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구조(構造)를 잃은 방, 이름 없는 도면(圖面)
회의실은 과장에게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음영이 뚜렷한 조도(照度), 군더더기 없는 회의용 테이블, 바닥에 정렬된 콘센트 포트까지도 그녀가 미리 배치해 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의자들 사이의 간격까지도 정확히 60센티미터였다. 과장의 강박적 정밀성이 공간 전체에 스며들어 있었다.
오전 9시 10분. 과장은 새벽 5시 30분에 출근해서 프레젠테이션을 세팅해 두었다고 했다. 남색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하얀 셔츠 안쪽으로는 피부에 밀착된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몽블랑 만년필로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며 하나씩 동그라미를 그어갔다. 마치 정밀한 측량기구처럼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회의실의 온도는 22.8도로 조절되어 있었고, 습도는 45퍼센트였다. 삼성 75인치 모니터에는 대기 화면이 떠 있었고, 필립스 LED 조명이 회의 테이블을 균등하게 비추고 있었다. 에어컨의 저음 진동이 35 데시벨의 일정한 백색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맥심 모카골드 마일드를 마시며 그녀의 발표를 지켜보았다. 탐(貪) 구조에 대한 브리핑이었다. 이제 막 도시 설계에 도입되기 시작한 "감정 기반의 공공공간 프로토콜"에 대한 예비안(豫備案). 3년간 함께 일하면서 본 그녀의 발표 중 가장 완성도가 높았다.
"감정은 구조를 만든다." 그녀는 그렇게 시작했다.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기묘한 기시감(旣視感)이 밀려왔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 같았다.
"그리고 구조는, 우리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결정합니다."
이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문장은 분명히 낯익었다. 몇 개월 전, 비상계단에서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단지녀에게. 담배 연기 사이로 흘려보낸 그 말이 지금 회의실의 모든 벽을 메우고 있었다.
과장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넘기며 계속했다. "도시는 기능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도시는 기억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레이어(layer)가 쌓여 하나의 유기체처럼 반응하죠. 우리가 '탐'이라 부르는 것조차, 실은 이 도시의 감정적 유산(遺産) 일 수 있습니다."
'탐'이라는 단어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클라이언트 본사 팀장이 눈을 찡그렸고, 보좌진 중 한 명이 메모를 멈췄다. 협력업체 기술진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나는 과장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그녀는 완벽하게 감정을 통제하고 있었다. 3년간 내가 알던 그 조심스러운 과장이 아니라, 한 명의 전문가로서 서 있었다. 그녀의 세이코 쿼츠 시계가 오전 9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지 유품이라던 그 시계.
내 가슴 어딘가에서 복잡한 감정이 요동쳤다. 자부심과 불안이 뒤섞인, 설명하기 어려운 울림. 그녀가 내 말을 자신의 발표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뿌듯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경계가 무너진 것 같은 불편함이 있었다.
*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나갔다. 나는 아직 커피잔을 들고 앉아 있었다. 과장이 자료를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녀의 움직임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발표 후의 긴장 해소 과정이었다.
"어떠셨어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약간의 불안이 섞여 있었다.
"당신답더군." 나는 대답했다.
"그 말은, 제가 이사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뜻일까요?" 그녀가 몽블랑 만년필을 정리하며 물었다.
"그보단, 내가 예전의 나를 너무 자주 봐서."
과장이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안도감과 함께 약간의 공허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어쩌면 사무실 어딘가에 감정을 두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발표 중에는 완벽했던 그녀의 방어막이 조금씩 해체되고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과장에게 나는 어떤 구조물인가. 3년간 함께 지은 업무적 신뢰라는 골조(骨組) 위에, 언제부턴가 개인적 애정이라는 마감재(代上材)가 덧입혀진 건축물. 하지만 나는 그 마감재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그저 견고한 골조에만 의존해 왔다.
그것은 건축학적으로 보면 불완전한 구조였다. 구조체는 튼튼하지만 외피(外皮)가 불분명한 건물. 비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는, 거주하기에는 부적절한 공간.
*
그날 오후 3시 15분, 회의실이 다시 비었을 때 그녀가 들어왔다.
그. 검은색 블라우스, 회색 스커트.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선명하게 보였다. 파운데이션으로 가려지지 않은 피부의 질감, 마스카라 없는 속눈썹의 자연스러운 곡선.
그녀는 회의용 테이블 끝에 조용히 앉았다. 회의실의 LED 조명이 그녀를 스캔하듯 지나갔다. 형광등과는 다른, 더 차가운 빛이었다. 5400K 색온도의 조명이 그녀의 피부를 창백하게 만들었다.
나는 맥북 에어를 덮으며 말했다. "이렇게 둘이서만 있는 건... 처음이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공간 같아요."
"여긴 원래 그런 곳이야."
"차가워요."
"의도된 구조지. 모든 감정을 흡수하는, 일종의 무감(無感) 설계."
그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조도 센서가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해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회의용 의자들의 그림자가 바닥에 불규칙하게 흩어졌다. 마치 해체된 구조물의 잔해처럼.
"혹시..." 그녀가 말했다. "그때 그 방 기억나요?"
나는 눈을 감았다.
*
기억났다. 강남의 오래된 비즈니스호텔. 203호. 낮은 천장, 희미한 스탠드 조명,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감싸고 있던 빨간색 가죽 시계줄. 방 안의 온도는 19.2도였고, 습도는 52퍼센트였다. 에어컨 소음이 일정한 리듬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방은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평범한 비즈니스호텔의 표준 설계였다. 3.2미터 × 4.8미터의 직사각형 공간, 2.4미터 높이의 천장, 1.2미터 폭의 창문. 하지만 그 평범함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완벽한 익명성을 제공했다.
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그녀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도시의 불빛들이 그녀의 피부 위로 흘러갔다.
"이 방은, " 그녀가 말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방이에요."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했다. 호텔 등록부에는 기록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떤 공식적인 문서에도 남지 않는 공간. 감정만이 존재하는 무허가 건축물. 도시계획학에서 말하는 '버려진 공간(lost space)' 같은 것이었다. 공식적인 용도가 부여되지 않아 방치된 도시의 틈새들.
그런 공간에서 가장 진실한 삶이 이루어진다는 역설이 있다.
*
"기억나." 나는 답했다.
"저는 아직도 그 방이, 도면에 등록되지 않은 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차가운 인조대리석 표면이 그녀의 체온을 흡수했다. "그 방은 구조가 없었어요. 아무런 설계도, 조도계획도, 환기흐름도 없이. 그냥, 감정만 있었죠. 묻히지 못한 감정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방금 말한 것은 정확한 건축학적 관찰이었다. 물리적 공간이 기능을 상실할 때, 그 공간은 순수한 감정의 저장소가 된다. 루이스 칸이 말한 "방이 공간을 만나는 순간"의 역전된 형태였다.
우리가 함께했던 그 방도 그런 곳이었다. 기능적 목적은 숙박이었지만, 실제로는 감정의 임시 저장소 역할을 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구조적 취약점을 드러내고, 서로의 균열을 확인했다.
나는 내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 방에 대한 기억은 어떤 구조로 저장되어 있을까. 시각적 기억과 촉각적 기억, 후각적 기억이 복합적으로 얽힌 다층구조일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지하층이 있을 것이다.
"오늘 회의, 봤어요." 그녀가 덧붙였다. "감정 기반 구조라니... 당신답네요."
나는 웃지 않았다. 그 말이 칭찬인지 비판인지 분간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당신은 가끔, 내가 없는 방을 짓는 것 같아요."
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나는 항상 누군가를 위한 공간을 설계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추상적인 '사용자'를 위한 공간만 만들어왔다. 구체적인 개인의 욕망이나 습관, 상처나 기쁨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은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게 죄일 수도 있겠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었다. 단지 손동작으로 조도 센서를 자극해서 조명을 다시 켰다. 그림자가 다시 그녀의 눈동자 안으로 흘러들었다.
회의실에는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에어컨 소음과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우리의 침묵.
나는 그 순간, 과장과 그녀, 그리고 나 자신을 하나의 삼각형으로 이해하려 했다. 구조공학에서 삼각형은 가장 안정적인 형태다. 세 점이 만나 서로를 지지하는 완벽한 구조. 하지만 우리의 삼각형은 불안정했다. 각 꼭짓점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지 않고, 하중 분배가 고르지 않았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도 구조공학의 문제일지 모른다. 감정의 하중을 어떻게 분산시킬 것인가, 관계의 내구성(耐久性)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예상치 못한 외력(外力)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모든 계산을 포기하고 있었다.
*
그녀가 일어섰다. 회색 스커트가 의자에서 스치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럼." 그녀가 말했다.
"응."
"내일도 회의가 있겠죠?"
"아마."
그녀는 회의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더 말하고 싶다는 기색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다.
나는 혼자 회의실에 남았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오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건물들이 서로 다른 높이로 솟아 있었고, 그 사이로 도로가 격자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평면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평면도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개인들의 삶, 관계들의 복잡한 구조, 사랑과 이별의 순환. 그 모든 것들이 도면에는 나타나지 않는 채로 존재한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27분. 과장은 아마 내일 회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항상 하루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놓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 또 다른 회의실에서, 또 다른 프로젝트를 검토하고 있을 것이다. 도시의 구조를 바꾸는 일들을.
나는 문득 궁금했다. 과장이 사용한 그 말들—"감정은 구조를 만든다"—이 정말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인지. 아니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기억이라는 것도 때로는 재구성되고 편집되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의 출처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이 회의실에서 진실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정말로 구조를 만든다. 그리고 그 구조는 다시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낸다. 끝없는 순환. 설계와 시공과 거주와 해체의 반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유리창에 기대어 서서 도시를 바라보았다. 어딘가에 과장이 있고, 어딘가에 그녀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있다.
세 개의 점이 만드는 불완전한 삼각형. 하지만 어쩌면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구조는 변화할 수 없다. 완성된 건축물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완전한 구조는 계속 진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런 것이었다. 미완성이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는.
그리고 나는 알았다. 어떤 건축물들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더 아름답다는 것을. 어떤 사랑들은 도면 없이 지어질 때 더 진실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