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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Oct 13. 2020

7. 소설이 온다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 #깨어 있을 때 꾸는 꿈 #소설은 편집점

소설이 온다. 이미 왔다. 당신은 '왜' 소설을 안 읽는가?



우리가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왜 우리는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시간낭비다

   제일 많이 하는 답변이다. 먹고사니즘 때문에 한가하게 소설책을 읽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분초를 쪼개서 산다. 먹고살려면 남들보다 부지런해야 하니까. 당연히 마음 편히 소설을 읽은 여유가 없다. 내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잠은 무덤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둘째, 허구인데 읽을 필요가 있나

   우리는 소설을 fact가 아닌 fake.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 남의 다리 긁는 이야기,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현실은 전쟁터인데, 한가하게 허구를 읽을 필요가 있나 하면서 말이다. 현실에 쓸모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자기 계발서나 지적 대화를 위한 얇고 넓은 지식 따위나 알 수 있는 책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토닥토닥 위로해주는 그런 책들이 나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구인 소설은 쓸모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문학 전공자 또는 작가들이 읽는 책이라는 것이다.


   셋째, 재미가 없다

   이미지와 영상에 익숙한 우리 세대에게 텍스트로 된 것은 오히려 어색하다. 글자보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영상에 익숙해진 요즘 시대에, 활자로 된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요즘 그래서 소설책도 작게 나오고, 시집도 작게 나온다. 분량도 적다. ‘스압’(스크롤 압박)을 주면 안 되는 이 시대, TV 프로의 본방을 사수하기보다는, 짤로 보는 이 시대, SNS와 유튜브가 생활화된 이 시대에서 활자로 된 소설을 읽는 일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 같다. 당연히 스펙터클한 영상에 비해 텍스트는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


요즘 핫한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 재미있는 게 넷플릭스와 유튜브에 널렸는데 책 볼 시간은 당연히 없지.


   넷째, 문학적이라 어렵다

   예전에 비해 소설이 조금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작가주의 경향도 한층 짙어졌고, 통속소설도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책을 읽기 전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지레 겁부터 먹는다. 끝내 결말을 보지 못하고 책을 덮는다. 그래도 우리가 교과서에서 봤던 소설은 확실한 정답이 있었으니, 그나마 쉬웠던 것이다. 이제 당신이 읽을 소설은 교과서에 있는 소설이 아니므로, 답이 없으니 부담감이 생길 수밖에.


   다섯째,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서점에 가면 수많은 책들이 있다.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이고, 어떤 소설이 쉬운 소설인지 알 수 없다. 각 출판사가 추천하는 혹은 평론가가 추천하는 그런 책들이 과연 그러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취향이 모두 다르니까. 서점에 가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 그냥 돌아온다. 혹은, 인터넷서점에서 이것저것 보다가 결국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돈을 내면서까지 독서기반 커뮤니티 같은 곳에 가입하기도 하고, 독서모임에 참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책을 추천받았다고 한들, 자신과 맞을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소설을 읽고 싶어도, 어떤 것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으니, 차라리 소설 읽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새해 다짐, 독서하기나 운동하기 등등. 그중에 제일 빨리 포기하는 것이 바로, 독서다.


   이처럼 다섯 가지 이유로 우리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아니 읽을 수 없다. 내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인터넷 신문기사를 참고하여 작성한 이유이니, 당신에게도 하나 이상 해당될 것이다. 자, 여기서 기술 들어가겠다! 우리가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를 제대로 분석하고 반박할 수 있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아예 핑계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무식하긴 하지만, 확실하다!     자, 무식하고 용감하게 우리가 소설을 읽지 않는 핑계를 모두 깨부수겠다!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


   첫째, 시간낭비다 VS 어차피 24시간 일하지 못한다

할 일은 늘 많다. 그러나 24시간 일할 수 없다. 그러면 죽는다.

   우리는 소설 읽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24시간 일하지도 못한다. 노동한 만큼 쉬어야 한다. 쉬지 않으면 죽는다! 신데렐라 같이 할 일이 태산이라도 어쨌든 밥은 먹어야 하고 잠은 자야 하며 휴식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슬프지만, 그래야 또 힘내서 일할 수 있다. 여기서 ‘팩폭’ 하나. 여유는 평생 없다! 열심히 주중에 일하고 주말에 쉬어야지, 젊었을 때 빡세게 일하고 노년에 쉬어야지, 이것만 하고 쉬어야지 등등 여유시간을 뒤로 밀지만, 그렇게 밀면 여유는 평생 안 생긴다. 내가 늘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빡쎄다!’ 지금 바로 여유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전자는 물리적 시간이고 후자는 철학적 시간이다. 층위가 다르다. 그러므로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쉴 때 당신은 무엇을 하며 쉬는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멍 때리거나, SNS 하거나, 유튜브, 넷플릭스나 TV를 보면서 쉬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게 제대로 쉬고 있는 것일까. 잘 쉬고 있는 것인가. 그냥 귀찮아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닌지. 당신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시길. 당신은 뭐하면서 쉬는가?



   둘째, 허구인데 읽을 필요 있나 VS 오히려 소설이 더 리얼하다

   우리는 소설이 허구라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깊이 잘 생각해야 할 문제다. 삶의 태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배우 짐 캐리가 주연한 <트루먼쇼>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잘 준비된 세트장에 살고 있다. 버라이어티쇼의 주인공이니까. 현실이 가상이었고, 현실 바깥이 있던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도 그렇고, <인셉션>도 마찬가지. 가상과 현실이 뒤엉켜 있다. 또한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 19의 팬더믹에 빠져 사상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과연 이 상황이 끝나기는 할까. 마치 재난영화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이에 비춰볼 때, 오히려 소설이 더 리얼할 때가 많다. 소설이 현실 같고, 현실이 소설 같다. 현실과 가상, 현실과 소설을 나누는 것은 이제 무의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 진실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소설은 한 걸음 바깥으로 떨어져 나와 우리 인간을 보게 하니까. 우리는 현실과 밀착되어 있어 그럴 수가 없다.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전 이제 real 현실로 나갈게요. 헬조선 굿빠이.


   셋째, 재미가 없다 VS 소설 읽는 시간이 재미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상에 익숙해져서 소설이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이다. 그러나 이건 좀 쉬운 문제다. 실은 당신이 재미없는 소설만 읽어서 그렇다. 진짜 그렇다! 교과서에 나온 소설은 진짜 재미가 1도 없는 소설이며, 진짜 재미있는 소설은 따로 있다. 가끔 나도 소설책을 읽다가 아침을 맞이한 적이 있다. 그날 하루는 엄청 피곤하지만, 기분은 좋다. 무언가에 홀린 느낌을 하루 종일 갖고 있으니까. 밤새도록 책 읽은 기억이 없다면 그것도 슬픈 일이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소설 자체가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사실, 소설 읽는 시간이 더 재미있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소설을 아무 때나 읽을 수 있지만, 자신만의 신성한 공간과 특별한 시간에만 읽는다고 생각해보라. 그 시간 자체가 좋아질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소설책은 두 가지 방식으로 본다. 지하철을 타거나, 여행 혹은 출장 갈 때 즉, 이동할 때 소설을 읽는다. 반드시 그 소설과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이동한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도 또 다른 방식은 바로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밤에 맥주 마시면서 소설 읽기. 천국이 따로 없다. 안주로 뭔가 씹을 것을 조금 마련해두고 맥주 홀짝홀짝 마시면서, 좋은 음악도 좀 틀고, 비 오면 더 좋고! 그렇게 소설을 읽는다.

   그러니까, 어떤 소설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어떤 시간에 소설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당신도 실천해보라. 나는 이럴 때, 이렇게 소설을 읽겠다 하고 말이다. 그러면 그 시간이 기다려질 것이다. 소설책의 작가나 내용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다려지는 시간! 하루 중 제일 행복한 시간. 없으면 만들라!


   넷째, 문학적이라 어렵다 VS 쉬운 소설은 얼마든지 많다

   우리는 소설이 문학적이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맞다.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는 그동안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진 않았다. 교과서가 전부 아닌가. 다시 말해,  쉬운 소설은 얼마든지 많다. 못  찾은 것이다. 아니, 안 찾은 것이다. 먹고살기 바쁜데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쉽게 쉽게 넘어가는 소설책이 엄청 많다! 그리고 소설책을 그렇게 꼼꼼하게 읽을 필요도 없다. 대강대강 읽어도 문제없다. 화장실 갈 때 스마트폰 대신 소설책을!

   우리가 여기서 저지르는 결정적인 실수는 ‘진입 장벽’을 처음부터 높게 잡은 것이다. 문학성이 높은 소설, 의미로 가득한 소설을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를! 소설은 너무 어려워, 난 문과가 아니라서, 나는 문학에 취미가 없어서 등등. 다양한 핑계를 만든다. 그것을 우리는 ‘여우의 신포도’라고 한다. 저 포도는 신포도니 굳이 포도를 딸 필요가 없지. 이렇게 미리 재단하는 것이다. 일단 아무 책이나 손에 쥐어보자. 그리고 읽어보자. 재미가 없는지 있는지, 어려운지 쉬운지는 읽어본 사람만이 안다.


   다섯째,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VS 애착을 형성하라

  자,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해에는 책 좀 읽자. 서점에 간다. 좋은 책 사서 읽어야지. 그런데, 무슨 책을 사서 읽지? (소설을)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쉽고 재미있는, 나에게 맞는 소설책을 찾고 싶은데, 그게 어디 쉽나. 여기저기 검색도 해보고 추천도 들어보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올해도 독서는 포기.

여기서 기술 들어가겠다. 내가 제시하는 좋은 책 고르는 팁이다. 첫째, 서점에 간다. 둘째, 표지와 목차 등 마음에 드는 책을 구입한다. 셋째, 책에 내 이름을 새긴다. 넷째, 책을 읽는다. 끝.

    자기가 산 책에 애정을 쏟으면 그 책이 좋은 책이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읽으면 된다. 서점에 가기 어려우면 인터넷 서점을 애용하라. 장바구니에 책 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언제쯤 장바구니에 담긴 책을 다 살 수 있을까)

   책과 애착관계를 형성하라. 그러면 책을 다 읽게 된다. 아니, 다 안 읽어도 상관은 없다. 꼭 한 번에 다 봐야 할 필요는 없다. 나 같은 경우 책을 사면, 가장 먼저 책을 투명한 아스테이지로 겉면을 포장한다. 그리고 책날에 내 도장을 찍는다. 특별한 책은 면지에 간단한 사연과 날짜를 쓰기도 한다. 나만의 신성한 의식이다. 그래야 내 책이 되고, 읽을 맛이 난다. 당신도 당신 나름의 의식을 치르길.


책을 사면 나는 신성한 의식을 치룬다. 아스테이지로 책 표지를 포장하고, 나만의 문구를 새긴다. 의식이 끝나야 책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다섯 가지를 반박해서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를 만들었다!

첫째, 시간낭비다 VS 어차피 24시간 일하지 못한다
둘째, 허구인데 읽을 필요 있나 VS 오히려 소설이 더 리얼하다
셋째, 재미가 없다 VS 소설 읽는 시간이 재미있는 것이다
넷째, 문학적이라 어렵다 VS 쉬운 소설은 얼마든지 많다
다섯째,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VS 애착을 형성하라

    이제 우리가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사실 우리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그냥 소설을 읽지 않은 것이다. 소설을 읽을 의지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나 필요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읽겠다는 의지가 없었을 뿐이다. 집 나간 의지를 찾아오자!

   이제, 소설이 오고 있다.



평범한 이야기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하고 많은 것 중에 왜 하필 소설일까.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소설을 왜 읽게 되는지 이야기해보겠다.

   우리는 평범한 삶을 꿈꾼다. 크게 문제없이, 크게 부침 없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를 원한다. 물론, 생각보다 평범의 기준이 높다. 그러나, 이 세상에 평범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일종의 환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하긴 하지만, 평범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단 1도 없다. 당연하다. 재미가 없으니까. 우리의 삶은 평범하길 원하지만, 소설은, 이야기는, 영화는 자극적이고 특이하길 원한다. 갈등도 복잡다단해야 하고, 사건 전개도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평범한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에는 재미 말고도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가 한창 어렸을 때, 소꿉놀이나 장난감, 인형놀이 등을 한 기억이 나는가. 무엇을 가지고 놀든 간에, 항상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거나 화산이 폭발하거나 누가 아프거나. 그러면 우리는 각각의 문제에 대처하고 극복하는 방식으로 놀이를 진행하면서 행복한 결말을 향한다.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싸우거나 누군가에게 화를 내며 놀이가 끝났다.

   그러니까, 놀이에는 기본적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해야 한다. 집에서 내 아들과 놀아줄 때도 항상 그렇다. 문제없이 놀이가 평범하게 끝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다. 하다못해 갑자기 불이라도 나야 한다. 대체로 내가 ‘갑툭튀’ 괴물이고 아들은 괴물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도 역할을 한다. 어떤 문제와 갈등이 있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놀이의 기본 전개 방식인 것이다.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즉, 놀이 역시 ‘문제’(trouble)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그래야 재미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엉뚱 발랄 콩순이. 내 아들(5세)도 콩순이 노래를 따라 하곤 했다. 모든 에피소드는 트러블(콩순이 자기 잘못!)에서 시작한다.


   트러블이 있어야 이야기는 더 복잡해지고 재밌어진다. 트러블이 선택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열어주고, 우연과 필연을 엇갈리게 한다. 예측 불가능하게 이야기를 견인하는 것. 바로 문제, 트러블이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트러블이다. 문제가 없는 이야기는 문제가 많게 된다(아재개그ㅋㅋㅋ).

   그런데, 트러블이 흥미를 끄는 효과를 갖고 오기도 하지만 결국 트러블은 우리 인생과 같다. 우리 인생 역시 수많은 트러블을 겪고 극복해야 하니까. 지금도 많이 겪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우리 인생은 언제나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지만, 소설 역시 우리 인생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이다. 무척 특이하고, 현실에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소설로 쓴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인간의 일, 우리 인간의 삶일 수밖에 없다. 왜냐고? 인간이 읽으니까! 동물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외계인이 소설 전체를 차지한다고 해도, 결국 소설을 읽는 것은 동물이 아니고, 외계인이 아니고 바로 우리 인간이니까. 간단한 문제다! 그렇게 우리는 위험한 세상에, 문제 가득한 세상에 아주 쉽게 노출되어 있다.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말처럼, 세상은 위험한 일 투성이다. 코로나 19가 전 세계에 창궐하면서 집 밖 어디든 위험하다. 사고 역시 예기치 않는 곳에서 일어나기 일쑤.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지듯, 크레인이 떨어지기도 하고 공사장 잔해가 떨어져 사람이 죽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진짜 벼락 맞아 죽은 사람이 기사로 나오기도 했다.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만만치 않다. 우리는 늘 ‘갑’ 아니면 ‘을’이다. (대체로 ‘을’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렇게 위험하다. 이불 밖도 위험하고, 이불 안도 위험하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시련과 고난을 겪어가며 살아간다. 극복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이 가운데 우리는 이야기와 소설을 읽는다. 왜 그럴까. 바로 우리가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이야기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 이야기를 통해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 소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을 간접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불륜이나 복수극이 그렇고, 재난영화나, SF영화, 좀비 영화에 우리는 열광한다. 현실은 (드럽게) 지리멸렬하니까.


깨어 있을 때 꾸는 꿈, 소설


   우리는 현실에서 일어나면 안 되는 이야기를 소설을 통해 대리 만족하고 간접 경험한다. 마치 ‘시뮬레이션’처럼 미리 문제를 가상으로 겪고 해결책을 모색하여 문제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다. 소설 역시 시뮬레이션처럼 미리 인생을 이야기로 겪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이다. 백신처럼 항체를 만들기 위해 아주 극소량의 바이러스를 투여하는 일이 곧 소설 읽기다.

   예컨대, SF소설을 통해 우리는 곧 인조인간, AI가 어디까지 인간과 같아도 되는지,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타임 슬립’(time slip)은 이제 먼 미래가 아니다. 요즘 핫한 김초엽의 소설이나, 테드 창의 소설이 우리 현실과 그다지 멀지 않다.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도 마찬가지. 다양한 사랑의 양상을 통해 우리의 사랑을 고민하게 하고, 인간의 본질을 다룬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면, 우리는 슬픈 소설이나 슬픈 영화를 보고 펑펑 운다. 그러면 뭔가 후련해지는 느낌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카타르시스’(catharsis)라고 말한다. 비극을 통해 마음에 정화(淨化)가 일어나는 것(아리스토텔레스)이다. 다들 잘 아는 말이다.

텔레스형, 삶은 왜 이렇게 힘들어? (feat.테스형)

   그러나 여기에는 생각보다 깊은 메커니즘이 있다. 카타르시스는 마음의 정화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비극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다. 그 안도감에 의해 현실을 긍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카타르시스는 단순히 마음의 정화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갈 힘을 주고, 현실의 고통을 견디게 한다. 이야기 속 고통과 비극은 현실보다 과장되어 있고, 강력하니까. 이야기 속에서는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이 흔하지만, 현실은 그래도 덜 하다.

   따라서 소설은 ‘깨어 있을 때 꾸는 꿈’이다. 꿈이라서 다행인 것이다. 꿈이라서 아쉬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설을 통해 우리는 안전하게 현실로 귀환하며, 소설에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된다. 때론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결국, 현실로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을 때 꾸는 꿈을 통해 진짜 꿈을 꾸게 된다. 여기서 진짜 꿈은 우리가 바라는 것, 우리가 희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꿈은 계속 꾸어야 하니까. 꿈을 꾸지 않는 인간은 곧, 죽음을 앞두게 될 것이다.


소설은 편집점


   우리는 지금 1인 미디어 시대에 살고 있다. SNS 혹은 블로그 등으로 어느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누구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송신자이자 수신자가 되었다. 이에 따라 영상에 접근하기도 쉬워지면서 지금 세대는 영상과 이미지에 익숙하다.

   그렇다면, 이 디지털 영상시대에 소설이 과연 필요할까. 이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하는 질문이고, 모든 문학하는 사람이 스스로 질문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21.2세기는 5G, 1초에 기가바이트가 왔다 갔다 하는 초고속 시대다. 특히 한국은 유행에 엄청 민감하여, 트렌트 전환 속도가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빠르다. 학문과 직업은 수시로 사라졌다가 생겨나며, 예측도 할 수 없고 대비도 할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그렇다면, 소설과 이야기는 이 초고속 시대를 따라갈 수 있을까. 너무 빠르게 변하는데, 소설과 문학은 여전히 아날로그적이지 않은가.

   2000년대 초반 전자책이 나왔을 때, 우리는 이제 종이로 인쇄된 책이 모두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종이책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몇 년 지나면 종이로 인쇄된 책은 모두 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이야기는 텍스트가 아닌 영상으로 처리될 날이 곧 오지 않을까. 문장으로 읽는 것보다 이미지가 더 빨리 이해되니까. 언제 책을 사서 들고 다니면서 문장을 하나하나 읽는가. 이미지로 후딱 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효율적인 것, 빠른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목적지까지 빠르게 가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산책도 하면서 주변 풍경을 보는 것도 소중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해 소설은 우리에게 ‘편집점’을 제공할 것이다. 편집점. 말 그대로 컷을 나누는 지점이다. 지점들을 잘 만들어야 구성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흐름이 연속성 있게 말이다.

   소설은 우리 삶의 분기마다, 컷마다 잘 넘어가도록, 이어지도록 도와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욕망이 모방욕망임을, 그래서 잘못 가고 있음을 수시로 깨닫게 말이다. 그래서 이 편집점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점검할 수 있다. 잘못 가고 있으면 바로 유턴하거나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는 편집점. 그 편집점이 바로 소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욕망의 속도가 어마무시하게 빠르다. 적응하는 동시에 선도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인 현실. 그러나 여기서 현실과 욕망의 속도를 끊고, 자기만의 속도로 가게 하는 것이 소설이다. 예컨대, 사람들 모두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지만, 혼자 소설책을 본다고 치자. 그것도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가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다. 책 한 권을 두고 며칠에 걸쳐 읽을 수도 있고, 남들 바쁘게 무언가를 할 때, 남들과 다르게 책을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남들이 말할 것이다. 지금 한가하게 책이나 볼 때냐고 말이다.

   맞다. 지금 한가하게 책을 볼 때다. 당신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사시라. 나는 나만의 속도를 갖고 살겠다. 내 삶의 속도에 간섭하지 말라. 나는 이대로 살아도 좋으니까. 이렇게 당신이 대답했으면 좋겠다. 나도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떠났고, 저는 몇 시간 동안이나 해방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러면서 줄곧 바샤라트가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 이제 제 이야기는 제 인생을 따라잡았습니다. (테드 창,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부분(『숨』, 엘리, 2019))


   내가 좋아하는 테트 창이라는 SF소설가의 단편소설 중 한 대목이다.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다. 우리가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할 이야기가 많지만, 언젠가 내 이야기가 내 인생을 따라잡을 순간이 올 것이다.

   자, 이제 당신 차례다.



ps : <글쓰기 파내려가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460451&tab=introduction&DA=LB2&q=%EA%B8%80%EC%93%B0%EA%B8%B0%20%ED%8C%8C%EB%82%B4%EB%A0%A4%EA%B0%80%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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