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_ 벽 너머의 입면도(立面圖)
나는 가끔, 나의 삶이 단면도(斷面圖) 한 장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한다.
정면도(正面圖)도 아니고, 배면도(背面圖)도 아니며, 꼭대기의 평면도(平面圖)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어딘가 잘라낸 듯한 단면. 감정의 층위(層位)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투명한 절단면(切斷面). 마치 루이스 칸이 말했듯 "빛이 구조(構造)를 만나는 순간"처럼, 내 삶도 언제나 그런 예리한 절단의 순간들로만 기억된다.
건축가로 오래 일했지만, 정작 내 삶의 설계도(設計圖)는 여전히 초안 상태였다. 언제나 부분적인 스케치, 미완성의 도면(圖面),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트레싱 페이퍼 더미뿐이었다. 완전한 입면도를 그려본 적이 없다.
하이데거가 말한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의 개념이 떠오른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던져진 존재들이다. 내가 건축가가 된 것도, 이 도시에서 살게 된 것도, 그리고 지금 이 복잡한 관계들 속에 얽혀 있는 것도 모두 그런 던져진 상태의 결과일 것이다.
*
그날도 그랬다.
오전 중반. 비가 오고 있었고, 도시의 표면은 미끄러지듯 젖어 있었다. 찬 기운이 목덜미를 스쳤고, 습기가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온도는 11.3도, 습도는 73퍼센트였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감이었다.
나는 익숙한 동선을 따라 무표정하게 걷고 있었다.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여전히 낯선 도시의 풍경들. 습기에 절은 계단참을 지나고, 엘리베이터 앞의 거울을 지나고, 자동문이 열리면 또다시 플랫 한 복도.
변화 없는 구조. 반복되는 패턴. 그리고 그 안에서, 어딘가 금이 가기 시작한 감정의 균열(龜裂).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천사"가 떠올랐다. 과거의 폐허를 바라보며 미래로 떠밀려가는 천사. 나는 지금 그런 상태였다. 14개월간 쌓인 사적인 기억들을 뒤로한 채, 오늘이라는 공적인 시간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하철 2호선이 신호 대기로 멈춰 서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오전 9시 42분. 평소보다 12분 늦은 도착이었다.
나는 급하게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왼손이 볼펜을 두 번 연달아 클릭하는 모습이 보였다. 긴장할 때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미안해. 지하철이 지연되어서..." 나는 간단히 말했다.
세이코 쿼츠 시계를 확인하는 횟수도 평소보다 많았다. 아버지 유품이라던 그 시계.
"괜찮습니다.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어요." 과장은 몽블랑 만년필을 정리하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다만... 클라이언트 측에서 자문역이 한 분 더 오셨어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회의 자료를 확인할 시간도 없이 올라갔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평소보다 긴 정적(靜寂)이 감지됐다. 말하려다 멈춘 흔적. 더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기로 한 그런 종류의 침묵(沈默).
회의실 문을 열었을 때, 실내는 이미 조명이 켜져 있었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온도는 22.8도, 습도는 51퍼센트였다. 에어컨의 미세한 진동이 바닥을 통해 전달되어 왔다.
나는 급하게 자리에 앉으며 회의 자료를 펼쳤다. 조명이 이미 켜져 있었고, 프로젝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낯선 기류(氣流)가 방 안을 감쌌다.
*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과.
오래전, 비상계단에서 처음 본 그 얼굴. 담배 연기 사이로 흐린 눈동자, 귀를 가린 단발머리, 그리고 왼쪽 귓불 뒤의 희미한 화상 흔적. 모든 디테일이 기억 속 그대로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달랐다. 검은색 정장 재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뒤로 깔끔하게 넘겨져 있었다. 귀 뒤 화상 흔적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나는 그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Aura)"의 개념이 떠올랐다. 본래의 맥락에서 분리된 채 다른 공간에 이식된 존재. 그녀는 지금 비상계단의 그녀가 아니라, 회의실이라는 기계적 복제 공간에 재현된 또 다른 버전이었다. 하지만 그 아우라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어쩌면 더 강렬하게.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었다. 회의실의 다른 공기처럼, 벽지의 패턴처럼, 회의 자료의 도면처럼.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빨간 가죽 밴드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규칙 없이 차고 빼는 그 시계.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고, 나도 그녀를 알아보지 않은 척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서로를 벤치 너머에서, 계단 아래에서, 담배 연기 사이에서 마주쳐온 사이였지만, 그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라캉이 말한 "주체의 분열"이 바로 이런 것일까. 하나의 주체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기능하는 것. 사적 공간의 그녀와 공적 공간의 그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상상계(想像界)와 상징계(象徵界)의 경계선.
나는 뭔가를 말할 뻔했지만, 입술을 다물었다. 입면(立面)을 마주하고도, 그 안에 숨은 구조를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건축가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것이었다.
*
그날 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방에 왔다.
밤 10시 47분이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창문에 닿는 빗소리가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처럼, 침묵 속에서 들리는 우연적 소음들이 하나의 음악을 구성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옷을 벗었다. 그녀는 먼저 구두를 벗었다. 검은색 로퍼였다. 뒤꿈치가 조금 닳아 있었다. 오른쪽이 왼쪽보다 더 많이. 걸음걸이의 습관이 신발에 새겨져 있었다. 회의실에서 봤던 정장 재킷을 조심스럽게 옷걸이에 걸었다. 공적 정체성의 외피(外皮)를 벗어내는 의례(儀禮)였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나는 벽의 온도를 확인하듯, 그녀의 피부 위로 흐르는 결들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어깨선이 만드는 완만한 곡률(曲率). 쇄골이 그리는 수평선의 정확한 각도.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아치 구조(構造). 건축가의 눈으로 읽어내는 몸의 입면도(立面圖)였다.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한 "몸-주체(corps-sujet)"의 개념이 실감 났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동시에 몸으로서 세계에 참여한다. 그녀의 피부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감각과 의미가 교차하는 장소였다. 촉각적 인식을 통해 드러나는 또 다른 종류의 지식.
그녀의 체온은 늘 조금 낮았다. 36.2도 정도. 평균보다 미묘하게 차가운 온기. 그리고 어깨 위쪽, 쇄골이 만나는 접합부에서 나는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 구조적 긴장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지진 후 건물의 미세 진동처럼.
"오늘, 그 여자예요?"
그녀는 내 어깨 위에서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에는 질투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확인하는 톤이었다. 마치 도면 위의 치수(寸法)를 점검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그녀의 숨소리가 내 목덜미에 닿았다. 따뜻하고 일정한 리듬이었다.
"회의실에서. 당신을 지켜보던 그 사람이요."
나는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과장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 안에 담긴 복잡한 감정의 구조들. 3년간 쌓인 업무적 신뢰, 그 위에 덧입혀진 개인적 애정, 그리고 그것을 숨기려는 의지적 노력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읽어낸 것이다.
"과장?" 나는 물었다.
"네. 그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게 뭔지는... 관심 없어요."
그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관심이 없었다. 소유하려 하지도, 배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들을 인정할 뿐이었다. 들뢰즈가 말한 "내재성(內在性)"의 윤리학. 판단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
"그래."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래 쌓아온 과장과의 신뢰, 오랫동안 유지해 온 그녀와의 거리(距離),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같은 그녀와 나누는 체온. 모든 관계가 서로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의 사람과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전혀 다른 구조적 원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공적인 공간(空間)에서, 우리는 철저히 타인이었다. 사적인 공간에서, 우리는 이름 없는 관계였다. 그것은 일종의 룰이었다. 공간과 공간 사이의 중성지대(中性地帶), 우리 둘만의 감정 구조 협정(協定)이었다.
나는 그녀의 나이도 몰랐고, 정확한 직업도 몰랐다. 그녀는 내게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았고, 나 역시 내 삶을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로만 존재했다. "그녀"와 "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의 개념이 떠올랐다. 현실 속에 존재하지만 현실과는 다른 법칙으로 작동하는 공간. 내 방은 그런 곳이었다. 사회의 규범이 적용되지 않는, 우리만의 규칙이 통용되는 이상한 공간.
나는 때때로 생각했다. 그녀는 내 삶에서 스며든 구조적 틈이었다. 무언가가 어긋나고,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스며드는 이질적인 감정의 입면. 도면에는 표시되지 않지만 건물의 실제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미세한 변형들처럼.
회의실에서 그녀를 마주친 그날 이후, 나는 더 자주 그녀를 떠올렸다. 도면 위의 여백처럼. 입면도의 미완성선처럼. 그리고 그 미완성선이 언젠가는 완성되어야 한다는 예감과 함께.
과장은 종종 말없이 내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누군지 아는 듯, 모르는 듯. 하지만 묻지 않았다. 오래 함께 일하면서 터득한 거리감이었다. 3년간의 신뢰는 그런 식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
그녀와 함께 있는 밤은 조용했다. 우리는 드물게 말을 했고, 그 대부분은 허공으로 흘렀다. 가끔 그녀는 꿈을 꾼다고 했다. 불이 꺼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꿈.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다 결국 돌아서야 하는 꿈. 그럴 때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왼쪽 팔목을 만졌다. 거기에는 가느다란 흰색 흉터가 있었다.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면도날에 베인 것 같은 일직선의 상처였다.
나는 그 꿈에 대해 묻지 않았고, 그녀도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벽에 기대어 누운 채 잠든 그녀의 이마 위로 식은 손을 얹었다. 그녀는 잠들 때마다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편안하지 않은 잠이었다. 꿈속에서도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 3시경, 그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구조는... 사라지지 않는다..." 명료하지 않은 잠꼬대였지만, 그 말이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마치 누군가 내게 전하는 메시지 같았다.
*
프롤로그란 원래 이야기의 전개를 암시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에서 무언가를 암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건 어떤 예고도, 목적도 없이 그저 그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모든 구조에는 균열이 있고, 그 균열을 통해 예상치 못한 것들이 스며든다는 것. 그리고 그런 스며듦이 때로는 전체 구조를 바꿔버린다는 것.
어쩌면 이 이야기는 이미 끝나버린 감정 구조물의 해체도면(解體圖面)**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 한 장이 모자란 도면의 잔여물(殘餘物). 혹은 새로운 구조가 태어나기 전의 임시 가설물일 수도 있고.
그리고 당신은 지금, 그 잔여의 벽 너머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이미 시작된 붕괴의 과정을, 혹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건설의 현장을 목격하려 하고 있다.
들어오시라. 하지만 조심하시길. 이곳의 구조는 아직 안전진단을 받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