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공리주의로서의 인간관계
사람 사는 거, 어딜 가나 다 똑같다 하지만, 유독 어떤 사람들은 참 재밌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학창 시절의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꽤 많은 편이었다.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를 말은 피해 가려 노력하면서 그들을 재밌게 하려고 별 짓을 다 한 것 같다.
좋은데? 괜찮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다른 의견에 동의만 하다가 '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그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싫어하는 측으로 완전히 갈리곤 하던 사람이었다. 사실 나는 범죄자가 아닌 이상 그런 평판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서, 추측이 뒤엉킨 소문은 한 귀로 흘려듣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곁에 두고 있었다.
"나 쟤 싫어."
그는 자주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곤 했다. 대상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람이기도 했고, 둘 다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으며, 그 기준은 이해되는 것들부터 별 시답잖은 것들까지 다양했다. 점점 이유 없는 비난을 듣기 힘들었을 무렵 나에게 또 한 사람을 가리키며 싫다고 한다. 그 사람은 내가 가장 아끼던 사람이었다.
"나랑 오래 알던 친구인 걸 알면서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을 평소와 달리 나는 이 질문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그냥."
정말 간단한 대답. 어이가 없었다. 그 뒤로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모든 면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머리칼을 사자처럼 휘날리며 남들을 비웃던 너, 꿈에서라도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란다.
칼 포퍼에 따르면 반증 원리에 따라 실재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의 추구에 근접하려는 방법은 결국 정의가 아닌 것을 반증하여 배제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무엇이 옳은지 판별하려 애쓰기보다, 옳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것이 우선이다, 뭐 그렇게 해석될 수 있겠다.
이 이론은 소극적 방법론과도 연결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공리주의와는 다르게, 최소인의 불행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 소극적 공리주의. 사상적, 이론적인 개념을 따라가다 보니 곧,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이것이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물론, 개인마다 살아온 환경과 성격에 따라 관계 형성의 방법도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른바 성격이 잘 맞는 사람을 곁에 두려고 평생을 노력하지 않는가.
'노력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들이 모이던데?'
오, 이렇게 생각하는 당신은 또한 스스로 좋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 간혹 활발한 성격을 가지거나, 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의 어떤 면모가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경우, 좁지만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스스로 분투하지 않아도 여러 마음들을 얻었다 생각하는 데에는 모순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은 의도한 바가 아닐지 모르지만, 본인이 성장해 온 그 모든 과정이 결국 지금의 인격체를 형성한 것이지 않은가. 노력이 없는 결과란 없다.
나는 그 또한 무의식적 노력의 결과라 칭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