 뒤섞여서,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마지막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녀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창밖에는 여름이 와 있었고, 플라타너스 잎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서울의 6월은 언제나 그렇다. 습하고 무겁고, 뭔가 불완전한 채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다. 햇살은 강렬했지만 카페 안은 에어컨 덕분에 시원했다. 문명이라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다. 자연과 인공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내는 일.
"전처가 당신을 방생하지 않았어야 했어요."
그 말이 나오기까지 우리는 17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고 있었다. 습관이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침묵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궁금해서였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처럼, 침묵 자체가 하나의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침묵은 1분도 견디기 어렵지만, 어떤 침묵은 한 시간이 지나도 불편하지 않다. 이번 침묵은 후자에 속했다.
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지 않아서, 그리고 너무 정확하게 들려버려서. 마치 오래전에 들었던 재즈 레코드의 한 소절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정확한 화음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방생이라는 단어가 재미있네."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물고기나 새를 풀어주는 일에 쓰는 말인데."
"사람에게도 쓸 수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때로는 사람도 놓아주어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루이스 칸이 벽돌에 대해 말했듯이, '벽돌이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가'를 물어봐야 해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문장은 단단했다. 마치 시간이 쌓여 단단해진 벽돌처럼. 세월이 만든 균열조차 품은, 그런 벽돌. 나는 문득 어릴 적 할아버지 집의 담장을 떠올렸다. 그 담장은 해마다 조금씩 기울어졌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는 것들에는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무너지는 것들의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그것이 더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런가?" 나는 겨우 물었다. 마치 처음 배우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혹은 베케트의 등장인물처럼, 말의 무력함을 알면서도 계속 말해야 하는 존재처럼.
그 사이에 커피는 녹고 있었다. 내가 주문한 것은 아이스아메리카노였고, 그녀가 주문한 것은 카페 라테였다. 나는 이 카페에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곳의 단골인 것 같았다. 카운터 직원과 눈인사를 나누었고, 자연스럽게 구석 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 앉아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처럼. 시간이라는 것이 때로는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말했듯이, 기억은 선형적이지 않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순간조차 어디선가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됐는지 신기했다. 전처 얘기는 어떻게 나온 걸까? 아마도 내가 먼저 꺼낸 건 아닐 것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예전에는. 하지만 몇 번 만나면서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과거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맞다. 영화 얘기를 하다가 그렇게 됐던 것 같다. 우리는 페데리코 펠리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8과 1/2」을 좋아한다고 했고, 나는 「달콤한 인생」을 언급했다. 펠리니의 영화는 언제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린다고, 그녀가 말했다. 마치 우리 삶처럼,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꿈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고.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자연스럽게 삶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고, 거기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러다가 전처 얘기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냥 놔주면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대신 안고 살아야 해요. 조금 불편해도, 무겁더라도. 마치 건물의 내력벽처럼요. 제거하면 건물이 무너지는."
그녀가 말하는 동안, 나는 그녀의 손을 보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반지가 하나도 없었다. 손톱은 짧게 깎여 있었고, 왼손 검지에는 작은 상처가 하나 있었다. 아마도 종이에 베인 상처일 것이다. 그런 상처들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우리가 조심하고 있을 때도, 방심하고 있을 때도. 그리고 생각보다 오래 남아있다. 마치 마크 로스코의 캔버스에 스며든 색채처럼,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무수한 층이 겹쳐져 있는.
"무겁다는 건, " 나는 천천히 말했다. "견딜 수 있는 무게와 견딜 수 없는 무게가 있잖아."
"그럼요. 하지만 견딜 수 있는 무게인지 견딜 수 없는 무게인지는 들어봐야 알 수 있어요. 마치 공진 주파수처럼, 정확한 지점을 찾아야 해요."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내 안에 오래 비워둔 방 한 칸이 조금씩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방은 언제부터인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워두고 있었다. 무언가로 채우는 것이 두려워서, 혹은 채울 만한 것을 찾지 못해서. 카프카가 「성」에서 묘사한 K의 방처럼, 존재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방이 비어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지금 갑자기 그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키아로스쿠로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처럼, 어둠이 있어야만 빛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처럼.
그녀는 그 방의 구조를 아는 사람 같았다. 어느 벽이 비어 있고, 어디에 창이 필요한지 아는 사람. 무너진 기둥을 대신 들어주듯, 그녀의 말은 내 안의 어떤 틈을 정확히 받쳐주고 있었다. 마치 숙련된 건축가가 낡은 집의 구조적 취약점을 한눈에 알아보듯이. 혹은 펠리니가 영화 속 공간을 구성하듯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카페 안에서는 누군가가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나긋나긋하면서도 선명했다. 아마도 오래된 책일 것이다. 새 책이 내는 소리와는 달랐다. 종이가 세월의 무게를 견뎌온 그런 소리였다. 누군가는 그 책에 완전히 빠져있는 것 같았다. 페이지를 넘기는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오래 머물다가, 때로는 빠르게 넘어갔다. 그런 리듬이 있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증기를 뿜어내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멀리서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빌 에반스였다. 그 음악은 이런 오후에 잘 어울렸다. 무언가가 끝나가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시작되는 듯한 그런 오후에.
"음악이 좋네." 내가 말했다.
"여기 항상 이런 음악이 나와요. 사장이 재즈를 좋아해서요. 특히 빌 에반스를요."
"자주 오시나 봐."
"일주일에 세 번 정도요. 집 근처거든요. 그리고 여기서 일하기도 해요."
"무슨 일을?"
"번역이요. 주로 건축 관련 서적들을요."
그제야 그녀가 건축에 대해 말할 때의 그 정확함이 이해됐다. 전문가의 언어였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를 직접 바라봤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물건을 우연히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중요한 것이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찾고 있던 것이 아니라, 나를 찾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창밖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는 우리를 한 번 돌아보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양이들은 언제나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마치 우리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상기시키기 위해서인 것처럼. 혹은 체셔 고양이처럼, 미소만 남기고 사라지는.
"저 고양이, " 그녀가 말했다. "매일 이 시간에 지나가요."
"그래요?"
"네. 어제도, 그제도. 아마 내일도 지나갈 거예요. 마치 메트로놈처럼 정확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것들은 그렇게 반복된다. 우리가 알아채든 알아채지 못하든, 그들만의 시간표를 가지고 반복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반복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해,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라이히의 음악처럼, 반복이 곧 변화가 되는 순간을.
"고양이는 자유로워 보여." 내가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그녀가 반문했다. "아니면 그냥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걸까요? 어쩌면 고양이도 우리처럼 무언가에 얽매여 있을지도 모르죠.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에요."
그것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자유라는 것의 정의부터가 모호했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것이 자유일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일까. 고양이는 과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걸까. 그리고 본능에 따르는 것과 자유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는 안도했다. 그녀가 나를 방생하지 않을 거란 예감에. 그리고, 그게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에. 마치 커튼월 건물에서 유리와 프레임이 서로를 지탱하듯이, 우리도 서로를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방생당하지 않는다는 것의 무게를. 누군가에게 안겨 사는 것의 무게를. 그리고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것의 의미를. 카프카가 「변신」에서 묘사한 그레고르처럼, 변화한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무게를.
그녀는 커피를 마지막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컵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작고 명확했다. 마치 무언가가 결정되는 소리 같았다. 혹은 악장이 끝나는 순간의 침묵 같았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시계를 봤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우리가 여기 앉은 지 두 시간이 넘었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간 줄 몰랐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신호라는 것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처럼, 즐거운 시간은 정말로 빨리 간다.
"집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내가 물었다.
"괜찮아요. 정말 가까워요. 걸어서 십 분 거리예요."
그녀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섰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잠시 서 있었다. 거리에는 퇴근 시간의 분주함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모두들 어디론가 가야 할 곳이 있는 것처럼. 마치 호퍼의 「Nighthawks」 같은 풍경이었다. 도시의 고독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물었다.
"글쎄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고양이가 내일도 지나간다면요.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확인하고 싶다면요."
그리고 그녀는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서 있었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더. 마치 안토니오니의 영화에서 인물이 사라진 후에도 계속되는 롱테이크처럼.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방생당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방생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마도 의지의 문제일 것이다.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문제일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나는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오후에 나는 다시 그 카페에 갈 것이다. 고양이가 지나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시간은 순환한다. 마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처럼. 끝은 곧 시작이고, 시작은 곧 끝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한한 가능성들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