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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Sep 04. 2020

2. 글쓰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글쓰기 #사고의 물질화 #위로 따위 #글쓰기는 즐거움과 고통 사이

글쓰기란 무엇인가. 결국, 글쓰기란 즐거움과 고통 사이에 있다!



글쓰기는 통합적 언어활동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에, 글쓰기란 무엇인지 짚고 가자. 이것은 글쓰기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사전적인 의미로 ‘글쓰기’(作文, writing)는 생각이나 느낌을 글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이다. 음악이나 그림이 아니라 글로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이나 활동과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부터 ‘글쓰기’는 ‘쓰기’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사전적 정의와 당신이 글쓰기에 대해 알고 있는 개념은 이제, 삭제하시길. 이제부터 글쓰기는 쓰기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 언어활동’, 앞서 언급한 RWP(읽기, 쓰기, 말하기)가 유기적으로 순환하는 통합체이다. 예컨대 당신이 글을 쓴다고 해서, 쓰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읽기가 선행되어야 하고, 쓰면서 읽어야 하며, 결국 쓰기는 말하기와 같다. 오늘부터 우리는 글쓰기를 쓰기(writing)로만 말하지 않을 테니, 착오 없으시길.

   따라서 글쓰기란 무엇인지, 과감하게 네 가지로 나눠보았다.


첫째, 사고를 물질화하는 일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곧 글쓰기다. 글로 씌어지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곧 사라질 잡생각이다. 글로 써야 하다못해 낙서라도 된다. 그래서 메모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작가는 잠잘 때 머리맡에 메모장을 두고 꿈속 장면도 깨어나 메모한다고 들었다.


둘째, 세계를 창조하는 일

글쓰기는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그것이 개인의 특수한 체험이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겪는 감정이든 간에 하나의 (새로운) 세계다. 이 세계를 많이 갖거나 적게 가질수록 행복과 불행이 나눠질 듯하다. 현실은 따분하고 지리멸렬하므로.


셋째, 자신의 한계와 만나는 일

앞서 언급했지만, 글쓰기는 결국 두 가지 바닥을 보게 된다. 특히 우리는 글을 쓰면서 자기기만과 자기 안에 있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한계를 돌파하는 것은 그 괴물과 마주하는 일인데,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괴물과 싸우다보면 괴물을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넷째, 즐거움과 만나는 일

이것은 일종의 보상 또는 옵션이기도 하고, 이것이 전부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즐거움만 찾는다면 책보다는 다른 매체를 찾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더욱이 글쓰기의 즐거움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즐거움과 차원이 다르다. 고급지다는 말이다.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이 네 가지는 앞으로 두고두고 사골처럼 우려먹을 예정이다. 특히 이번 챕터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을 반박하는 형식으로 이 네 가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니, 눈여겨 보시길.


글쓰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1
“글 쓸 내용을 모두 생각해놓고 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글쓰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글 쓸 내용을 모두 생각해놓고 써야 하는 것 아니냐다. 대체로 사람들은 작가들이 어느 정도 이야기를 구상해놓고 혹은 거의 완성해두고 글을 써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쓰는 재능을 타고난 ‘천재’만 글을 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다! 글은 나도, 당신도, 우리도, 모두 쓸 수 있다. 그 글이 상업적으로 유행하거나 작품성의 문제는 다른 차원(운!)이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도 '농알못'이었다. 일주일 동안 특훈으로 2만개의 슛을 쏘기 전까지.  


   대부분의 작가들, 혹은 글쓰는 사람들은 약간의 아이디어만 가지고 글을 시작한다. (머리 나쁜) 나 역시 그렇다! 어떻게 이야기가 끝날지,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특히 시와 같은 경우, 시가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시인 자신도 모른다. 그래서 시가 어떻게 전개되고 끝날지 모르니, 가끔 시가 무섭기도 하고 무척 기대가 되기도 한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 모든 글이 마찬가지.

   따라서, 글쓰기는 글의 내용을 미리 생각한대로 문장을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다. 생각하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통념을 뒤흔드는 말이지만, 이 말이 진짜다. 생각이 마구 떠올라서 신나게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글을 써가면서 생각이 나는 것이다.

   당신이 글을 써보면 알겠지만, 하나의 문장을 쓰면 그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당신을 안내한다.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것이며, 좋은 문장은 항상 방금 쓴 문장 다음 문장에 있다. 말장난 같지만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좋은 문장은 항상 방금 쓴 문장 뒤를 어떻게 이어갈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와중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좋은 문장은 갑자기 그분이 오셔서 점지하는 것이 아니다. 방금 쓴 문장 뒤에 있다!

      그러므로 생각을 ‘물질화’시켜서 붙잡아 두는 일, 그것을 우리는 이제부터 글쓰기라고 부를 것이다. 사라지기 전에, 기억 저편으로 날아가기 전에 글로 남겨두는 거다. 예컨대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면 그 일을 일기나 메모로 적어두어야 그 기분을 보다 정확히 기억할 수 있으며,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글로 남기지 않으면, 대충 느낌적인 느낌만 기억에 남을 뿐,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글쓰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2
“먹고 살기 바쁜데 글이 무슨 소용이 있나?”


   문학이나 글쓰기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따라붙은 오해가 있다. 아니, 본질적인 질문이다. 먹고사니즘이 현재 우리 삶의 가장 큰 화두이며 문제인데 굳이 (돈 안되는) 글을 써야하느냐 하고 말이다. 결국, 머니머니해도 머니인데 한가하게 글‘이나’ 쓰고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는 결국, 문학 혹은 글쓰기가 실용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를 원한다. 학창시절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는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대학생 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는 자소서를 잘 써서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 직장생활 중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는 승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문학과 글쓰기는 원래 ‘무용’(無用)하다. 무언가를 얻으려고 글을 쓰거나 읽는 것이 아니다. 그저 쓰고 읽을 뿐이다. 읽어야 할 이유, 써야할 이유는 각자에게 있다. 물론 돈이 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책을 써서 부자가 된다? 거의 불가능하다. 나도 지금 이 책을 쓰고 시를 쓰지만, 책으로 돈을 벌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안 까먹으면 다행. 국문학자 김현은 이런 문학의 기능을, ‘무쓸모의 쓸모’ 또는 ‘무용함의 유용함’과 같은 아포리즘으로 설명하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더 많이, 더 빠른 속도로 일할 때, 그리고 더 많이 생산할 때, 우리가 더 나은 인간이 된다고 믿으라 강요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고전을 읽는 순간, 다시 말하면 할 일이 너무 많아 정신 없이 지내는 중에 소중한 시간을 내어 위대한 사상을 깊이 생각하고 수천 년 동안 계속된 위대한 대화에 참여하는 순간, 우리는 이 시대의 물결에 저항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자신의 성취물에 의해 규정되도록 놔두길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대신,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지 않는 조용한 정신의 발전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수잔 와이즈 바우어, <독서의 즐거움> 중에


   바우어(Susan Wise Bauer)에 따르면, 독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결에 저항하는 일이다. 우리의 가치가 눈에 보이는 물질,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가시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싶지 않다. 예컨대,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우리가 들고 있는 가방의 브랜드로 우리의 가치를 평가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문학과 글쓰기는 자본주의와 쓸모를 반격하고 저항한다. 모두가 보란듯이 소위 대기업에 취업해서, 혹은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차를 타고 학군 좋은 도시에서, 몇 십억하는 초호화 아파트에 살며,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하는, 그런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자낳괴’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돈 벌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니까!


우리는 얼마를 벌어야 그만 벌어도 된다고 생각할 까. 난 이 땅에 돈 벌려고 태어나진 않았다(고 믿는다).


   따라서 문학 혹은 글쓰기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자 글이다. 글이 왜 필요하냐고? 그 질문에 대한 답 자체가 바로 글이다. 쉽게 말해, 글이 어떤 기능을 가져야 하고,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것을 질문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글이라는 말이다. 정답은 없다. 글은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가 있음을 질문하게 한다. 글 자체가 질문이다!

   이 질문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것이자, 우리의 세계가 제대로 된 것인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따져보고 또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이다.

     물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은 예술의 영역에도 해당된다. 나의 문제, 세계의 문제, 기타 여러 문제들을 고민하고 사유하면서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시인은 시로, 소설가는 소설로, 뮤지션은 음악으로, 화가는 그림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다. 예술은 우리의 세계와 체계를 전복하기도 하고 뒤흔들며 모순을 지적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크게 두 가지 영역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하나는 우리의 세계, 또 하나는 예술의 세계. 물론 예술의 세계가 곧 우리의 세계이므로, 우리의 세계에 영향을 주므로 부분집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글을 왜 쓰냐고? 먹고 살기 바빠서 죽을까봐 쓴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삶의 속도를 우리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으면 한다.


글쓰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3
“글은 솔직하게 써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소설은 ‘허구’니까 그렇다고 치고, 에세이나 시 혹은 여러 글들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글에서 말하는 사람, 화자와 작가가 100% 동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일단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물론, 망막에 맺힌 상을 그대로 컴퓨터상에 옮기면 사물과 100% 같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단순히 보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눈은 그대로 시각 정보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판단의 문제가 개입한다. 저 사물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내가 저 사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는지, 하다못해 저 사물이 얼마인지 등, 판단의 문제가 개입한다. 다시 말해, 100% 객관적인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A일 수도 있고 B일 수도 있다. 아니면 C일  수도 있다. 우리는 늘 틀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오류의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글을 쓰는 작가도, 글을 읽는 독자도 잘못 쓰고 잘못 읽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더 정확히 말해, 정확히 쓴다는 것, 정확히 읽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솔직하게 쓸 수도 없고, 솔직하게 읽을 수도 없다. 아니, 솔직하다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 전체를 보고 싶지 않다.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글로 쓰게 된다. 자기기만. 그렇다. 기본적으로 글은 자기기만이다. SNS를 쉽게 예로 들 수 있다. 젠체하거나, 똑똑한 척하거나, 예쁜 척하거나, 시크한 척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설정하여 그 캐릭터에 맞는 글과 사진을 올린다. 허위이자 자기기만이다.

   예전에 <조커>라는 영화를 참 인상깊게 봤다. 조커가 처음부터 조커는 아니었다. 물론 영화에서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는 과정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어쨌든 자기 안의 괴물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다. 처음부터 아서 플렉은 조커, 괴물이 아니었다. 노모를 봉양하는 착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점점 주변 환경이 아서 플렉을 조커로 만들어간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동안 무의식 속에 숨겨진 조커가 드디어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글쓰기는 내 안의 조커를 발견하는 일이다. 물론, 확인만 하고 다시 숨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 글을 쓸수록 우리는 자신이라는 괴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글이라면 더더욱 포장할 것이다. 착실한 사람, 긍정적인 사람, 성실한 사람 등등. 그러나 모두가 가면이다. 거짓말이다.

   글을 쓸수록 나는 딱 한 가지의 사실을 발견한다. 나는 속물이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점. 그러나 보여주기 싫고, 나 또한 내 추한 민낯을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예쁘게 글로 포장한다. 그러나 정말 좋은 글은, 그런 자기의 허위와 괴물을 모두 드러내는 글이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글을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바닥, 자신이라는 괴물을 얼마나 드러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솔직하게 쓰는 일에도 가면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솔직을 가장한 거짓말이 제일 경계해야할 부분이다!

   우리가 써야할 것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fact) 아니라, 우리의 진실(truth)이다.


글쓰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4
“글은 우리를 위로해준다?”


   몇 년전에 ‘청춘’이라는 주제와 관련한 책들이 미친듯이 팔린 적이 있다. ‘불안하니까 청춘이다’라고 하면서 청춘예찬을 한 책들이다. 요즘 오프라인 중고서점에 가면 제일 많이 꽂쳐 있는 책이기도 하다.

   두 가지 의미가 있겠다. 진짜 많이 팔렸거나, 보관할 정도로 퀼리티 있는 책은 아니거나. 나도 그런 책들을 읽어 보았지만, 청춘의 아픔이 책 한 권으로 위로가 될까? 솔직히 나는 이런 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픈 증상과 원인이 다 다른데, 청춘이기 때문에 아프다? 너무 쉬운 처방이 아닐까 한다.

   나는 올해로 15년간 출판사에서 일했으니, 출판시장 트렌드를 그래도 왠만큼 잘 알고 있는 편이다. 여전히 ‘위로(힐링)’와 관련된 책들이 서점가를 지배하고 있다. 책을 읽어서 힐링이 되거나, 책을 써서 힐링이 되거나. 위로받을 일이 실제로 많기는 하지만, 과연 글을 쓰고 읽으면 위로가 될까?

   기본적으로 위로의 매커니즘은, 피해자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우리는 피해받았으니 위로받아야 한다는 전제가 바로 그것이다. 위로받을 일이 없으면 위로가 해당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 분위기가 이렇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로부터, 대학생은 부모세대로부터 피해를 받았다는 이른바 ‘세대책임론’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조국사태’와 관련하여 ‘386책임론’이 급부상했다. 90년생을 비롯한 젊은 세대가 386세대의 적폐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말이다.


중앙일보 기사를 보라. 386세대가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90년생도 곧, 후대에게 공공의 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현실은 정말 고통스럽다. 345% 인정한다. 그러나 ‘위로의 매커니즘’은 싫다! 위로의 매커니즘은 모든 문제가 남의 탓이라는 것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고통은 기성세대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잘못에도 기인한다. 모든 문제가 남의 탓이면, 개선할 여지도 방법도 없다. 그러면, 그냥 그렇게 포기하고 고통스럽게 살면서 값싼 위로나 받으며 살아야 할까. 나는 싫다. 나는 세상이 잘못 되었으면 바꾸고 싶고, 문제가 있으면 최대한 해결하고 싶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지!

   더욱이, 소위 말하는 ‘꼰대’들은 이렇게 말한다.

   ‘글과 문학은 전무후무하게 새롭고,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세상을 안정시키고, 지혜와 덕을 쌓게 하며, 깨달음을 선사하고, 깊은 감동을 줘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도 궁서체로. 물론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맞는 말도 아니다. 새롭지 않을 수 있고, 진리가 아닌 소소한 것을 추구할 수도 있고, 세상을 혼돈에 빠뜨릴 수도 있고, 지혜나 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깨달음이나 감동도 신경 안 쓰는 글을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다. 그것이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즐겁기만 해도 된다고 본다.

   글쓰기란 무엇인가의 네번째 항목, 바로 즐거움. 다 필요없이 즐거움 하나만 있어도 상관없다. 꼭, 사고를 물질화시키거나, 세계를 창조하거나, 자신의 한계와 만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즐거우면 됐지 뭐.


신이나-신이나-엣헴-엣헴-신이나. 즐거우면 그만이다.

   

   글을 읽고 쓰면서 웃고 울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게 더 건강한 거다!

   결국 글이란 즐거움과 고통 사이에 있다. 진자의 추처럼 두 사이를 오간다. 선택은 당신의 몫. 즐거울 수도 있지만 (엄청)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당신 하기에 달렸다. 참고로 나는 고통 쪽을 선택했다. 변태는 아니지만, 고통스러울수록 오는 그런 짜릿함이 있다.

   자,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ps : <글쓰기 파내려가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5460451&tab=introduction&DA=LB2&q=%EA%B8%80%EC%93%B0%EA%B8%B0%20%ED%8C%8C%EB%82%B4%EB%A0%A4%EA%B0%80%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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