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에 닿는 솜털처럼 간지러운 일상의 균열

너 때문에 행복한 나는 너 때문에 무척 슬프다.

by sooookhee
27751772_10213649386696429_8002989970160438667_n.jpg 초보 집사를 위한 친절한 가이드를 준비해 주신 숙희의 보호자분

고양이도 감이란 게 있어서 자기 집을 안다고 해요. 이렇게 잠시 다녀가는 곳이 아니라 자기집이 생기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네요. 고양이도 사람 아기 같이 성장을 하기 때문에 지금은 너무나 순하고 골골대기 좋아하는 순둥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고치고 말썽 피우는 사춘기 소녀가 될 수 있고 더 나이가 들면 만사 까칠하고 귀찮은 할머니 고양이가 되기도 해요. 그렇지만 숙희가 어떻게 변한다 해도 숙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이 온 세상을 통틀어 입양자님 뿐이랍니다. 속상하고 화가 날 때도 기억해주세요.


P.s. 신승훈의 'I believe'를 들으며 읽어주세요.

- 숙희를 구조하고 보호해주셨던 첫 가족의 당부 메시지 중 -



2018년 2월 입춘, 봄은 오지 않고 숙희가 왔다.

자그마한 이 아기 고양이가 만들 일상의 균열들이 벌써 뺨에 닿는 솜털처럼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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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시린 어느 저녁, 불을 끈채 동그랗게 몸을 말고 이불 속에 엎드려 있는데 겨드랑이 사이로 숙희가 머릴 디밀고 들어왔다. 수면바지에 뺨을 부비기에 손으로 뺨을 쓸어주니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뒹굴뒹굴. 턱을 쓸어주니 발라당 뒤집고는 고롱고롱.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나는 네 턱을 쓰다듬고, 그럴수록 너는 나의 곁을 파고들며 가르릉대고, 들려오는 노래 가사는 좀 서글프고 네가 움직일 때마다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떨어지는 네 이마의 하얀 자욱은 별처럼 반짝반짝.


2.8kg의 무게. 이 작은 고양이가 나의 우주를 가득 채우는 놀라움과 벅참. 가만히 옆에서 전해져오는 가르릉 대는 떨림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한데, 언젠가 이 작은 털쟁이와 이별을 하게 되면 어쩐담. 섬광처럼 지나가는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숙희, 네가 주는 행복만큼 네가 주는 슬픔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겠지.



마음을 준다는 것은 이런 일인 것 같아.

숙희 오늘 나랑 더 많이 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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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배웅하던 길
여전히 나는 그곳에 서서
그대가 사랑한
이 계절의 오고 감을 봅니다

아무 노력 말아요
버거울 땐 언제든
나의 이름을 잊어요

꽃잎이 번지면
당신께도 새로운 봄이 오겠죠

시간이 걸려도
그대 반드시 행복해지세요

그다음 말은 이젠
내가 해줄 수 없어서
마음속에만 둘게요

- 눈사람, 정승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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