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극배우 B씨 Aug 20. 2020

"한 달만 집구 할 시간을 줘, 애들 데리고 나갈게"

이혼 전 이야기 #.1

애들 아빠와 합의를 봤다.

스물세 살 때부터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시작한 9년의 결혼생활 동안에 남은 건 아이 둘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빠진 부부 사이였다.


수없이 많은 사건과 인내와 불신, 그리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이 난무하던 우리의 결혼생활에 남편은 '엄마랑 사이가 안 좋은 여자와는 한 집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 자신의 결론이라고 했다. 이혼은 당연한 것이고 그에 앞서 한집에서 얼굴도 보기 싫으니 먼저 나가라는 소리였다.


"죽은 듯이 지낼께 그럼. 이제 어머니한테 말대답도 안할께. "

금이 갈대로 간 부부 사이, 남편의 외도나 고부갈등, 시가 식구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내 몫일뿐,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가정은 유지하자고 부탁했다. 지금껏 그랬듯이 부부로서 정이 없어도 되고, 당신이 다른 여자를 계속 만나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 가정은 지키자고 했다. 남편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싫어."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을 뿐, 솔직히 가정을 지키자고 부탁한 것도 반반의 마음이었다. 가정을 유지한 다고 해도 나는 '너 같은 것 따위'에게 절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정한 터였다.


나는 아이들을 지킨다는 그 약속 하나만으로 남편, 시가에게 거지 같은 기분을 느끼며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했을 것이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이미 세상에 내놓은 아이들에게 반쪽 가정을 줄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예상한 대로(아주 고맙게도) 싫다고 말했다.


"알았어.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그럼 한 달만 집구 할 시간을 줘.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게."




남편은 처음에 아이들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시어머니가 손녀들에 대한 애정이 너무 크다는 걸, 손녀들이 없다면 어머니가 너무나 힘들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아이들 없이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가 이 집에서 나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못 박았더니 그제야 아이들을 양보했다.


핏줄을 지키는 것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보기 싫은 마누라를 내치는 것이 더 중요했던 사람.

그 한결같은 어리석음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외도를 한 것도(성행위를 보았느냐며 끝까지 아니라고 했지만), 술을 먹고 늦은 밤 귀가하여 자고 있던 아내를 때리고 아파트 복도로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 이웃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해자로 연행되어 갔던 것도 남편이었다.


위자료나 생활비 뭐 그런 것은 당장 안중에도 없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시가 식구들까지 주말, 명절에 감당해야 했던 결혼생활을 끝내게 해 주겠다는데, 더군다나 내 인생의 1순위가 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올 수 있다는데 망설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당장 아이들의 상처와 양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보다 여기를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속도 없이 설레기까지 했다.


맞벌이를 했지만 모아둔 돈도 없고 집 구하라고 돈을 줄 사람도 아니었다. 집 구할 돈 좀 달라고 말하기도 싫었지만 한다 해도 '그럴 능력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려고 하나'라고 빈정거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 길로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 대출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았다.


"3,000만원 가능하십니다."

3천만원이었다. 

만약의 질병이나 사고에 대비해 가입해두고 착실히 납입했던 보험에서 빌려준다는 금액이 말이다. 나에겐 질병이나 사고보다 더 긴급한 일이었다.

절실한 돈이었다.


대출받을 돈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3천만원을 들고 퇴근 후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가구주택이나 낡아빠진 빌라 위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손에 쥔 3천만원으로 부동산 중개소에서 소개한 집은 반지하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다가 낡은 빌라 1층 전셋집이 있다고 해서 반갑게 가보니 아래층 반지하에 무속인이 영업을 하는 곳이라 했다. 

빌라 입구에서부터 대나무와 요란한 색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며칠을 발품을 팔았다.


이 돈으로는 턱도 없구나, 좌절할 즈음 달동네 오르막에 위치한 다가구 1층 3천만원짜리 전세가 하나 나왔다. 홀로 사시는 할머니가 쓰셨던 집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괜찮았다. 

돈에 맞추어 집을 구했다는 사실이 마냥 기뻤다. 계약서를 쓰고 키를 받아서 문을 열어보았다.


좁은 방이 2개, 그 방보다 더 좁은 거실 겸 주방.

세면대도 없이 세탁기 하나를 놓으면 겨우 쭈그려서 세수를 해야 하는, 위로 손을 들면 천정에 손이 닿는 낮은 화장실이 있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없었다. 

직장에서 교대근무를 하던 나는 근무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전셋집으로 달려왔다.


집 보수를 맡길 돈이 없었다.

하지만 아파트에서 깨끗하게 키워왔던 어린아이들에게 최대한 거부감 없는 집이어야 했다.

아빠와 할머니가 떨어져 엄마랑만 살게 될 집인데 최대한 낯설지 않아야 했다. 아직 한 달이란 시간이 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집수리를 혼자 하기로 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