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지 않은 토플 시험
험난한 재수 생활을 끝내고, 대학교 1학년 때 영어는 기본이라는 주변의 말에 솔깃해 토플 학원을 끊었다. 귀가 참 얄팍하다. 이빨이 저절로 딱딱거리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무슨무슨 할인 행사 기간에 맞춰 일주일에 하루,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이전에 토익 시험을 본 적이 있던 나는 뭐, 비슷하겠지 하며 북적거리는 밤거리와는 다른 아침의 신촌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내린 대학 정문 앞은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전날 밤거리를 휩쓸고 다녔을 휘황찬란한 전단지들의 흔적이 바닥 곳곳에 남아있었고, 갈변한 잎사귀들이 그것들과 함께 뒤엉켰다. 매섭게 쏘아붙이는 바람 가는 방향에 따라가다 보니 나온 내 목적지. 차갑게 식어 손가락을 대면 살갗이 붙어 떨어지지 않을 듯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검지로 꾹 눌렀다. 덜컹거리며 낡은 기계가 올라가자 1층보다는 환한 프런트가 나온다.
"저, 대학생 방학 할인 신청하고 왔는데요."
처음 보는 얼굴에 초면부터 다짜고짜 카드를 들이미는 카페와 그 모습은 비슷하지만, 나가는 금액은 더 컸다. 그렇게 듣게 된 방학 단기 완성반은 토익 시험과 별반 다를 것 없을 거라는 내 예상을 완전히 비껴갔다.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인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은 다들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우리 땅의 말이 아닌 것들을 뱉어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에 반해 한국어도 남들 앞에 서면 덜덜 떨며 중얼거리는 나에게 토플 스피킹은 넘고 싶지 않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첫날, 맨 앞자리부터 주어진 문제에 대한 답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 나도 이 기회에 영어도 배우고 자신 있게 말하는 연습을 해보자. 나름 굳게 마음먹은 아침의 나와는 달리, 스피킹 시간인 오후면 직전 쉬는 시간부터 덜덜 떨었다. 물론 실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회피를 선택했다. 갓 어른인 나를 그 학원에서는 말릴 사람도 공부하라며 강요할 생각도 없었다. 4교시 스피킹 수업 전 쉬는 시간에 짐을 챙겨 학원을 나오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기에는 수업을 빠진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없기에 나는 신촌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설문조사 5분만 해달라며 옷깃에 매달리는 대학생인지 뭔지 모를 사람들을 처음에 상대해 주다가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쫓아오는 또 다른 무리를 보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이른 오후에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기도, 어느 날은 혼자 코인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두 달이 다 되어갈 즈음엔 혼자 영화관까지 섭렵했다.
와, 그게 무슨 돈 낭비야?
나도 동의한다. 공부하려고 간 곳에서는 배워오는 것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생각.
그런데 나는 너무 지쳤다. 짜여진 시간에 맞춰 몸을 끼워 넣는 것에 질렸다. 그 시간들은, 영어로 내 의견을 늘어놓는 데에 익숙해지지는 못했지만, 나름 즐거웠다. 좋아하는 배우의 영화를 넓은 좌석에 파묻혀 관람하고 잘 벗어나지 않았던 본가와 떨어져 도심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낸 것이. 사치스러운, 하트 모양이 그려진 라떼를 앞에 놓고 뭐라도 된 것 마냥 사색에 빠진 시간들이. 내가 나에게 선사한 재미, 훌륭했다.
그리고 토플 시험은 아직 안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