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손끝의 구조(構造), 기억(記憶)의 파편(破片)
밤이었다. 아파트 단지의 비상계단. 오후 11시 34분. 겨울 공기의 온도는 영하 2.7도였고, 습도는 47퍼센트였다.
그녀가 먼저 앉아 있었다. 빛은 형광색이었고, 벽은 여전히 소리를 흡수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고요를 건너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던킨도너츠 아메리카노를 꺼냈고, 그녀는 CU편의점에서 산 서울우유 900ml 종이팩을 들이켰다. 삼각형 주둥이를 뜯어 마시는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어린아이 같았다. 우유의 온도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4.2도 정도였다. 그녀는 찬 것을 마셔도 이를 시리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날은 말이 늦게 흘렀다.
*
"그... 전에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날 새벽, 혹시 뉴스 보셨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나온 그 채널은 내가 모를 수도 있잖아."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럴 줄 알았어요. 거긴 시청률이 거의 없거든요."
"새벽 기상 방송...?"
"비슷한 거예요. 정확히는 '미세 기류(氣流) 경고 방송'이에요." 그녀는 우유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구조적 공진(共振), 미세한 누적 진동(振動), 정서적 누락(漏落) 같은 걸 다루죠. 보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 틈에만 존재하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조명이 닿지 않은 쪽은 여전히 어두웠고, 그림자는 눈물처럼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녀의 말은 건축학적 용어와 감정적 은유가 뒤엉킨 이상한 언어였다. 마치 피터 줌토르가 말하는 '분위기의 건축학'처럼, 기술과 감성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
구조화되지 않은 채로 흐르는 욕망의 흐름들. 그녀의 언어도 그런 것 같았다. 명확한 의미의 틀들이 해체된 상태에서 순수한 강도(强度)만이 흐르는.
"그런 걸 누가 들어?" 내가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내 손등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손끝이었지만, 어딘가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듯한 촉감이었다.
건축가로서 나는 늘 재료의 질감을 중요하게 여겼다. 노출콘크리트의 거친 표면, 목재의 따뜻한 결, 금속의 차가운 매끄러움. 피터 줌토르가 말한 "재료의 기억"처럼, 모든 재료는 그것이 겪은 시간과 접촉의 흔적을 간직한다.
그녀의 손끝이 내 손등을 따라 움직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인간의 피부야말로 가장 정교한 건축 재료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촉각적 건축학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었고, 관절이 두드러져 보였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끝에는 이상한 정확성이 있었다. 마치 내 손등의 지형(地形)을 정밀하게 측량하는 것 같은.
*
"기억해요." 그녀가 말했다. "예전에 당신이 나를 처음 봤을 때 말이에요. 놀이터였나... 벤치였나... 당신은 검은 파카를 입고 있었고,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 당신이... 무언가를 삼키고 있는 사람 같았어."
"맞아요. 그날 난 약을 삼켰으니까."
그녀는 말없이 담배를 받아 물었다. 마일드 세븐 라이트. 나는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밝혔고,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의외로 밝은 색이라는 걸 알았다. 헤이즐 브라운에 가까운 색이었다.
담배 냄새가 공기 중에 퍼졌다. 마일드 세븐 라이트의 독특한 향. 그 냄새는 내 안에서 무언가를 깨웠다. 아주 오래된, 이름 붙일 수 없는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첫 만남의 찬바람, 그녀가 입고 있던 검은 코트의 질감, 담배 연기 사이로 보였던 그녀의 시선... 건축가로서 나는 공간의 기억이 향기에 의해 소환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냄새는 가장 직접적인 기억의 트리거였다.
"그날 난... 죽으려던 건 아니에요. 그냥 사라지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녀의 담배 연기가 천천히 벽을 타고 흘렀다.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연기 속에 담긴 것들을.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 구조화되지 못한 기억의 파편들.
나는 그녀의 내면을 건축도면을 읽듯 읽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구조는 복잡했다. 하중(荷重)을 견디는 주 기둥이 어디에 있는지, 어느 부분이 내력벽(耐力壁)이고 어느 부분이 단순한 칸막이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신의 구조적 취약점을 철저히 숨기는 사람이었다.
*
그녀는 다시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여기. 여기 안에는 무슨 구조가 들어 있죠?"
나는 손을 들어 내 손등을 바라보았다. 선명하지 않은 혈관, 오래된 흉터, 그리고 그녀의 손끝이 남긴 잔열. 왼손 검지에는 제도용 샤프펜슬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20년 넘게 설계도를 그리면서 생긴 흉터였다.
"피로 연결된 구조." 내가 말했다. "그걸로 나는 감정을 밀어 넣고, 때로는 삭제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못한 채 남겨두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축가의 손은, 이상하게 따뜻하네요."
그 말이 왜 이상하게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내 손이 따뜻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항상 차가웠다. 수습 시절, 도제식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제도판 앞에 엎드려 있던 날들. 겨울이면 난방도 들어오지 않던 그 작업실에서 손끝이 얼어붙는 건 흔한 일이었다. 연필 대신 감각이 먼저 닳아 없어지곤 했다.
그때의 냉기를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 아래에서 내 손은 확실히 따뜻했다.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온도 영역이 접촉하면서 열교환(熱交換)이 일어나는 것처럼. 물리학적으로는 당연한 현상이었지만, 감정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나는 문득 생각했다. 감정도 건축물처럼 구조가 있을 것이다. 기초(基礎)가 있고, 골조(骨組)가 있고, 마감재(仕上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의 안정성은 설계와 시공의 정확성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구조인가. 단순한 단층구조인가, 아니면 복합적인 다층구조인가. 내력벽은 어디에 있고, 비내력벽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부분까지가 구조체이고, 어느 부분부터가 장식적 요소인가.
그녀와 나 사이의 이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관계에는 설계도면이 없었다. 임시변통으로 지어진 불법건축물 같은 것이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안전진단을 받지 않은 구조물.
하지만 바로 그 불안정성 때문에 더 진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계획된 구조물은 예측 가능하지만,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에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이 있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처럼, 미완성이기 때문에 더 살아있는 건축.
그런 건축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진화한다. 설계자의 의도를 넘어서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해 나간다. 우리의 관계도 그런 것이었다. 계획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유기적으로 자라나는.
*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다 피우고 일어났다.
"내일은 회의죠?" 그녀가 물었다.
"그래."
"그럼, 단정하게 입고 올게요. 회의실에선, 우리가 서로를 잘 모르는 것처럼."
그녀는 웃으며 돌아섰고, 나는 벽에 남은 담배 냄새를 천천히 맡았다. 그 향은 어딘가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사람의 기억과 겹쳤다. 아주 오래된, 이해받지 못한 구조의 형태.
하지만 누구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라는 것도 건축물과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노후화(老朽化)가 진행된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부터 먼저 무너져 내리고, 마지막에는 주요 골조만 남는다. 그리고 그 골조마저 언젠가는 해체되어 사라진다.
나는 그녀가 떠난 계단에 홀로 앉아서, 내 기억의 구조를 점검해 보았다. 어떤 기억들이 아직 견고하게 남아 있고, 어떤 기억들이 이미 균열이 가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아직 신축(新築) 상태라는 것을. 모든 디테일이 선명하고,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정의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도 노후화되지 않는 기억의 구조. 영구적인 내구성(耐久性)을 가진 감정의 건축물.
그렇다면 나는 지금, 그녀라는 이름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내 기억 속에 짓고 있는 것이었다.
*
새벽 1시 15분. 나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음벽에 기댄 채로 오래 앉아 있던 탓에 왼쪽 다리가 저렸다.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일시적 마비 현상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나는 생각했다. 감정도 혈액순환과 같은 것일까. 한 곳에 오래 머물면 저리고, 움직여야 다시 살아나는. 그리고 때로는 그 저린 감각이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생명력의 증거이기도 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1시 18분이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마 또 다른 비상계단에서, 또 다른 담배를 피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집에 돌아가 잠들었을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오늘 밤 우리가 또 하나의 기억을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앞으로 우리의 구조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손끝에 남은 그녀의 체온은 이미 식어가고 있었지만, 그 촉각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건축가로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손의 기억이었다. 눈이 놓칠 수 있는 미세한 변화도, 손은 정확히 감지해 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12층 버튼을 눌렀다. 상승하는 동안, 나는 오늘 밤의 기억들이 내 안에서 어떤 구조를 만들어갈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구조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문을 열며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손끝이 내게 전해준 것은 단순한 온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신호였다. 암호였다. 그리고 그 암호를 해독하는 것이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마치 해체된 건물의 부재들이 새로운 구조물로 재조립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새로운 구조물의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잠들기 전에 한 번 더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자리는 더 이상 뜨겁지 않았지만, 여전히 어떤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구조의 흔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