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차음벽(遮音壁)과 침묵(沈默)의 공진(共振)
그날 이후 나는 자주 비상계단을 찾았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그녀는 자주 나타나지 않았고, 공간의 정적을 좋아한다고 하기엔, 나는 그 침묵에 곧잘 질식하곤 했다. 건축가로서 나는 공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침묵도 하나의 건축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오후 7시 23분. 회사에서 돌아온 지 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오늘 회의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맥북 프로 화면에는 CAD 파일이 열려 있었지만, 한 줄의 선도 그리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온도는 23.7도였고, 습도는 52퍼센트였다. 에어컨의 미세한 진동이 책상을 통해 전달되어 왔다.
그날 오후 회의가 끝난 후, 그녀와 처음으로 같은 공간에 있었던 시간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수개월 만의 재회였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타인인 척했다. 그 연기가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나 자신도 놀랐다.
*
그날 오후, 과장이 내게 다가왔을 때였다.
"이사님." 그녀는 몽블랑 만년필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회의... 어떠셨어요?"
"뭐가?"
"새로 오신 자문역 분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과장의 표정에는 묘한 궁금증이 서려 있었다. 3년간 함께 일하면서 본 적 없는 종류의 호기심이었다. 볼펜을 두 번 연달아 클릭하는 소리가 작게 났다. 평소보다 긴장도가 높은 상태였다.
"별다를 것 없었는데."
"그런가요?" 과장은 세이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3시 41분이었다. "뭔가... 아시는 분 같던데요."
"왜 그렇게 생각해?"
"처음 인사하실 때, 잠시 멈칫하셨잖아요. 그리고..." 과장은 말을 망설였다. "그분도 이사님을 보는 눈빛이 조금... 다른 분들과는 달랐어요."
건축가는 공간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일이 직업이다. 벽의 균열, 바닥의 침하, 구조재의 변형. 하지만 과장은 그런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감정의 미묘한 흔들림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다. 3년간 함께 일하면서 터득한 그녀만의 전문성이었다. 마치 건물의 구조적 피로를 예측하는 엔지니어처럼, 그녀는 인간관계의 응력 집중 지점을 정확히 찾아냈다.
"그냥 업무상 첫 만남이라 그런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분, 되게 차분하시더라고요. 질문도 정확하고... 도시계획 분야에서는 꽤 유명한 분이라던데."
"그래?"
"네. 중앙부처 자문역으로 일하신 적이 있으시대요." 과장은 은색 십자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혹시 모르니까 그분 프로필을 좀 더 알아볼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과장은 내 대답을 듣고 조금 이상하다는 듯 눈빛을 보냈다. 평소의 나라면 클라이언트 측 정보를 철저히 파악하려 했을 텐데, 오늘은 왜 그렇게 무관심한지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왼쪽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
그곳은 어둡지 않았다.
필립스 LED 조명이 상시 켜져 있었고, 화재 시를 대비한 안내 스티커들이 반들거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공간은 항상 어두운 느낌이었다. 마치 음파를 삼키는 검은 벽처럼, 거기선 어떤 소리도 제대로 반사되지 않았다.
차음벽의 구조는 독특했다. 소리를 흡수하는 특수 패널들이 벽면을 덮고 있었고, 그 재질이 만들어내는 무반향(無反響) 효과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이곳은 소음의 강도를 제로에 가깝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그 벽에 기대어 앉으면, 나의 존재가 반쯤 소실되는 기분이었다. 심장 박동도, 위장이 울리는 소리도, 생각조차도 묘하게 작아졌다. 마치 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 벽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고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 그런 성질의 공간이었다.
나는 그것을 감정의 구조적 소실이라 불렀다. 감정이 구조 속에서, 공간의 성질에 따라 증폭(增幅)되거나 소멸(消滅)된다는 것. 그녀는 그 구조를 먼저 이해한 사람이었다.
*
"회의실에선 말씀 안 하시더군요."
며칠 후,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그날도 우리는 비상계단에서 마주쳤다. 오후 7시 15분경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난 후였고, 계단창 밖으로는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거대한 회로도처럼 보였다. 외부 온도는 플러스 4.8도였고, 비상계단 내부는 플러스 8.2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CU편의점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고, 나는 맥심 모카골드 마일드 믹스 커피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늘 반대로 맞췄다. 그녀의 종이컵에는 빨간 플라스틱 뚜껑이 씌워져 있었고, 그 가장자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이미 몇 모금 마신 흔적이었다.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과장님은 좀 안쓰럽더군요. 저희 사이를 알 것 같아서."
"모를 수도 있지."
"그래서 안쓰러운 거죠."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찰이다. 건물이 어떻게 낡아가는지, 사람들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시간의 흐름이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과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사무실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의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예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말없이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따라 바라보았다.
비상계단의 벽에는 손바닥만 한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 오래전에 남긴 듯한, '여긴 조용하다'라는 문장이었다. 볼펜으로 깊게 눌러쓴 글씨였다. 누가 언제 썼는지는 모르지만, 글씨체가 또박또박해서 어린아이가 쓴 것 같지는 않았다.
*
"정말 그렇네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여긴 조용해요. 그래서 목소리가 안 나와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녀는 여전히 단발머리였고, 여전히 귀를 가린 채였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귀 뒤의 화상 흔적이 파운데이션 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작고 둥근 흉터였다. 담배꽁초를 댄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 상처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귀 뒤에 있던 거요. 화상이죠?"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귓불을 가볍게 쓰다듬었지만, 그뿐이었다. 커피컵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온도는 플러스 8도였고, 바람도 거의 없었다.
"예전엔 없었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천천히, 아주 깊이. 마치 내 구조 내부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곳 조명 아래에서 더 어둡게 보였다. 갈색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다.
"사람은 변하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조용한 공간에 오래 머무르면, 안 들리던 소리를 듣게 되잖아요. 안 보이던 흔적도 보이고."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말에는 어떤 은유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완전히 해독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내가 물었다.
"귀 뒤 상처요?"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꽤 오래됐어요. 기억도 잘 안 나요."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 상처는 분명 최근의 것이었다. 흉터의 색깔이 아직 분홍빛을 띠고 있었고, 가장자리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많아야 몇 달 전의 상처였다. 건축가로서 나는 재료의 노화 과정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다. 피부의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
사무실로 돌아온 후, 과장이 슬쩍 다가왔다.
"오늘 좀 늦으셨네요." 그녀는 책상을 정리하며 말했다. "혹시 어디 들르신 데라도 있으세요?"
"그냥 산책."
"산책?" 과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자주 나가시는 것 같던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니야. 그냥 생각 좀 정리하려고."
과장은 내 얼굴을 살펴봤다. 뭔가 더 묻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지만, 결국 참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CU편의점 아메리카노 한 잔을 책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플라스틱 뚜껑에 김이 살짝 서려 있었다.
"그 자문역 분 말인데요." 그녀는 몽블랑 만년필로 메모를 적으며 말했다. "정말 전문적이시더라고요. 오늘 질문하신 것들 보니까."
"어떤 질문?"
"도시 밀도 계획이랑 교통 흐름 분석 쪽이었는데... 꽤 세부적인 것들까지 아시더라고요. 특히 지하 구조물 설계 부분에서는..."
과장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내 얼굴을 다시 봤다.
"왜 그래?"
"아니, 그냥... 이사님께서도 관심 있어하실 만한 분야라서요." 그녀는 은색 십자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혹시 그 분과 따로 이야기해 보신 적 있으세요?"
"업무 이야기?"
"뭐든 상관없어요. 그냥..."
과장은 말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그리고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도.
물건에 대한 취향도 개성(個性)의 일부다. 왜 하필 몽블랑인지, 언제부터 그 브랜드를 선호하게 되었는지... 그런 선택들이 쌓여 한 사람의 정체성(正體性)을 만든다. 루이스 칸이 벽돌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듯, 우리도 소유물을 통해 자신을 규정한다.
"그녀는 사람을 대상화(對象化) 하지 않아요. 상대가 사람이든 공간이든, 그냥 구조물로 보는 거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그리고 그 정확함이 불편해서.
과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덧붙였다. 플라스틱 뚜껑을 살짝 밀어 올린 채, 김이 나는 커피를 조심스럽게 마시는 모습이 그녀다웠다.
"어떤 면에서는 이사님과 비슷해요. 감정보다 구조를 먼저 보는 타입."
그 말을 듣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과장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과장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타인의 시선이라는 것은 거울과 같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본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나의 자아인식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 거울들이 서로 다른 상을 비춘다면?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
*
나는 그날 밤, 비상계단 아래에 앉아 있었다.
밤 10시 52분. 이 도시의 구조적 결함이 응축(凝縮)된 공간. 계단과 계단 사이의 정적(靜寂), 무너질 듯 유지되는 형체. 그런 종류의 아이러니가 그곳에는 있었다. 온도는 플러스 4.7도였고, 습도는 67퍼센트였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콘크리트 벽을 통해 전달되어 왔다.
건축계획에서 비상계단은 "필요악(必要惡)"으로 분류된다. 평상시에는 사용되지 않지만, 위급할 때 생명을 구하는 공간.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전화를 하거나, 잠시 쉬는 곳으로 사용된다. 설계 의도와 실제 용도 사이의 간극. 건축가가 예상하지 못한 사용법들.
그녀는 거기 없었다. 그러나 담배 냄새는 남아 있었다. 마일드 세븐 라이트의 냄새. 그리고 그것과 함께 섞인 그녀만의 냄새. 샴푸 향인지, 향수인지, 아니면 그녀의 피부에서 나는 고유한 냄새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그녀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피운 담배, 그 잔향(殘響)이 섞인 공기 속에서 나는 문득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사랑이 구조라면, 누군가는 그걸 위해 설계되었겠죠. 하지만 난 모르겠어요. 내가 그 구조 안에 포함되었던 적이 있었는지."
그 말은 오래 머물렀다. 마치 평면도 위에 남은 지워지지 않는 도면의 잉크처럼. 아니, 그보다 더 깊이. 건물의
기초(基礎) 부분에 새겨진 날짜처럼. 1987.03.15, 착공이라고 새겨진 그런 각인처럼.
기초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지만 가장 중요한 구조다. 기초가 흔들리면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 감정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기초 위에 세워지는 구조물. 그리고 그 기초는 대부분 과거에 형성된다.
나는 말보로 라이트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와 다른 브랜드였다. 우리는 심지어 담배 취향도 달랐다. 하지만 그런 차이가 오히려 안심스러웠다. 너무 비슷한 것은 때로 위험했다. 같은 구조적 취약점을 가질 수 있으니까.
비슷한 것들은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무너질 위험이 있다. 건축에서는 다른 재료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디테일이 나온다. 콘크리트와 목재, 철과 유리의 만남처럼.
*
나는 다시 구조도를 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맥북 프로 화면에 오토캐드 프로그램을 띄우고, 회의실이 아닌, 그녀의 방을 그리기 위해. 그녀가 말한 구조, 그녀가 말하지 않은 구조, 그 모든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들.
새벽 1시 34분.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던킨도너츠 아메리카노, 원래 따뜻했던 것이 이제는 실온과 같은 온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시기에는 충분했다. 카페인의 효과는 온도와 상관없으니까.
선을 그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랑의 구조를 설계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설계여야 할까.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용자(使用者)였다. 그 건물을 실제로 사용할 사람들의 편의와 안전. 하지만 사랑에서는 사용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인가, 사랑받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 둘 모두인가. 아니면 사랑 그 자체가 사용자인가.
나는 사랑의 구조를 다시 설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잊히지 않도록 설계된 구조. 그런 종류의 건축이 가능할까.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처럼, 특정한 종교를 위한 것이지만 종교를 초월한 감동을 주는 그런 공간.
사랑은 언제나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선을 먼저 그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선들은 때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향한다.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직선으로 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장애물이 있고, 우회로가 있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한다. 사랑도 그런 것이다.
창밖에서는 늦은 밤까지 누군가의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드라마인지 뉴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KBS, MBC, SBS... 어느 채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인간의 목소리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언어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목소리의 톤, 리듬, 강약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원시적인 소통 방식이지만 가장 직접적이기도 하다. 건축에서 말하는 "재료의 고유한 성질"과 비슷하다. 가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드러나는 본질적 특성.
나는 도면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사랑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용자가 아니라 구조 자체의 지속성(持續性) 일지도 모른다고. 무너지지 않고, 잊히지 않고, 계속 존재할 수 있는 힘.
그런 종류의 구조를 짓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지속성이라는 것은 시간에 대항하는 힘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흩어지려는 자연의 경향에 반대하여, 질서(秩序)를 유지하려는 의지. 로마의 판테온이 2000년을 버텨온 것처럼, 어떤 구조는 시간을 초월한다.
사랑도 그런 의지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망각에 맞서는 구조적 의지.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의지를 도면으로 옮기려 하고 있었다.
*
그날 밤, 그녀는 내 방에 오지 않았다. 나도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침묵 속에서 밤을 보냈다. 그것도 하나의 관계였다. 물리적 거리와 감정적 친밀감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새벽 2시 34분. 나는 창가에 서서 아파트 단지를 바라봤다. 대부분의 집에는 불이 꺼져 있었지만, 몇몇 창문에는 아직 희미한 불빛이 남아 있었다. 각각의 불빛 뒤에는 누군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도 지금 어딘가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을지도. 그녀는 잠들 때마다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편안하지 않은 잠이었다.
나는 알았다. 어떤 관계들은 물리적 접촉보다 침묵 속에서 더 깊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침묵은 빈 공간이 아니라, 무언가로 가득 찬 공간이라는 것을.
차음벽이 소리를 흡수하는 것처럼, 우리의 침묵도 말하지 못한 것들을 모두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품어진 것들이 우리를 이어주는 진짜 구조였다.
이것이 공진(共振)이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공진은 두 진동체가 같은 주파수로 떨리며 진폭을 증폭시키는 현상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서로 같은 주파수로 떨면서도, 그 떨림이 만들어내는 소음을 완벽하게 상쇄시키는. 결과적으로는 완전한 정적만이 남는 그런 관계.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