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무너진 사람의 방식
그녀는 말이 없었다.
오후 5시 18분. 비상계단의 차음벽(遮音壁) 아래, 온도는 플러스 2.9도였고 습도는 64퍼센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아직 꺼내지 않은 채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필립스 LED 조명이 30초 간격으로 점멸하며 절전 모드를 알리고 있었다.
대신, 몸으로 언어를 대체(代替)하는 사람이었다. 무언가가 부서졌을 때, 그 파편(破片)을 주워 다시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證明)하려는 사람이었다.
신체는 언어 이전의 소통 도구다. 건축가로서 나는 공간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천장 높이가 3미터일 때와 2.4미터일 때 사람이 느끼는 압박감의 차이, 복도 폭이 1.2미터에서 1.8미터로 바뀔 때 걸음걸이가 달라지는 것. 그녀는 그런 공간의 언어를 몸으로 번역하는 사람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그녀를 따라 비상계단으로 나갔다.
밤 10시 47분. 외부 온도는 영하 2.1도였고, 비상계단 내부는 플러스 1.3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밤공기는 이미 서늘했고, 노출 콘크리트 벽에는 희미한 결로(結露)가 맺혀 있었다. 습도 71퍼센트. 곧 겨울이 올 것이라는 신호였다.
계절의 변화는 건축물에도 영향을 미친다. 콘크리트는 온도 변화에 따라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미세한 균열(龜裂)이 생긴다. 열팽창 계수는 섭씨 1도당 100만분의 10 정도. 미미해 보이지만 누적되면 구조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관계도 그런 계절적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일까.
"여기, 나한테는 제일 정직한 공간이에요." 그녀가 마일드 세븐 라이트를 꺼내며 말했다. "여기서는 누구도 나한테 묻지 않거든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단정했고, 스웨덴 제 안전성냥을 꺼내는 손끝은 작은 떨림도 없이 일관되었다. 빨간 가죽 밴드 시계는 오늘도 규칙 없이 왼쪽 손목에 차여 있었다. 어제는 오른쪽이었는데.
일관성(一貫性)이라는 것은 때로 강박적 행동의 증거이기도 하다. 너무 완벽한 통제는 오히려 내면의 혼란을 감추는 방어기제(防禦機制)일 수 있다. 그녀의 정확한 몸짓들—담배를 피우는 방식, 성냥을 켜는 손놀림, 연기를 내뿜기 전 3초간 숨을 참는 습관—이 갑자기 의심스러워 보였다.
"여기서 누구를 본 적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가끔 여기에 와서 내가 잃은 얼굴들을 떠올려요."
그녀는 차음벽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성냥개비를 두 번 털고 담배에 불을 댔다. 인 냄새가 차가운 공기 중에 퍼졌다.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를 '잊는다'고 생각하죠. 근데 난 그게 아니라, 그 사람을 내 안에서 '다시 조립한다'고 생각해요."
기억의 재구성(再構成). 건축가에게는 친숙한 개념이었다. 기존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지 않고 새로운 용도에 맞게 개조하는 리노베이션 작업. 루이스 칸이 말했듯 "건물이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 묻는 것처럼, 그녀는 기억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묻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가 무너진 방식, 그리고 무너진 뒤에도 살아남은 방식에 대해 그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무너짐의 생존학(生存學). 어떤 사람들은 무너진 후에도 그 파편들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단순한 회복(回復)이 아니라 창조적 변형(創造的變形)이다. 건축에서 말하는 "적응적 재사용(adaptive reuse)"과 같은 개념이었다.
*
며칠 후, 사무실에서는 작은 변화가 있었다.
오전 9시 23분. 과장이 그녀를 '파트너'로 정식 소개했다. 과장은 평소처럼 몽블랑 만년필을 손에 들고 체크리스트를 확인했다. 의자 간격은 정확히 60cm로 배치되어 있었고, 세이코 쿼츠 시계는 아버지 유품답게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 9시 25분 3초.
위치의 변화는 권력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클라이언트에서 파트너로의 지위 변화, 회의실에서의 좌석 배치... 이 모든 것이 앞으로 일어날 "구조 보강안" 제안의 전 단계였다는 걸 나는 아직 몰랐다. 그녀는 이미 내부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회의에서 그녀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22.5도로 조절된 회의실에서 그녀의 체온은 36.4도였다. 내 체온 36.7도보다 약간 낮았다. 삼성 75인치 모니터에는 CAD로 제작된 도면들이 선명하게 표시되었다.
그녀는 말수가 적었다. 도면 위에 파일럿 볼펜으로 메모를 남기고, 수정사항을 정리하고, 차분하게 구조를 다시 그렸다. 12포인트 맑은 고딕 폰트로 정리된 문서를 검토하는 모습이 전문적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손끝을 보았다. 펜을 잡는 손이 어딘가 약간 굳어 있었고, 팔꿈치 아래 왼쪽 팔목에 가느다란 흰 흉터가 한 줄, 비스듬하게 남아 있었다. 오늘은 소매를 걷어 올린 상태여서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편의점 아이가 언급한 "자살 시도"와 연결되는 물리적 증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단순한 사고의 흔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관찰자의 편견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건 오래된 균열이었다. 건축물에 생기는 구조적 피로(疲勞)처럼, 감정 위에 생긴 균열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구조적 피로. 재료공학에서 말하는 현상으로, 반복적인 하중(荷重)에 의해 금속이 점진적으로 약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도 그런 피로 누적이 있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작은 스트레스들이 쌓여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서는 것. 그녀의 흉터는 그런 감정적 피로의 최종 단계에서 발생한 균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걸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침묵의 협약(協約). 어떤 상처는 말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 그것은 배려일 수도 있고 회피일 수도 있다. 과장도 은색 십자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불편함을 감추고 있었다. 왼쪽 어깨가 평소보다 더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
그날 밤, CU편의점에 들르니 아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밤 10시 38분. 22와트 LED 형광등이 만들어내는 차가운 빛 아래에서 아이는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편의점 유니폼 위에 걸쳐 입은 개인 옷이었다. 단발머리와 눈 근처의 옅은 흉터가 오늘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은 왜 혼자예요?" 나는 웃지 못했다.
던킨도너츠 아메리카노 1,200원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온도는 대략 68도 정도였다. 플라스틱 뚜껑을 살짝 밀어 올려 김이 나는 것을 확인했다.
"그 사람 말이에요. 예전에는 여기 자주 왔어요. 그리고... 꼭 무언가를 잃은 날에는 담배 한 갑, 초콜릿 하나, 그리고 편지지를 샀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금으로 계산하며 거스름돈 800원을 받았다. 동전의 차가운 촉감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아이의 관찰 기록. 그녀의 과거 패턴에 대한 증언. "무언가를 잃은 날"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했다. 그녀에게는 정기적으로 상실을 경험하는 주기가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때마다 편지지를 샀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들을 썼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사람이 편지를 썼을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편지를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다른 누군가에게 보낸 것이었을 것이다.
보내지지 않은 편지들. 모든 편지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녀의 편지들도 그런 것이었을까. 발신인도 수신인도 불분명한 편지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설계한 "보편적 공간"처럼, 특정한 목적 없이 존재하는 텍스트들.
아이의 통찰력은 때로 어른을 능가했다. 그녀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이 아이가 우리의 구조에 어떤 역할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중요한 증인이라는 사실이었다.
*
며칠 뒤, 그녀는 나에게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오후 3시 41분. 회의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간 후였다. A4용지 절반쯤 되는 크기의, 반쯤 찢어진 종이였다. 가장자리가 불규칙하게 찢어져 있어서 누군가 급하게 뜯은 것 같았다.
"이건?" 내가 묻자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무너지기 전에, 나한테 했던 말이에요."
나는 종이를 펼쳤다. 손글씨였다. 12포인트 정도 크기의 정갈한 글씨체였다.
"무너진 사람은 무너진 사람만 이해할 수 있어."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서명도, 날짜도, 맥락(脈絡)도 없이 그 문장 하나만이 적혀 있었다. 종이의 질감으로 보아 몰레스킨 노트에서 뜯어낸 것 같았다.
단편적 텍스트의 힘. 문맥이 제거된 문장은 오히려 더 강한 의미를 가진다. 건축에서 말하는 "여백의 미학"과 같은 효과. 말하지 않은 것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 문장은 완결된 의미 체계를 거부하면서 더 큰 해석의 공간을 열어놓았다.
"그때 난 그 말이 싫었어요. 나를 '무너진 사람'으로 규정(規定)하려는 것 같아서. 근데 이제는, 그 말이 구조처럼 느껴져요."
그녀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내게서 종이를 다시 가져갔다. 빨간 가죽 시계가 오후 3시 4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분간의 짧은 대화였지만 무게는 무거웠다.
감정의 중성화(中性化). 웃음도 울음도 아닌 상태. 그것은 무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다른 차원이었다. 온도로 치면 영도점과 같은 것. 물이 얼음이 되는 경계선에서의 특별한 상태.
"지금은... 그 사람의 방식이 조금은 이해돼요. 어쩌면, 그 사람도 나처럼 누군가를 구조(救助)하고 싶었을지 모르죠."
구조와 구조(構造)의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 그녀는 건축적 구조를 통해 감정적 구조를 시도하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내력벽의 붕괴"와 연결되는 복선이었다. 무너진 사람이 다른 무너진 사람을 구조하려는 시도. 그것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더 큰 붕괴를 초래할까.
안도 다다오가 말했듯 "콘크리트는 충실한 재료"다. 하지만 그 충실함도 한계가 있다. 과도한 하중이 가해지면 무너진다. 감정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
그날 이후, 나는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면 위에, 그녀가 남긴 작은 메모들 사이에, 나는 언젠가 내가 무너졌던 방식들을 하나씩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12포인트 맑은 고딕으로 정리된 그녀의 메모들—"여기 보강 필요", "구조 검토 요망", "기초(基礎) 재검토"—을 읽으면서 건축적 문제와 감정적 문제가 겹쳐 보였다.
자기 분석의 시작. 타인의 무너짐을 통해 자신의 무너짐을 재발견하는 과정. 거울의 원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균열을 보면서 내 안의 균열을 발견하게 되는 것.
그녀는 내게 구조를 가르쳐주었다. 붕괴(崩壞)된 것들을 다시 조립하는 방식으로, 말이 아닌 침묵으로, 그녀는 나를 이해시켰다.
나는 그 구조를 기억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구조로 누군가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希望)을 그때, 아주 조금 품었다.
새벽 1시 52분. 나는 맥북 프로 화면을 닫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단지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몇몇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각각의 불빛 뒤에는 누군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을 것이다.
희망이라는 감정의 등장. 지금까지 무너짐과 붕괴만 다뤄왔던 서사에서 처음으로 건설적인 미래를 암시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이 앞으로 일어날 "전체 골조(骨組) 수정" 제안과 어떻게 연결될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었다.
무너진 사람의 방식은 역설적이다. 파괴를 통해 창조하고, 절망을 통해 희망을 발견한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그런 변증법적(辨證法的) 생존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방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카를로 스카르파가 베네치아에서 보여준 것처럼,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 탄생한다. 그녀와 나의 관계도 그런 종류의 건축학이었을 것이다. 무너진 것들의 만남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구조.
새벽 2시 19분. 담배 한 개비를 더 피우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꿈에서 나는 그녀와 함께 어떤 건물을 짓고 있었다. 그 건물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미완성 자체가 완성이었다. 영원히 건설 중인 구조물.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관계의 본질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