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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Sep 29. 2020

6. 시가 온다

#시적인 것과 시적이지 않은 것 #불멸의 시 #리듬에 진실이 있다

시가 온다. 이미 왔다. 당신은 언제 시를 보았는가.

 


당신은 언제 시를 보았는가


   당신이 처음으로 시를 접하게 된 때가 언제이며, 최근에 시를 본 적은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학창 시절 때 교과서를 통해 시를 처음 접했을 것이다. 교과서 시. 그것이 우리가 가진 시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자 마지막 기억일 가능성이 높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가거나 취업을 하게 되면 시를 볼 일이 거의 없으니까.

   자, 그럼 질문 하나 더. 일반 사람이 어른이 되어 시를 만난다면 언제일 것 같은가?

   내 주변 선후배와 친구들에게 직접 물어봤다. 재미있는 대답이 나왔는데, 크게 3가지 답이 나왔다.




   첫째는 지하철 스크린도어! 당연하다. 지하철 타는 곳마다 있으니까. 승강장 스크린도어 시가 좋다 나쁘다, 수준이 낮다 등 여러 말이 많지만, 세계적으로 특이한 건 사실이다. 지하철마다 시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으니까. (어떤 분이 내 작품을 찍어 블로그에 올려주셨다. 커피 쿠폰이라도 보내드리고 싶다)

   두 번째는 공무원 시험 준비할 때! 슬프다. 평생 시 안 보고 살 줄 알았는데, 공무원시험 중 국어 과목이 있다. 수능공부처럼 국어공부를 해야 하며, 심지어 문제도 극강의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다.

   세 번째는 ‘갬성 뿜뿜’할 때! 대체로 요때 시집을 직접 읽거나 시를 찾아보진 않지만, 시 비스무리한 것을 읽기도 하고 쓰기도 한다. 술 한잔 하면 오글오글거리는 글이나 짤도 SNS에 올리기도 한다. 밤수성 돋으면 누구나 시인!

   이렇게 우리는 시를 만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를 써야 한다면 언제 쓰게 될까. 대체로 두 가지로 답할 수 있다.

   먼저, 시는 가을에 잘 써지고 외로우면 더 잘 써질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 것이다. 가을이 되면 호르몬 문제가 있어서 실제로 외로움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뭔가 쓸쓸하고 부족하고 허전하고 울컥하니, 무언가를 끄적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밤(새벽)! 밤이면 돋는 감성이 있다. 술 한잔 하면 257배 증폭된다. 대체로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나 역시 매일 새벽 4시쯤 잠자리에 든다. 제일 좋아하는 이 시간대를 나 역시 놓치고 싶지 않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대신 내 수명은 당신보다 짧겠지. 내가 늘 웃으면서 하는 말이다. 기분이 묘해지는 시간.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나 혼자 깨어 있다. 갬성 터지는 시간이다.


시가 온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긴다. ‘시적인 것’과 ‘시적이지 않은 것’. 더 쉽게 말해 감성적인 것, 감성적이지 않은 것이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 말이다.

   일반적으로 감성(갬성)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인적인 느낌이니, 기준이 모호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지나치는 것을 나 혼자만 감성 터졌으니, 그 감성을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나만 느끼면 그만이지 뭐.

   우리는 뭔가 특별한 시적인 것이 있다고 ‘쉽게’ 생각한다. 시적인 것을 굳이 정의해야 한다면, ‘뭔가 가슴께를 찌르르하고 아사무사하게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사무사’는 알듯 모를 듯하다는 뜻이다.

   예컨대, ‘새벽, 낙엽, 달빛, 눈물, 이별, 해질녘, 비, 우듬지, 바다, 세월, 죽음, 목련, 벚꽃, 그늘, 우산, 음악, 바람, 낙화, 사랑, 물안개, 의자, 어머니, 밤하늘, 별, 가로등…’ 등을 시적인 것(소재)으로 들 수 있겠다. 시를 처음 쓰는 습작생들의 작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재들이다. 당신에게 지금 당장 시를 쓰라고 하면, 아마도 당신은 이 중 하나를 쓰게 될 것이다. 장담한다.


엄빠는 말씀하셨지. 시몬아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프랑스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이라는 시 한 구절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저런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소재가 시를 쓰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특별한 소재가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촌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미 대부분의 소재들은 많은 시인들이 벌써 다 써버렸다! 시인 치고 목련에 대해서, 낙엽에 대해서, 어머니에 대해서 안 써본 시인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질문 하나 더. 그렇다면 시는 감성보다 더 높은 차원의 감정적 동요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감성 터진 일반인도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답은 간단하다. 시를 썼다고 생각하고 시라고 말하면 그것은 시다! 시집에 있으면 시고, 일기장에 있으면 일기다! 문제는 예술가처럼 시인이라는 자격을 어떻게 얻느냐다. (한국은 특이하게도 등단제도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감성(갬성)을 싸구려 감정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취존’(취향 존중)해야 한다. 누구나 자기만의 짊어져야 할 짐이 있고 삶의 방식이 있다. 그것의 무겁고 가벼움을 말할 수 없으며 자기와 비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감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결핍’이다.

    외로움과 슬픔, 좌절과 우울 등의 감정 문제는 대체로 결핍에서 시작한다. 결핍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①있었던 것이 없어지거나, ②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없거나, ③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가령 이성친구가 있었는데 없어지거나, 있어야 하는데 왜 없지 할 수도 있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없다! 셋 다 슬픈 일.

   결핍이 없다면 슬플 일이 없다. 그러나 결핍이 없을 수도 없다. 다 가진 사람? 그게 가능할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핍은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성(갬성)은 모든 사람이 겪는 문제다! 이과라서, 공대생이라서, 아저씨라서, 아줌마라서, 할아버지 할머니라서 갬성을 겪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조금 무딘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다.


문과생과 이과생 차이 짤. 세상에서 제일 빠른 것은 빛이지!



   이제, 시가 온다. 정말 ‘쎄게’ 오면 시인이 되겠지.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될 필요는 없다. 다만, 당신에게 시가 계속 오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당신이 잘 모를 뿐이다.


시는 누구의 것도 아닌 스스로의 것


   좋은 영화일수록 해석이 다양하다. 감독이 어느 정도 의도를 했더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마음이니까. 난해한 영화,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가 물론 있다. 예컨대,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나 나홍진 감독의 <곡성>,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 등은 한 번 봐서 이해를 다 하기 어렵다. 혼란 그 자체. 해석도 가지각색으로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 다양한 해석을 가지고 있어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그래서 매력적인 영화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에 교과서에서 시를 배울 때, 정답 찾기로 시를 해석해야 했다. 시행마다 밑줄 쳐서 상징을 분석했고 분위기가 무엇인지,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등 시를 낱낱이 파헤쳐 감상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시를 감상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학창 시절 이렇게 시를 배웠다. 형형색색 색연필과 형광펜은 거둘 뿐.  


   그동안 우리는 정답 찾기로 시를 읽었지만, 이제 시는 앞서 언급한 영화처럼 정답이 없다. 각자 자기가 느낀 대로 읽으면 그게 전부다. 다시 말해 시인의 의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시인이 어떤 식으로 독자가 읽기를 바랐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읽으라는 법은 없으며, 독자 뜻대로 읽은 것이 틀린 것도 아니다. 독자 마음이다. 시도 영화와 마찬가지. 영화처럼 즐기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의 기준은 간단하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내가 좋으면 좋은 시, 내가 싫으면 나쁜 시다. 그 시의 가치평가는 별개의 문제. 나에게 있어 그 시의 의미는 오로지 나의 것이다. 99명의 사람이 별로라고 해도, 내가 좋으면 좋은 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이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먼저,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시인이 썼지만, 소유권과 저작권을 시인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는 이제 시인의 것이 아니다. 떠나보낸 것이다. 이를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이제 저자는 죽었다. 그러고 나서, 시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작가의 간섭을 받지도 않는다. 물론, 시를 독자가 마음대로 해석하겠지만, 그것은 독자의 문제. 시는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한다. 이에 독자는 그 시를 읽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그때 시는 잠깐 독자의 것이 된다.

   시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곳에 작가든 독자든 마음대로 오갈 순 있으나, 시는 일단 스스로 존재한다. 시가 스스로 존재하는 공간을 모리스 블랑쇼라는 철학자가 ‘문학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독보적인 공간이고 미지의 세계다. 누구든 해석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나, 그 공간은 침범당하지 않고 정복당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 갔다 하거나 잠깐 맛만 볼 수 있을 뿐.


불멸의 존재, 시


  그런데 여기에 시의 무시무시함이 있다. 인간은 끝내 죽지만 시는 죽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구 상의 모든 생물체는 필멸의 존재지만, 시는 불멸의 존재다. 왜냐하면, 시는 작가나 독자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오롯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어떤 무명시인이 볼품없는 시집을 냈다고 치자. 그러고 나서 몇 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시집에 있는 시가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모든 출판물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납본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시집은 보관되어 있다. 아마 몇 년 뒤면 PDF 파일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누군가가 그 시를 인터넷에 올렸을 수도 있고, 그 책을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즉, 시는 없어질 수가 없다.

   <공무도하가>라는 고조선의 고대가요가 기억나는가. 무척 오래된 작품이다. 그 당시에 제대로 된 문자도 없었을 것이고 기록매체도 없었을 텐데, 지금까지 작품으로 남아 있다. 아마 노래로 전승되다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앞으로 몇 천 년이 지나도 남아있을 것이다.

   시는 죽지 않고 후대에 계속 전해진다. 그 시가 좋든 나쁘든, 무명시인의 작품이든 간에 어쨌든 계속 이 세상 어딘가에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무섭지 않은가. 이것이 아마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가 아닐까. 시인은 죽어도 시는 죽지 않으니까. 나는 죽어도 시가 남으니, 내가 죽어서도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내 작품을 읽는다면, 정말 멋진 일이 아닐까.


고흐의 <담배 피는 해골>(1885~6). 인간은 언젠가 죽지만 시는 영원하다.


  따라서 계속 다르게 해석되며, 그 해석을 먹고 자라는 것이 시다. 그렇게 시는 불멸로 영원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해석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므로 시를 읽을 때 당신 마음대로 읽으시라. 시는 상관하지 않는다. 전혀 상처 받지 않는다.


시인은 행과 연을 나눌 줄 아는 사람


  그렇다면 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리듬은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시를 읽고 써야 할까.

   가장 먼저 시의 리듬을 말하기 전에 질문이 하나 생긴다. 바로 시와 산문의 차이!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으나, 가장 쉽게 정의할 수 있다면, 시와 산문, 운문과 산문의 차이는 바로 ‘행갈이’와 ‘연갈이’의 유무다! 시는 의도적으로 행과 연을 나눈 것이고, 산문은 일반 문장 표기법에 의해 쓴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었다. 시인은 행과 연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고.

  예를 들어, ‘나는 오늘 잠을 잘 수 없었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시는,

 

나는

오늘

잠을 잘 수

없었다


   하고 행과 연을 나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와 산문의 차이다. 그런데 이렇게 행갈이한 문장 사이에 뭔가가 있다! 말로 할 수 없으나, 행간에 어떤 의미가 개입하려 한다. 그것은 무엇이며,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사람을 부르는 소리다 귓가를 원하는 마음이다 그런 적이 있었지 소리만으로 다정한 이를 부르던, 톡하고 부드럽게 이마를 치면 감았던 눈을 뜨고 올려다보는


눈동자


손을 담그면 따듯하게 젖어드는

두 개의 구멍 속


그런 적이 있었지 서로의 액체가 되어 헤엄치던

완벽하게 밀폐된 방을 사랑하던

(…하략…)

-이혜미「노크하는 물방울」부분(『뜻밖의 바닐라』, 문지, 2016)


   내가 아끼는 후배의 시 한 편 소개한다. 물방울이 떨어지듯 “똑, 똑” 행간을 나눴다. 시간차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올려다보는”과 “눈동자” 사이 한 칸 연갈이를 했다. 진짜로 눈동자가 올려보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바로 또 한 칸 엔터 치고 연갈이를 했다. “손을 담그면 따듯하게 젖어드는 두 개의 구멍”, 그것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일 수도 있겠다. 아랫부분에 나오는 조금은 야한 부분을 상상하게 하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해석은 자유니까. 어쨌든 문장을 산문형으로 쓰지 않고 나름의 행간을 만들어냈다. 왜 시인은 행을 나누고 연을 나눌까?

   바로, 행갈이와 연갈이는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없게 하기 때문이다. 말장난이 아니다. 곰곰이 문장을 곱씹어보면 무슨 뜻인지 당신도 금방 알 것이다.

   행간 사이에 시어가 하지 않은 말들이 숨어 있고, 말을 다 했지만,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이 반어적으로 숨어 있기도 하다. 쉽게 말해 못다 한 말들이 행간에 숨어 있는 것이다. 앞서 이혜미 시인의 작품에서 봤듯이, 행간 사이에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숨어 있다. 그 감정을 다 말하는 것은 재미없을뿐더러 다 말할 수도 없다.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황현산,『잘 표현된 불행』, 문예중앙, 2012, 6쪽.)


   최근에 돌아가신, 황현산 평론가의 글이다. 시의 문장은 짧지만,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끝까지 말하려는 것이 시라고 황현산 평론가는 말한다. 말이 부족하면 박자로 뜻을 전하려 하고, 그 박자마저 부족하면 그 부족함으로 뜻을 전하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행갈이와 연갈이는 끝까지 말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다 말하려고 하나, 다 말할 수 없어 행과 연을 나누는 것이다.


막다른 오늘 밤에는

혼자이고 싶다

어떻게든 홀로라는

거듭되는 이야기

슬픔의 뒷면을 들춰

반대쪽을 읽는다


눈을 뜨는 생각

귀를 여는 생각

나빠질 것 기꺼이

나쁘다고 쓰는 생각

이불을 뒤집어쓰면

내려앉는 속도감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울타리가 너무 많아서

목록조차 읽을 수 없다

마음은 무너지지 못해

마음으로 남는다

-김보람「밤에 하기 좋은 생각」부분(『괜히 그린 얼굴』, 발견, 2019)


   내가 아끼는 후배의 작품이다. 만약, 1연의 “막다른 오늘 밤에는 혼자이고 싶다 어떻게든 홀로라는 거듭되는 이야기 슬픔의 뒷면을 들쳐 반대쪽을 읽는다”하고 연달아 산문처럼 읽으면 어떨까.

   ‘막다른 오늘 밤에는’과 ‘혼자이고 싶다’ 사이의 행갈이가 주는 시간차와 머뭇거림을 놓치게 된다. 막다른 오늘 밤에 바로 혼자이고 싶다고 생각할까. 오늘 밤이 막다랐다고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혼자 있고 싶다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행갈이로 표현되었고, 왜 혼자이고 싶은지는 해석하기 나름.

   2연에서 ‘눈을 뜨는 생각’과 ‘귀를 여는 생각’을 붙여 쓰지 않고 행갈이를 하면서, 우리는 생각한다. 눈을 뜨는 생각은 무엇일까, 귀를 여는 생각은 무엇일까. 독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 어떤 독자는 ‘눈을 뜨는 생각’ 이 한 구절만 곱씹고 책장을 덮을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한꺼번에 밀려온다고 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망설이고 자책하며 밤을 지새운다. 그 시간이 어떤 하루일 수도 있고, 몇 날 며칠일 수도 있고, 또 오랜 시간일 수도 있다. 마음은 무너지지 못해 마음으로 남았고, 그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다. 무너진 마음, 무너지면 안 되는 마음. 그것은 독자가 읽어내거나, 아니면 영영 찾지 못할 시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리듬에 진실이 있다


   행갈이와 연갈이는 결국 시의 ‘리듬’이라 할 수 있다. 행갈이와 연갈이를 통해 리듬이 발생한다. 그것을 우리는 예전에 교과에서 ‘내재율’ 혹은 ‘외재율’로 외운 적이 있었겠지만, (내재율과 외재율은 틀린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리듬’이다.


운율을 통해 시간이 압축되고, 비유를 통해 공간이 겹쳐진다. (김인환,『비평의 원리』, 나남, 1994, 98쪽.)


   황현산 평론가와 더불어 석학이신 김인환 평론가는 운율을 통해 시간이 압축되고, 비유를 통해 공간이 겹쳐진다고 했다.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고 겹치기 위해 시는 운율과 비유를 쓴다. 그것을 우리는 큰 의미로 리듬이라 부를 수 있다. 과거를 불러오거나 미래를 당겨오거나, 여기 없는 것을 가져오거나, 여기 있는 것을 저기로 가져가거나. 리듬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왜 그럴까. 끝까지 말하려고 해서 그렇다. 하지 못한 말들이 많아서 그렇다.

   따라서 그 일이, 그 사물이 내게 무슨 의미인지 적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무슨 의미인지, 실재를 알고 싶은 것이다. 또 그게 시인에게는 좀 더 잘 보이기도 하다. 그것만 보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다 적지는 못한다. 인간의 언어는 늘 부족하고, 시인의 언어는 더 부족하니까. 그래서 행간과 그에 따른 리듬이 그 부족함을 채워주거나 부족함 그 자체를 보여준다.

   여기서 하나 더. 그 시가 내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독자. 독자는 그 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가 나에게 어떤 의미로 오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이 왜 그 시에 대해 그런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 스스로 고민하는 것, 그것이 내가 앞서 언급한 해석의 문제다.

  이제 당신은, 시의 의미가 무엇이고, 주제가 무엇이고,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등을 파악할 것이 아니라, 그 시가 왜 나한테 의미가 있는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이길래 그 시가 내게 와 닿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해석. 그것이 바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모두가 다 리듬 때문이다. 다 말하지 않아서 그렇다. 숨겨진 의미 때문에 그렇다.


모든 문장에는 리듬이 있으며, 모든 사람은 각자의 리듬을 살고 있다. 당신의 리듬은 무엇인가.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시의 리듬에 진실이 숨어 있다! 못다 한 말들이 숨어 있는데, 그것이 곧 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 못다 한 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해석할 수 없으니까. 늘 말하지 못한 것, 숨어 있는 잉여가 남아 있다. 그것이 시를 불사의 존재로 만든다.

  작가는 그것을 다 쓰려고 하고, 독자는 그것을 다 읽어내려고 하지만, 불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시의 위대함이자 무서움이다.

      시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곳에 진실이 있다.



ps : <글쓰기 파내려가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460451&tab=introduction&DA=LB2&q=%EA%B8%80%EC%93%B0%EA%B8%B0%20%ED%8C%8C%EB%82%B4%EB%A0%A4%EA%B0%80%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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