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식의 연대기 ― 외전: 불확실한 벽 너머_5화

5화. 감정의 입면도(立面圖), 사랑의 절단면(切斷面)

5화. 감정의 입면도(立面圖), 사랑의 절단면(切斷面)



그녀는 회의실의 문을 나서지 않았다.


오후 4시 42분.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 준비를 시작하는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멈춘 자리들을 따라 한참을 가늠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머무는 곳들—회의실 모서리의 환기구, 천장의 스프링클러, 벽면의 작은 스크래치들. 마치 공간의 숨겨진 구조를 읽어내려는 것처럼.


조도 센서가 꺼지기 직전의 회의실은 거의 맥박처럼 살아 있었다. 필립스 LED 조명이 30초마다 한 번씩 깜빡이며 절전 모드 진입을 예고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공간에 남은 건 의자들의 미세한 균열, 테이블 모서리의 마모된 흔적, 그리고 사용되지 않은 프레젠터 리모컨의 희미한 발열감뿐이었다.


에어컨의 저음 진동이 22.3도로 조절된 실내를 일정하게 순환시키고 있었다. 습도는 49퍼센트. 인간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조건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지금 이 공간에서는 그 완벽한 조건들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


"언제부터였지?" 내가 물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스크린 벽 쪽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삼성 75인치 모니터는 이미 꺼져 있었지만, 검은 화면에는 여전히 우리의 희미한 모습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 방에선 모든 게 평면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입체감 없이, 그저, 감정의 단면만이 있었죠. 손끝으로 만지면 베일 것 같은 감정들이."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선명해서. 건축가로서 나는 단면도(斷面圖)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건물을 수직으로 자른 면에서 보이는 내부 구조. 숨겨진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도면.


말이, 하나의 도면처럼 떠올라 나는 어느새 회의실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몽블랑 볼펜으로 A4 용지 위에. 선 하나. 그리고 그 옆에, 닫히지 않는 문의 윤곽. 그녀의 어깨선이 만드는 완만한 곡률, 그 방의 냄새—마일드 세븐 라이트와 호텔 방 특유의 세제 냄새가 뒤섞인—를 따라 감정의 구조가 천천히 도면 위에 새겨졌다.


그 방은 수많은 호텔 객실 중 하나였지만, 우리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을 가진 공간이었다. 원본이 가진 고유한 분위기.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분위기를 종이 위에 재현하려 하고 있었다.


*


그녀가 처음 내게 손을 뻗은 건 비상계단의 차음벽 아래였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 2월 중순, 밤 11시 47분. 외부 온도는 영하 7.2도였고, 비상계단 내부는 플러스 3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차음벽의 특수 단열재 덕분에 바깥보다는 따뜻했다.


담배 연기가 천장을 향해 천천히 피어오르던 밤. 그녀가 피우던 마일드 세븐 라이트의 연기는 LED 조명 아래에서 은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무심히 금속 계단 손잡이에 팔꿈치를 얹고 있었고, 그녀는 내게 등을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등에서 전해진 온기는 정확히 36.8도였다. 내 체온보다 약간 높았다. 빨간 가죽 밴드 시계는 오른쪽 손목에 차고 있었다.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정확했지만, 그녀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내게 구조의 틈을 알려주었다. 말보다, 행동보다 먼저 감정이 움직이는 방식. 건축가인 나는 늘 논리적 순서를 중요하게 여겼다. 기초-골조-마감의 단계적 시공. 하지만 그녀는 그런 순서를 무시했다. 감정이 먼저 구조를 만들고, 나중에 그 구조에 맞는 형태가 따라오는 방식이었다.


*


벽 너머, 불확실한 구조를 가진 도시. 정식 도면에 올라가지 않은 감정의 빈방.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감정의 입면도(立面圖)를 그릴 수 없어요. 항상 절단면(切斷面)만 남거든요."


입면도는 건물의 외관을 보여주는 도면이다. 완성된 모습, 세상에 드러나는 얼굴. 하지만 절단면은 내부 구조를 보여준다. 숨겨진 것들, 지지하는 것들, 때로는 취약한 부분들까지.


그 말이 그녀가 나를 떠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걸 나는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완성된 관계의 외관을 만들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직 관계의 내부만을, 그 절단면의 복잡한 구조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투사된 존재들이지만, 동시에 과거에 구속된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들이 현재의 구조를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미래의 완성된 모습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나를 찾아왔지?"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비밀이 있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담긴 웃음이었다.


"찾은 게 아니라, 계속 여기 있었어요."


"비상계단이든, 회의실이든, 혹은 당신의 도면 한 구석에든."


나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맥북 프로의 화면이 켜지며 CAD 프로그램이 실행되었다. 감정이 반영된 구조물에 대해 '탐'이 요구한 자료를 정리해야 했다. 프로젝트 마감까지 72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료 안에는 그녀의 움직임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클라이언트 측 자문역의 검토 의견이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한 감정의 지층이 쌓여 있었다. 아무런 등록 없이, 어느 새벽의 침대 위에서, 혹은 복도의 차가운 벽 아래에서 나를 끌어내던 그 손.


그 손은 매번 내가 설계하지 않은 구조로 나를 인도했다. 예측할 수 없는 동선, 기능이 불분명한 공간들. 건축가로서는 불편했지만, 한 사람으로서는 그런 예측 불가능함에 이끌렸다.


*


"과장님은 어때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손을 멈췄다. 화면에는 반쯤 완성된 도면이 떠 있었다. "뭐가?"


"오늘 발표요. 정말 훌륭하던데."


"그래."


"당신 말을 많이 인용하시더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묘한 뉘앙스가 있었다. "감정은 구조를 만든다... 그런 말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도 알고 있구나. 과장이 내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들었어?"


"회의실 밖에서요. 문이 조금 열려 있더라고요."


"그래서?"


"신기하더라고요. 당신의 말이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나오는 게."


그녀는 빨간 가죽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왼쪽 손목에 차고 있었다. 규칙 없이 바꿔 차는 습관이 있었다.


"마치 건축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것처럼요."


정확한 비유였다. 내 말들이 과장의 발표 안에서 다른 맥락을 가지게 된 것. 같은 구조물이지만 다른 기능을 하게 된 것.


*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 그녀가 머물던 방의 단면도를 그렸다.


꿈속 시간은 새벽 3시 17분이었다. 호텔 203호실. 세로로 찢긴 벽지—실제로는 찢어진 게 아니라 오래되어 들뜬 것이었지만 꿈에서는 의도적으로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침대 아래로 빠진 그림자들, 그리고 벽에 걸린 낡은 조도계가 23.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감정은 선형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단면에서 드러나는 우울한 경사였고, 미세하게 기울어진 창틀이었고, 창밖으로 날아가는 비둘기의 뒷모습이었다. 도시의 소음—자동차 경적소리, 지하철 소음, 에어컨 실외기 소리—이 42 데시벨의 백색소음으로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방에 들어가 앉았다. 침대 모서리에,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그녀는 없었고, 이름도, 구조도, 기능도 사라진 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흔적들은 남아 있었다. 베개에 밴 샴푸 냄새, 세면대 모서리에 놓인 립밤, 창가에 떨어진 담배 재.


그러나 그곳은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구조였다. 물리적으로는 몇 시간에 불과했지만, 감정적으로는 몇 년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다. 입면도는 사라졌지만, 절단면이 남은 공간.


*


사랑은 어쩌면 항상 그렇게 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파편으로, 전체가 아니라 단면으로. 마들렌 과자의 맛으로 과거 전체를 불러일으킬 수 있듯, 우리도 작은 조각들로 전체를 기억한다. 그녀의 손목 흉터, 담배 냄새, 귀 뒤의 화상 자국. 그런 파편들이 때로는 완전한 기억보다 더 진실하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 23분. 실제 시간이었다. 꿈속의 시간과 1시간 6분의 차이가 있었다. 꿈속에서는 시간도 다른 구조를 가진다.


창밖으로는 아파트 단지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몇몇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각각의 불빛 뒤에는 누군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도 지금 어딘가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꿈에서 그렸던 단면도를 실제로 그려보고 싶었다. 종이에 연필로, 천천히. 감정의 구조를 시각화하는 작업.


그렇게 새벽이 깊어갔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어떤 건축물들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더 아름답다는 것을. 어떤 사랑들은 절단면으로만 존재할 때 더 진실하다는 것을.


집은 단순한 물리적 구조가 아니라 기억과 꿈의 저장소다. 그녀에게는 그런 집이 없었다. 도면도, 기초(基礎)도, 방향도 없는 떠다니는 감정의 구조만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그녀만의 건축학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정된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유동적이고 적응적인 구조. 특정 기능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꿈꾼 "보편적 공간(universal space)"처럼.


새벽 5시 12분. 도면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릴 수 없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피로 때문이 아니라, 감정 때문이었다. 어떤 구조들은 완성하는 순간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미완성 상태에서만 진실을 유지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는 연필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루 안에도 우리는 또 다른 절단면을 만들어갈 것이었다.


입면도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단면들은 계속 쌓여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절단면들이 모여서, 어떤 완전한 구조보다 더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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