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아요
고등학교 때 쓴 시를 지금 와 보니 참 외로운 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친구들과 잘 어울리던 아이는 점심시간에 화장실에서 차갑게 식은 팥빵을 뜯어먹어야 하기도 했다.
반에서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도, 이동수업 시간이라며 책 챙기라고 말해주는 친구가 없어도, 익숙해지니 씁쓸하기만 했는데. 이 빵 맛은 언제 먹어도 달라지지 않아 눈물이 났었다.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해서 미움을 온몸으로 받아냈어야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하루 종일 고민했고 학교를 가지 않는 방학을 기다리는 것에 위안 삼는 하루하루였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한 달가량의 시간조차 아이들의 협박에 빼앗기자 나는 온종일 불안에 떨어야 했다.
'집으로 찾아오면 어쩌지?', '학교에서 인사하는 몇 안 되는 친구도 나를 투명인간 취급할까?'
끝도 없이 되물리는 물음표들에 머리는 복잡했고 남들 앞에서는 잘 웃어넘기던 것도 얼굴에 경련이 일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많이 힘들었다.
아침에 교실 문을 밀고 들어가면 아무도 인사해주지 않는 풍경에 익숙해지는 것이, 밥 먹을 친구가 없어 담임 선생님 앞에서 점심을 떠넘기던 날들이, 퍽퍽한 자판기 빵이. 그렇게 서러웠는데 어른은 이 얽힌 문제들을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음을 일찍이 알아서 난 혼자 썩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학년으로 진학하고 다행히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나서 웃음은 아주 비슷하게 되찾았지만, 속에서 올라오는 불안감은 나를 자주 좀먹었다. 다시 버림받을까 두려웠고 그들의 동의를 구하기보다는 먼저 고개를 끄덕여주는 습관을 갖게 되었으며, 그때의 나는 나만의 온전한 생각이 없었다.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면서 언제 떠날지 몰라 주춤거리는 그런 불안한 외줄타기를 나 혼자 하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 나름 오래 익숙해진 나로서는 겉으로 완벽하게 동화된 것처럼 표현하고 말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고작 짧은 학창 시절에 친구 간의 불화 정도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지금 내 성격을 만들어낸 그 날들이 나에게 있어서는 무시될 수 없는 거대한 구덩이었다.
그건 내 불안과 관계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책에 빠져들어 주변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나름 괜찮은 특이점을 안겨주기도 했다. 방과 후, 같이 어울릴 사람이 없었던 내 취미는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 정도 가야 하는, 빼곡한 책장들이 늘어진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보다는 소설과 판타지에 꽂혀 어느 작가 할 것 없이 소설 매대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마지막 장이 넘어갈 때까지 읽었다. 그래서 책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답하지 못한다. 그렇게 많은 소설들을 읽었지만 정작 작가가 누구인가를 파악할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그 세상에 뛰어들어야 하기에 작가 소개란을 읽은 기억은 없었다. 이 습관은 대입 준비로 문학을 공부할 때 불거져서 힘들게 했던 기억이 있다. 책은 친구가 되어 위로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내 생각에 대한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지인마냥 녹아들 수 있는 점이 가장 기뻤다.
예비교사로 또 다른 학교에서의 삶을 꿈꾸는 지금, 과거의 나와 같은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인다. 집안 형편 때문에, 외관이나 성격 때문에, 또는 가지고 있는 장애 때문에 날카로운 시선을 혼자 힘으로 견뎌야 하는 아직 여린 아이들을 보면 괜스레 너의 편이 있다고, 그랬던 나도 아직 살아 있다는 말 한마디가 튀어나오려 하는 것을 다시 구겨 넣을 때가 있다.
따뜻한 위로의 말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그 말을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난 네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