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회의실의 구조는 늘 비슷했다
회의실의 구조는 늘 비슷했다.
길게 뻗은 책상, 일렬로 나열된 패널 조명, 칠판 같은 무표정의 유리창. 공간의 논리는 논리 그 자체로만 기능했고, 어떤 감정도 그 안에서 제대로 뿌리내릴 수 없었다. 루이스 칸이 말한 "침묵과 빛"의 조화 대신, 이곳은 오직 기능만이 존재하는 무감(無感)의 설계였다. 우리는 거기서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구조를 조립하거나, 해체하거나, 정지시키거나 하곤 했다. 감정은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처럼 존재하되 보이지 않았다.
*
그날 아침, 나는 늦었다.
오전 9시 42분. 평소보다 12분 늦은 출근이었다. 지하철 2호선이 신호 대기로 멈춰 서는 바람에 모든 일정이 밀려버렸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도 나는 과장이 준비해 둔 회의 자료를 제대로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과장이 보낸 메시지가 세 개 있었다.
"오늘 회의에 클라이언트 측 자문역 추가 참석 예정입니다." "자료는 이사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혹시 늦으시면 미리 연락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메시지는 5분 전에 온 것이었다. 이미 늦었다는 뜻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동안, 나는 아침의 차가운 공기와 함께 올라오는 묘한 예감을 느꼈다. 어떤 구조물에 균열이 가기 시작할 때 느끼는 그런 종류의 불안감이었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변화의 징조.
*
과장과 함께 회의실 문을 열었을 때, 다른 참석자들이 이미 앉아 있었다.
클라이언트 본사 팀장 두 명, 보좌진, 협력업체 기술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봤다. 과장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세이코 쿼츠 시계는 오전 9시 4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품인 그 시계는 언제나 정확했다. 왼쪽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지하철이 지연되어서..." 나는 간단히 사과하며 자리에 앉았다.
"괜찮습니다.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어요." 과장은 가방에서 자료를 꺼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볼펜을 두 번 연달아 클릭하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에 작게 울렸다. 긴장할 때만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회의실의 온도는 정확히 23.4도였다. 습도는 47%로 조절되어 있었고, 에어컨의 팬은 35 데시벨의 일정한 백색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과장은 어제 퇴근 전에 미리 의자 간격을 60cm로 맞춰놓았을 것이다. 그녀의 강박적 정확성은 공간 자체를 재단해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과장이 말했다.
"이분이 오늘부터 클라이언트 측 자문역으로 합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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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과.
오래전, 비상계단에서 처음 본 그 얼굴. 담배 연기 사이로 흐린 눈동자, 귀를 가린 단발머리, 그리고 왼쪽 귓불 뒤의 희미한 화상 흔적. 모든 디테일이 기억 속 그대로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달랐다. 검은색 정장 재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뒤로 깔끔하게 넘겨져 있었다. 귀 뒤 화상 흔적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나는 그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
마치 같은 건물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본래의 맥락에서 분리된 채 다른 공간에 재배치된 존재. 그녀는 지금 비상계단의 그녀가 아니라, 회의실이라는 기능적 공간에 이식된 또 다른 버전이었다. 하지만 그 본질적 분위기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어쩌면 더 강렬하게.
그녀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뿐이었다.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스치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도 나를 알아봤다는 것을.
과장은 우리 사이의 미묘한 공기를 감지했는지, 잠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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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평범하게 진행됐다.
과장이 자료를 설명했고, 클라이언트 측에서 질문을 했다. 삼성 75인치 모니터에는 CAD로 제작된 도면들이 선명하게 표시되었다. 그녀도 몇 번 의견을 제시했다. 목소리는 차분했고, 질문은 정확했다. 도시계획 전문가다운 관점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빨간 가죽 밴드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규칙 없이 차고 빼는 그 시계. 왼쪽 팔목에는 가느다란 흰 흉터가 희미하게 보였다. 오래된 것 같았다. 면도날에 베인 것 같은 일직선의 상처였다.
그녀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1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그 안에 14개월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었다.
하나의 주체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기능하는 것. 사적 공간의 그녀와 공적 공간의 그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상상 속의 관계와 현실 속의 관계 사이의 경계선.
*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가자, 과장이 내게 다가왔다.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그녀는 몽블랑 만년필을 정리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사님께서 늦으실 줄 몰랐거든요."
"괜찮아. 그런데 그분, 어떤 분이야?"
과장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왼쪽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알아보니까 중앙부처 자문역으로 일하셨던 분이더라고요. 도시계획 전공에 행정 경험까지... 정부 대형 프로젝트에서는 꽤 유명한 분이라고 들었어요."
"전에도 같이 일한 적이 있다던데?"
"그건...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다만 예전에 한 번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하셨다고만..." 과장은 말을 흐렸다. "혹시 이사님께서 아시는 분인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과장은 내 얼굴을 살폈다. 3년간 함께 일하면서 터득한 그녀만의 관찰력이었다. 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은색 십자가 목걸이를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럼 내일부터도 계속 참석하시겠네요." 그녀가 몽블랑 만년필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럴 것 같아."
"알겠습니다. 미리 자료 준비해 드릴게요."
과장은 몽블랑 만년필과 자료들을 가방에 챙겨 나갔다. 회의실에는 나 혼자 남았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며, 나는 14개월 전 그 첫 만남을 떠올렸다.
*
그녀를 처음 본 건, 지금으로부터 대략 14개월 전이었다.
단지의 비상계단이었다. 겨울은 막바지였고, 벽엔 누군가의 담배 연기가 얹혀 있었다. 마일드 세븐 라이트의 냄새였다.
그녀는 말없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낡은 차음벽(遮音壁) 앞에서, 무언가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듣지 않기 위해 그곳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상계단의 차음벽은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소리를 흡수하는 특수 패널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는 발자국 소리조차 반쯤 휘발되어 들렸다. 마치 벽 그 자체가 귀가 없는 생물처럼 조용히 존재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나는 그 정적이 좋았다. 그것은 도시의 백색소음을 완전히 차단하는, 일종의 음향적 피난처였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완벽한 기억의 보관함이 될 수 있다는 걸 그곳에서 배웠다.
그리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
우리는 그 후로도 몇 번인가 같은 시간에 그곳에서 마주쳤다.
처음에는 말이 없었다. 나는 스타벅스 벤티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고,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각자의 브랜드, 각자의 시간.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기 자주 오세요?"
"가끔."
"저도 가끔 와요. 조용해서."
그게 우리의 첫 대화였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날씨 이야기를 했다. 네 번째에는 담배 브랜드에 대해. 다섯 번째에는 이 아파트 단지의 설계에 대해 짧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도시계획을 전공했다고 했다.
계절은 천천히 바뀌었고, 계단의 금속 난간은 손바닥에 매번 다른 온도를 전했다. 2월의 차가움은 영하 3도, 3월의 미지근함은 플러스 7도, 4월의 따스함은 플러스 15도. 감정도 온도처럼 측정 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계단에서 만나는 사람' 정도의 관계였다.
하지만 어느 날 밤,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녀는 차음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조용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 옆에 앉았다. 우산을 펼쳐서 우리 둘을 가렸다. 그녀는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날 밤, 언젠가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말없이 입술을 포개고, 그 이후 우리는 서로의 공간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그건 시작이었다.
감정이라고 부를 수도, 욕망이라 단정할 수도 없는 무언가.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끌림. 단지 그 구조 안에서 생긴 틈, 정적의 공백에 놓인 무의미한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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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다시 비상계단을 찾았다.
커피를 들고, 천천히 금속 난간을 짚으며. 스타벅스 벤티 아메리카노, 온도는 72도 정도로 식어 있었다. 시간은 밤 10시 28분이었다.
그녀는 없었다.
차음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앞엔 아무도 없었다. LED 조명이 상시 점등되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공간은 항상 어두운 느낌이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아주 오래도록 숨을 죽였다.
그 공간의 정적은 기묘하게 안온했고, 또 왠지 불편했다. 건축이 만들어내는 감정적 온도가 분명히 존재했다. 이곳의 온도는 고독이었다.
벽에는 손바닥만 한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 오래전에 남긴 듯한, '여긴 조용하다'라는 문장. 검정 매직으로 쓰인 글씨는 시간에 바래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여긴 조용했다.
그리고 그 조용함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구조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법을 배웠다. 과장이 알지 못하는, 회의실의 무감한 설계가 삼켜버릴 수 없는, 오직 이 차음벽 앞에서만 가능한 감정의 건축학을.
*
차음벽 너머,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아파트 단지의 야간 백색소음. 에어컨 실외기들의 저음 진동, 늦은 귀가자들의 발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하지만 이곳, 그 잿빛 공간 안에서만큼은—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맺은 구조의 법칙이었다. 사적인 공간에선 말없이 겹치되, 공적인 공간에선 서로를 완전히 삭제하는 것. 감정 구조 협정(協定)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녀는 그걸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고, 나보다 더 철저하게 지켰다.
그리고 오늘, 그 법칙이 처음으로 시험받는 날이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겹쳐지되, 절대 뒤엉키지 않는. 말없이 이어지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그 미묘한 균형 위에서.
밤 11시 15분. 나는 커피잔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정적은 오래도록 귓속에 남아 있었다. 마치 내 안에 또 하나의 차음벽이 생긴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깨달았다. 어떤 만남들은 예정된 곳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틈새에서, 우연히, 불현듯 일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만남이야말로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