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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Oct 23. 2020

8. 애무의 글쓰기

#글로 배우는 사랑 #에로스의 종말 #사랑의 존재론 #끝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후훗. 글로 사랑을 알려드리겠다!!


에로스의 함정


   류승룡이라는 배우가 제대로 ‘포텐’터뜨린 영화가 있었다. 바로 <내 아내의 모든 것>. 카사노바를 연기한 류승룡은 ‘더티섹시’(dirty sexy)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이 세상의 모든 남자는 다음의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당신은 이중 어디에 속할지 생각해보길.

(참고로 난 3번ㅋㅋㅋ)

1. 자신이 카사노바라고 믿는 남자
2. 자신이 카사노바였다고 믿는 남자
3. 자신은 카사노바가 될 수 있지만 다만 원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하는 남자
더티-섹시하다! 근데, 난 잘 모르겠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는 가상으로 만든 이상향의 여인 ‘둘시아네’를 향해 모험을 떠난다. 사실 <돈키호테>는 중세의 문화를 조롱하고 풍자하려는 소설인데, 중세의 ‘기사도 정신’을 ‘디스’(dis-respect)한다. 그 중세의 기사도 정신이 바로 ‘코르테지아’(cortezia). 여성을 신격화하고 여성의 사랑을 얻기 위해 바치는 모든 시련과 고통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

   이때 중요한 것은,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연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상태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컨대, 당신이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있으면, 연애 대상을 (정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상태로서 데이트하고 밤늦게 전화통화도 하고 애교도 부리고 사랑싸움도 하는 그런 상태가 더 좋은 것이다. 대체로 대부분 그렇다! 자각하지 못할(않을) 뿐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렇게 사랑의 대상보다는 사랑하고 있는 상태와 상황을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연인에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연인과 자신과의 관계 자체를 우상화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에로스라는 종교가 발생한다. 종교처럼 그 무엇보다 강력한 우상화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로스의 함정’인데, 이 에로스의 함정이 왜 위험한지 차차 살펴보겠다.


에로스의 종말


   최근에 사랑을 연구(?)하기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정주행한 넷플릭스 프로가 하나 있다. 바로 <Too Hot To Handle>. THTH. ‘to-too 용법’ 기억나는가. ‘~해서 ~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너무 뜨거워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뜨거워서 어쩌지 못하는 것. 무엇일까. 바로 성욕. 불타는 성욕! 끓어오르는 성욕! 어쩔 수 없는 성욕! 성욕이 들끓는 핫(hot)한 남녀를 한 펜션에 가둬둔다. 가만히 있으면 10만 달러의 상금을 받을 수 있는데, 한 가지 금기가 있다. 바로 스킨십! 과연 이들은 상금을 받을 수 있을까.

Too Hot To Handle. 한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프로. 나도 저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ㅋㅋㅋ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의 프로가 하나 있다. 바로 <하트시그널>. 선남선녀를 한 숙소에 머물게 하면서 썸을 타게 하고, 패널들이 이들의 썸에 대해 예측하고 이야기하는 프로다. 이런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시초가 바로 그 유명한 SBS의 <짝>. 2011년에 방영되었는데 아주 난리가 났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선택’이다. 그 사람에게 끌리거나, 그 사람에 의해 내가 그 사람의 깊은 곳까지 흡수되는 선택이 전제되어야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다. ‘빠짐’(falling)이다. 문제는 이 ‘빠짐’이, 점차 가벼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요즘 시대는 이 ‘빠짐’을 겪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썸’과 ‘삼귀기’의 시대다. 연애보다는 썸이 좋고, 사(4)귀기보다는 삼(3)귀기까지 가는 것이 좋다. 내꺼 인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내가 한창 연애할 때는 ‘밀당’이라는 말을 썼지만, 요즘은 ‘썸’이라고 말한다. 2019년 설문조사에 의하면 2000년생 40퍼센트 가까이 연애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응답했고, 20대 절반이 현재 썸을 타고 있다고 한다. ‘빠짐’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빠지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왜 그럴까.


2019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연애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썸이라도 좋으니 나도 타고 싶다, 썸. 아내랑 썸이라도ㅠㅠ


   답은 간단하다. 사랑하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하니까. 연애할 때 드는 돈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 시대가 그렇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사회에서 우리는 먹고사니즘을 고민해야 한다. 1등이 되어야 한다. 성과사회에 직면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착취한다. 누군가가 우리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착취(지배 없는 착취)한다. 더 잘 살기 위해서다. 결국 우리는 나만 살아남으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사랑에 빠질 여유가 없다. 돈과 시간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 자체가 없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문제는 또 있다. 요즘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우울증은 기본적으로 ‘자신 속으로 침몰하는 병’이다. 자신의 장점을 보지 않고 단점만 보는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그런데 에로스는 타인에게 빠지는 것이니, 우울증과 에로스는 서로 상반된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타인에게 빠질 겨를이 없다. 자기 자신만 보고 있으니까. 반대로 에로스에 빠져 있으면, 우울증을 앓을 수가 없다. 타인을 사랑하느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으니까.

   진짜 심각한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먹고사니즘으로 사랑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는 것인데, 성적 쾌락(욕망)은 또 어떻게든 존재한다. 그래서 상대방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수단화시킨다. 에로스 없는 욕망은 쾌락 그 자체를 원하지만, 에로스는 그 연인 자체를 원한다. 당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는 연인 자체를 원하는지, 아니면 쾌락(에로스의 함정)을 원하는지.

   최근까지도 이슈가 되고 있는 ‘n번방 범죄’에서 우리가 목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타자는 나의 성적 흥분을 채워주는 상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지인능욕’까지 하면서, 미성년자까지 성적 흥분의 대상을 삼는 것이 바로 현시대의 시대정신이 되어버렸다. 큰일이다. 이러한 시대를 잘 진단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포르노는 성애 자체를 파괴한다. (…) 포르노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란하게 만든다. (…)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한병철, 김태환 역,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 2015, 65~66쪽.)

   현재 에로스의 가장 큰 적수는 ‘포르노’다. 남녀 간의 사랑이, 아름다운 사랑이 포르노로 추락해버리고 있다. 데이트 폭력도 이에 일종이다. 사랑은 언제나 끝이 있다. 끝났으면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데, 폭력을 가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얻었던 쾌락을 잃게 되었으니까. 대상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상태와 상황에 더 몰두한 것이다. 에로스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질 수 없는 이 시대, 포르노를 강조하는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과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더욱이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에로스의 함정에 빠지고 마니, 우리는 과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에로스의 종말이 왔다. 사랑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한다면, 사랑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할까. 사랑이 중요하긴 한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사랑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가 문제다.

우리는 인간과 우주의 비밀을 결코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에리히 프롬, 권오석 역, <사랑의 기술>, 흥신문화사, 2009, 23쪽.)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사랑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앞으로 당신과 나눌(?) 사랑에는 기본 전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사랑의 에너지는 정말 강력하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더 강한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이다. 당신도 그런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며, 사랑의 속성(이름하여, ‘사랑의 존재론’)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사랑의 존재론 1
정념을 숨기면서 동시에 보여주는 것


   사랑의 존재론 첫 번째, 사랑에 빠질 때 우리가 겪는 상황이다.  바로 라르바투스 프로데오! 소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 주문이 아니다.


윙가르디움 레비오사~ 라르바투스 프로데오~
   내 정념에 신중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바로 거기에 진짜 영웅적인 가치가 있다. (…) 그렇지만 정념을 완전히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걸 아세요. ‘라르바투스 프로데오(Larvartus prodeo), 나는 손가락으로 내 가면을 가리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내 정념에 가면을 씌우고 있으나, 또 은밀한 손길로는 이 가면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정념은 결국에 가서는 그 관객을 가지게 마련이다.(롤랑 바르트, 김희영 역, <사랑의 단상>, 동문선, 2004, 72~73쪽.)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랑하는 마음을 마구 드러내기보다는 어느 정도 숨기려고 한다. 그게 세련된 사랑이다. 그러나 숨긴 마음을 상대방이 완전히 몰라서는 안 된다. 숨기되, 숨기는 것을 들켜야 한다. ‘내가 지금 당신을 향한 사랑을 이렇게 숨기고 있다는 것을 제발 좀 아세요’. 일반적으로 남자가 이쪽에 둔감한 편이다. 남자는 숨기지 않으려 하고, 여자는 숨기되 숨기는 것을 발견되길 원한다. 참고로 나는 숨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숨기는 것을 찾는 것도 좋아한다.

   왜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려 할까. 사랑의 정열을 모두 보여주면 되는데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의 정열을 모두 바깥으로 드러내면, 금방 사랑이 식으니까 아끼고 아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불길에 상대방이 탈 수도 있다. 상대방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반드시 사랑을 숨겨야 한다. 물론 꼭꼭 숨기면 짝사랑이 된다. 당신이 품고 있는 사랑의 반만 보여주고, 반은 숨기시길. 그 반이 사랑을 계속 지속시킬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도 그 반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존재론 2
먼저 사랑을 하는 사람이 얻는 것


   사랑의 존재론 두 번째. 사랑의 대상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의 문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에리히 프롬, 권오석 역, <사랑의 기술>, 흥신문화사, 2009, 13쪽.)

   왜 내게 사랑의 대상이 오지 않지? 왜 사랑의 대상은 내 마음을 몰라주지? 왜 사람들은 나를 몰라보지?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탓하지 마시라.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 탓이다! 매력적인 상대를 찾기 전에 당신이 먼저 매력적인 사람이 돼라. 그리고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먼저 사랑하길. 사랑 받을 생각하지 말고 사랑을 줄 생각부터 해야 한다.


애니 <벼랑 위의 포뇨>. 바다의 정령(?) 포뇨는 소스케를 만나기 위해 인간이 되기로 했다!!

   예컨대, 성경에서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를 떠보려고 누가 나의 ‘찐’ 이웃인지 물었다.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다. 예수는 율법교사에게 다친 나그네에게 누가 ‘참된’ 이웃이냐고 물었고, 율법 교사는 다친 나그네를 보살펴 준 사마리안을 답으로 답변했다. 뒤이어 예수는 이상한 말을 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나에게 좋은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네가 가서 먼저 좋은 이웃이 되라는 것이다. 질문과 답의 층위가 전혀 다르다. 사랑도 마찬가지. 좋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먼저 좋은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의 존재론 3
새로운 세계와 진리를 구축하는 사건


   눈물 많은 내가, 눈물이 필요할 때 보는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이프 온니>(If Only). 매우 통속적이고 뻔한 내용인데, 이상하게 이 영화만 보면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물론 최근에는 이 영화를 하도 많이 봐서 예전처럼 눈물이 마구마구 나진 않는다. 거짓말 안 하고 여태까지 한 80번 이상은 돌려본 것 같다. 타임 슬립을 주제로 한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연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그 사고 직전에 비 맞으면서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진짜 울컥한다. 하루를 사랑해도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았다고 말이다. 여기서 기술 들어가겠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말이다.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에 제가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만남에서,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마술적인 외재성의 한순간을 맞이하여 불타버리고, 소진되며, 동시에 소비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바로 여기에서 바로 기적의 범주에 속하는 어떤 것, 즉 존재의 강렬함, 완전히 녹아버린 하나의 만남이 도래합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사랑이 이렇게 전개될 때 우리는 ‘둘이 등장하는 무대’가 아니라 ‘하나가 등장하는 무대’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서로를 통합해버리는 사랑 개념입니다.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사랑 예찬>, 길, 2010, 41쪽.)

   뭔가 어려운 말 같지만,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는 말만 기억하면 된다. 도형을 떠올려 보자. 나와 네가 있다. 둥근 원은 나와 네가 가진 에너지, 마음의 총합이라고 치자. 사랑이 시작되면, 나의 둥근 원 중 반이, 너의 반이 사라진다. 시간이든 돈이든 에너지든 마음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당장에 손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라졌다고, 잃었다고 생각하는 반 원이 다시 나타난다! 나와 너의 반 원이 합쳐지면서 새로운 곳(무대)에 하나의 원이 만들어진다. 바로 이것이 ‘둘이 등장하는 무대’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가는 것이다.


내 인생 영화 중 하나인 <이터널 선샤인>. 또다시 지리멸렬한 사랑이 시작되더라도, 다시 사랑을 꿈꾼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우리가 잃었다고 생각하는 시간, 돈, 에너지, 마음은 상대방에 의해 채워진다. 결국 우리는 잃은 것이 없다. 그리고 둘이 등장하는 무대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바로 ‘하나가 등장하는 무대’. 통합된 너와 나. 바디우는 사랑을 새로운 세계와 진리를 구축하는 사건으로 보았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하나가 등장하는 무대’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향(진리)이 아닐까. 우리 자신의 동일성(이기적 속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말이다.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이영광 <사랑의 발명> 전문(<나무는 간다>, 창비, 2013)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다. 인용시에서, 사랑은 발명하는 것이다. 없던 사랑을 말이다.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의 삶과 세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기존의 삶과 세계와는 비교 따위할 수 없을 만큼. 만약 사랑을 시작했는데, 삶과 일상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면, 정말 문제 있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하다못해 지나가는 비둘기가 내게 말을 건다. 길가의 잡초도 예뻐 보인다.

   따라서 사랑은 새로운 세계와 진리를 구축하는 사건이다. 여기서 진리를 구축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삶 전체가 변화된다는 말이다. 사랑이 내 삶의 중심, 진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에로스의 함정에는 빠지지 않아야겠다.


사랑의 존재론 4
사랑은 유지하고 재-발명하는 것


   나는 결혼하기 며칠 전에 ‘결혼선언문’이라는 것을 썼다. 결혼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왜 이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지, 앞으로 결혼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 나름의 출사표 같은 것이다. 한 열흘 걸려 쓴 것으로 기억한다. A4용지 10장 분량이다. 문서에 비밀번호도 걸어놨다. 누군가가 봐서는 절대 안 될 내용이다. 근데 이번에 사랑의 존재론을 준비하다가, 결혼선언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종종 볼 때가 있다. 특히 부부 싸움했을 때! 거기서 내가 키에르케고어라는 철학자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삶이 제아무리 많은 고통스러운 혼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다음의 두 가지 과제를 위하여 싸운다. 즉, 하나는, 결혼이란 첫사랑의 성화(聖火)이지 파괴는 아니고, 성화의 편일망정 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주려는 엄청난 과제고, 다른 하나는 나의 보잘것없는 결혼이 이 과제를 완수할 수 있게끔 항상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그런 뜻깊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과제가 바로 그것이다. (쇠얀 키에르케고어, 임춘갑 역, <이것이냐 저것이냐 2>, 다산글방, 2008, 60~61쪽.)

   이에 따르면,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혼이 아니다. 결혼은 (첫)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은 사랑을 과거의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의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첫사랑을 계속 유지하고 재-발명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은 하는 것이 아니라, 해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의 완성 또는 결실이 결혼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사랑을 해나가는 것이 결혼인 것이다.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계속 발명해내야 한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갔다 오든 그것은 당신이 선택할 문제. 그러나 사랑은 쉬지 않고 계속 만들어가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죽음이 있는 한,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너무 아름다운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첫사랑을 유지하고 재발명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이 식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식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계속 처음 사랑했을 때의 감정을 되찾으려 노력해야 하고, 사랑을 재발명해내야 한다.


초반 오프닝 4분만으로 펑펑 울리는 애니가 있다. 바로 <UP>. 진짜 펑펑 울었다. 이걸 보고도 울지 않으면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https://youtu.be/dAlaSQfw_6Y


사랑의 존재론 5
미지(무한)를 향하는 것


   철학자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라는 저작에서 4가지 기호를 이야기했다. 그중 ‘사랑의 기호’를 좀 더 살펴보겠다.

   우리는 애인 속에 있는 미지의 세계들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애인이 내뿜는 기호들을 해석해낼 수 없다. 그런데 이 미지의 세계들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겨난 세계이다. (…) 애인의 몸짓은 그것이 우리를 향한 것이고 우리에게 바쳐진 것일 때조차 여전히 우리가 배제되어 있는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애인은 우리에게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기호들을 보내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호들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독점적인 애인의 사랑 각각은 가능세계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 사랑의 기호들이 표현하는 감추어진 것이란 미지의 세계들, 행위들, 사유의 원천이다. 사랑의 기호들은 기호 해독하는 데 점점 더 깊이 파고들면서 생기는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질 들뢰즈, 서동욱,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1997, 30~31쪽.)

   사랑의 기호, 즉 사랑의 대상이 뿜어내고 있는 기운, 에너지, 표정은 우리가 전혀 해석할 수 없다. 미지의 영역이다. 예컨대, 당신이 누군가를 짝사랑한다고 치자. 짝사랑의 대상이 하는 말, 몸짓, 표정, 모든 것을 해석하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과연 맞느냐다. 나만의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그 사람의 그런 기호들은 나한테만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발산하고 있다. 미쳐버리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대상의 웃음은 나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유효하다!

   그러니까, 사랑의 대상을 바라보는 나는 대상을 해석하면서 고통에 몸부림친다. 대상의 모든 것을 내게만 개별화시키려 하지만, 대상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다른 사람도 대상을 좋아할 수 있다. 대상의 행동과 말은 수많은 해석을 만든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세계’다. 사랑이 그렇다. 상대방은 늘 미지의 세계다. 한 이불을 덮고 평생을 살아도 옆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평생을 함께 한 부부도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사랑의 대상은 늘 미지의 영역이다.

국민 첫사랑 수지가 나온 <건축학개론>. 수지의 미소는, 수지의 친절은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이렇게 미지와 무한을 향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영원성의 문제. 즉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향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름답지 않은가.

   필멸자인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지만, 무한을 향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한을 향하는 일이다. 물론, 그 일은 무의미할 수도 있고, 끝내 헛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향하는 일은 누가 뭐래도 우리에게는 소중한 일이 될 것이다.

애무의 글쓰기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만지고 싶다. 처음에는 손만 잡아도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르르하고, 첫 키스를 하고, 잠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왜 사랑하는 사람을 만지고 싶을까.

   성적 욕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무의식에는 손에 잡히지 않는 당신을 어떻게든 쥐어보고자 하는 무상함이 내재되어 있다. 사랑의 대상은 미지이고 무한하니까. 절대로 알 수 없고,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갖고 싶다. 당신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 당신의 과거까지. 그래서 당신을 만지고 당신을 쥐어보는 것이다.

   연인이 나의 것, 지금 나와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만져야 한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선물을 주고받는 것으로만 사랑을 확인할 수 없다. 보는 것과 듣는 것 외에도 만지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지의 당신을 내가 사랑하고 있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살로, 직접적인 감각으로 느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 하는 ‘짓’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벌거벗은, 솔직한 내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일이면서 상대방에게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일이다. 여기서 애무가 중요하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 갖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니까. 물론 실패로 끝나겠지만, 충분히 당신을 사랑스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내가 지금 당신과 만나고 있다는 것, 당신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자 여기서, 마지막 기술 들어가겠다.

   사랑하는 일, 상대방을 가지려 애무하는 일은, 결국 글쓰기와 같다! 글쓰기 역시 대상을 만지는 일이다. 이제부터 글쓰기를 ‘애무의 글쓰기’라고 부르겠다. 조금 야한 말이지만, 기억해두시길.

우리 이제 뭐할까 한번 더 할까
그래 그러자
너는 아랫목에 놓인 홍시 같아
너는 윗목에 놓인 요강 같아
너는 빨개지고
너는 차오르고
우리는 이제 무엇이 될까
그사이 마당은 희어지고
너를 버릴 때도 이렇게 뜨거우면
너가 그대로 다른 땅에 스미면
아직은 깊은 밤에 혼자 나와
너를 안고 둥글게 울었다
- 유진목 <동지> 전문(<연애의 책>, 삼인, 2016)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뜨겁게 당신을 안고 있다. 당신을 버릴 때도 이렇게 뜨거우면 어쩌지 하면서, 시인은 당신을 곁에 두고 혼자 몸을 둥글게 말아 운다. 당신이라는, 결국 떠날 당신을, 붙잡을 수 없는 당신을 혼자 마음으로 안고 울고 있다. 지금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시는, 글쓰기는 이렇다. 그렇게 그때의 감정을, 당신을 글로 활자로 잡아두는 일이다. 기어이 당신이 내 곁을 떠나도, 글은 남는다. 그때의 뜨거웠던 당신은 여전히 글에 남아 있다!

   글쓰기는 대상을 움켜쥐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로 느끼고 싶은 것처럼, 글쓰기 또한 대상을 쥐어보고자 하는 일이다. 활자로 대상을 쥐어보려는 일, 그것이 바로 애무의 글쓰기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지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모두 갖고 싶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한평생 시도해볼 만한 일 아닌가.


낯뜨거운 이미지이지만 잘 기억해두시길. 사랑은 상대방을 쥐어보려는 일, 글쓰기 역시 대상을 쥐어보려는 일이다.

 

   왜 글쓰기 매거진에서 뜬금없이 사랑을 마지막 챕터로 남겨두었는지, 이제 당신도 눈치챘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동시에 자신의 스타일과 관점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랑을 겪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잘 보여주게 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사랑을 겪으면 아주 잘 알게 될 것이며, 상대방이 누구인지 역시 잘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이 당신의 삶을 좌지우지할 것이다. 사랑이 당신의 삶을 뒤흔들 수도 있고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다. 이왕 한 번 사는 것,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다 죽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글쓰기도 사랑과 같다. 글은 당신이 누구인지 잘 보여주며, 당신은 글을 쓰면서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게 될 것이다. 글이 당신의 삶을 뒤흔들 수도 있고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해서 애무하는 것처럼, 글쓰기 역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애무하는 일이다. 끝내 불가능하더라도, 끝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끝내 가닿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파내려 가보자. 무언가가 없어도 상관없다. 결국 얻는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성장과 배움이라는 과정이니까.

   당신이 손을 뻗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구원할지도 모른다. 물론, 글쓰기 역시 당신을 구원할지도 모른다. (끝)


ps : <글쓰기 파내려가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460451&tab=introduction&DA=LB2&q=%EA%B8%80%EC%93%B0%EA%B8%B0%20%ED%8C%8C%EB%82%B4%EB%A0%A4%EA%B0%80%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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