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그녀가 웃지 않는 이유
비상계단 아래,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났다.
밤 11시 23분. 외부 온도는 영하 4.8도였고, 비상계단 내부는 플러스 2.1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습도는 61퍼센트. 겨울 공기 특유의 건조함이 콘크리트 벽면에 미세한 결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필립스 LED 조명이 30초 간격으로 자동 점멸하며 절전 모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일드 세븐 라이트. 단발머리는 정갈하게 내려와 있었고, 그 단발 아래로는 언제나처럼 왼쪽 귓불 뒤의 화상 흔적이 감춰져 있었다. 오늘은 파운데이션을 바르지 않았는지 그 흔적이 희미하게 드러나 보였다. 작고 둥근 자국이었다. 담배꽁초를 댄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담배를 피울 때, 결코 불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늘 성냥을 꺼냈다. 작은 철제 케이스에 담긴 낡은 성냥. 스웨덴 제 안전성냥이었다. 상표는 바랜 채 읽기 어려웠지만, 빨간색 인광체 부분은 아직 살아있었다.
성냥이라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물건이다. 터보 라이터나 지포 라이터가 있는 시대에 굳이 성냥을 고집하는 것은 일종의 의례이거나 강박이다. 아니면 어떤 기억에 대한 고집일 수도 있고. 일상의 사물들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 의미의 체계를 구성한다. 그녀의 성냥도 그런 종류의 기호(記號)였다.
*
불을 켠 그녀는 성냥개비를 두 번 털고,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연기를 내뿜기 전 3초간 숨을 참는 그녀만의 습관. 그 짧은 침묵 동안 나는 무언가 중요한 말이 나올 것임을 직감했다.
"저, 오늘 누군가랑 잤어요."
그 말이 차음벽에 부딪혀 흡수되는 동안,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나는 스타벅스 벤티 아메리카노를 든 손을 멈췄다. 컵의 온도는 이미 27도로 식어 있었지만, 갑자기 더 차갑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동요했는가? 놀랐는가? 배신감을 느꼈는가? 감정을 구조적으로 분석해보려 했지만, 순간적으로는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직후 건물의 구조적 안전성을 즉시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는 내가 동요(動搖)하길 바랐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무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것이 그녀만의 정직함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우리가 맺은 관계의 경계선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언제?" 나는 결국 물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오늘 오후. 회의 끝나고." 그녀는 담배 재를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누구?"
"모르는 사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이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사람."
고백이라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것은 권력관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고백은 죄의식을 전가하는 동시에 상대방을 감정적 공범으로 만드는 장치다. 하지만 그녀의 이 고백은 다른 종류의 것 같았다. 죄의식보다는 사실의 정리에 가까웠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평소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후회해?"
"모르겠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후회라는 감정 자체가 구조를 가정하잖아요. 무언가 잘못된 선택이 있었고, 그것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전제.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차음벽(遮音壁) 특유의 무반향(無反響) 효과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들렸다. 마치 스튜디오의 무향실(無響室)에서 나누는 대화처럼 잔향(殘響) 없이 또렷했다. 그래서 더 충격적인 동시에 더 현실적이었다.
"당신은 어때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질투하는가? 분노하는가? 실망하는가? 이상하게도 그런 감정들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떠오른 것은 구조적 호기심이었다. 이 사건이 우리의 관계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잘 모르겠어." 나는 정직하게 답했다. "화가 나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오히려 더 명확해진 것 같은 기분이야."
"명확해진 게 뭔데요?"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지 않는지."
그녀는 작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희미했지만, 분명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요. 우리는 소유하지 않죠."
건축에서 '소유'라는 개념은 복잡하다. 건물을 소유한다는 것이 그 안의 모든 공간과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용자들은 설계자의 의도와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사용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겪는다. 감정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래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담배 연기를 멀리 날렸다. "기억나는 게 없어요. 어디서 만났는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그냥, 몸에 남은 감각만이 좀 그렇더라고요."
나는 여전히 침묵했다. 그녀가 누구와 관계를 맺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었고, 그녀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직접적인 질문 대신 우회적인 고백을 통해 상대방의 반응을 탐지하는 방식.
의식의 흐름에서 특정 순간만을 도려내어 말하는 것. 전체 맥락은 생략하고 감각적 체험만을 전달하는 방식. 그녀의 언어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구조적 설명보다는 단편적 감각에 의존하는.
*
"나는요, 뭔가를 잃은 것 같기도 하고 얻은 것도 없고. 계속 무언가를 밀어내면서 살아가는 기분이에요."
그녀는 성냥갑을 조심스럽게 닫고, 허리를 세웠다. 빨간 가죽 밴드 시계가 오늘은 오른쪽 손목에 차여 있었다. 어제는 왼쪽이었는데. 규칙 없이 바꿔 차는 습관이 계속되고 있었다.
밀어내기와 끌어당기기. 물리학의 기본 법칙이지만 감정에서는 더 복잡하다. 사람은 종종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패턴을 반복한다. 그녀의 '밀어내기'도 그런 종류의 자기 파괴적 충동일지도 모른다.
건축학적으로 보면, 구조물에서 '밀어내기'는 응력 분산(應力分散)의 한 방법이다. 특정 부분에 집중되는 하중(荷重)을 다른 곳으로 전달하여 전체 구조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 그녀의 감정적 '밀어내기'도 비슷한 기능을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적 하중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구조적 방어기제.
*
그날, 사무실에선 갑자기 데이터 서버가 꺼졌다.
오후 2시 37분. HP 프로라이언트 서버의 전원이 갑작스럽게 차단되면서 모든 네트워크가 마비되었다. 과장은 말없이 복구에 들어갔고, 나는 시스템 재부팅이 되는 동안 휴게 공간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맥북 프로의 배터리는 73퍼센트 남아 있었다.
현대 사무실에서 서버 다운은 일종의 재난이다. 모든 업무가 정지되고, 사람들은 갑자기 할 일을 잃는다. CAD 파일도, 이메일도, 심지어 인터넷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기계에 의존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과장은 몽블랑 만년필로 수작업 메모를 작성하고 있었다. 긴급 상황에서도 그녀의 강박적 정확성은 변하지 않았다. 볼펜을 두 번 클릭하는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울렸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그녀에게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트라이톤(Tri-tone) 사운드가 조용히 울렸다.
「사랑이 구조라면, 어느 쪽이 먼저 균열 나는 걸까요? 바깥인가요, 안쪽인가요?」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저 노트북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겨울 하늘은 회색빛이었고, 미세먼지 농도는 나쁨 단계였다. 가시거리가 3킬로미터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균열(龜裂)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건축학적으로 보면, 구조물의 균열은 응력(應力)이 집중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대부분 외부 압력이 내부 구조의 허용 한계를 넘어설 때 발생한다. 하지만 때로는 내부의 재료적 결함이 외부로 확산되기도 한다. 알칼리 골재 반응이나 철근 부식 같은 내재적 문제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으로 드러나는 경우. 감정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말끝을 흐리거나, 중요한 질문을 한 번에 던지거나.
사랑이라는 구조물은 그녀에게 있어 도면이 없던 집과 같았다. 그래서 방향도 없고, 벽도 없이 그저 어디론가 흘러가버리는 감정의 입체처럼. 집은 단순한 물리적 구조가 아니라 기억과 꿈의 저장소다. 그녀에게는 그런 집이 없었다. 도면도, 기초도, 방향도 없는 떠다니는 감정의 구조만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그녀만의 건축학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정된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유동적이고 적응적인 구조. 특정 기능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보편적 공간" 개념처럼.
*
밤이 되었다. 나는 단지 내 CU편의점에 들렀다.
밤 10시 41분. 아이는 계산대 뒤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단발머리, 눈 근처에 옅게 남은 흉터. 그녀와는 다른, 그러나 같은 구조를 가진 아이. 오늘은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편의점 유니폼 위에 걸쳐 입은 개인 옷이었다.
아이의 흉터를 보며 나는 문득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감했다. 흉터는 과거의 상처가 남긴 흔적이지만,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 흉터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구조와 어떻게 연결될지. 건축물의 균열이 때로는 구조적 취약점이지만 때로는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 되는 것처럼.
편의점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것은 현대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다. 익명성과 친밀감이 공존하는 공간.
"오늘, 그 여자 만났어요?" 아이가 물었다.
"응."
"그 여자, 다른 사람 만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리보 젤리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1,800원이었다. 가격 스티커가 정확히 붙어 있었다.
아이의 질문에는 어른스러운 직감이 담겨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미래에 이 아이가 우리의 구조에 어떤 역할을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피터 줌토르가 말한 "분위기의 건축학"처럼, 이 아이도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는 존재였다.
"이상하게, 그 여자 보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자꾸 울고 싶어 져요."
나는 현금으로 계산을 했다. 천 원짜리 두 장. 아이는 거스름돈 200원을 정확히 건네주었다. 동전의 차가운 촉감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아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여자는, 웃지 않잖아요."
웃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표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 구조의 특징이었다. 그녀가 왜 웃지 않는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말에는 예언적인 무게가 있었다.
나는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밤 11시 18분.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하지만 담배꽁초가 여섯 개, 깨끗하게 줄 맞춰 정리되어 있었다. 마일드 세븐 라이트의 필터들이 LED 조명 아래에서 하얗게 빛났다.
여섯 개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그녀만의 의례일 수도 있고, 아니면 무의식적 패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너질 예정인 구조 안에서도 작은 규칙들을 세워가는 것. 카를로 스카르파가 건축 디테일에서 보여준 그런 종류의 정밀한 질서.
차음벽 특유의 무반향 효과 때문에 이곳의 정적은 다른 곳과 달랐다. 소리가 흡수되어 사라지는 공간. 건축음향학에서 말하는 "데드 룸(dead room)"에 가까웠다. 그런 공간에서는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분당 72회. 정상 범위였다.
나는 말보로 라이트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와 다른 브랜드였다. 우리는 심지어 담배 취향도 달랐다. 하지만 그런 차이가 오히려 안심스러웠다. 너무 비슷한 것은 때로 위험했다. 같은 구조적 취약점을 가질 수 있으니까.
담배 연기가 천천히 상승하며 천장의 환기구로 빨려 들어갔다. 공기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순간이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공간의 역학이 연기를 통해 가시화되는 것. 건축가에게는 그런 순간들이 소중했다. 추상적인 개념이 물리적 현상으로 드러나는 때.
그녀는,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구조를 짓고 있었다. 어디에도 쓰이지 않는, 그러나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디엔가 기록되어야만 하는 구조. 도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건물의 실제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종류의 비공식적 구조.
나는 성냥 한 개를 꺼내 들고, 불을 붙였다.
성냥의 작은 불빛 속에서 나는 그녀의 성냥갑을 떠올렸다. 똑같은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같은 의례를 치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같은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처럼. 아니면 같은 설계 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는 건축가들처럼.
"나는 너의 구조 속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그 말은 연기처럼 퍼졌고, 나는 그 자리에 조용히 주저앉았다. 콘크리트 바닥의 차가움이 바지를 통해 전달되어 왔다. 온도는 영하 1.2도였다.
질문은 허공으로 사라졌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았다. 앞으로 일어날 구조의 변화들—전체 골조 수정, 내력벽 붕괴, 미묘한 공간 변화들—을 예감하며, 나는 그 자리에서 첫 번째 균열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균열은, 그녀가 웃지 않는 이유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웃음이라는 것도 구조의 일부다. 감정을 표출하고 완화하는 안전밸브 같은 역할. 그것이 작동하지 않을 때, 감정은 다른 곳에서 출구를 찾는다. 때로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새벽 12시 2분. 나는 성냥의 마지막 불빛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이 구조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과정에 들어섰다는 것을. 그 변화가 붕괴인지 재생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웃음이 사라진 얼굴 뒤에는 어떤 구조가 숨어 있을까. 그리고 그 구조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아니면 그 답을 찾지 않기 위해, 계속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