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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20. 2020

홀로 둥지를 만들다

이혼 전 이야기 #.2

낯선 그 동네에서 페인트 가게와 철물점과 생활용품점을 찾았다.

도배장판은 아직도 멀쩡하다며 집주인이 해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페인트 가게에 가서 방문 3개를 칠하는데 얼마나 드냐고 물어보니 인건비에 재료값까지 30만 원 가까이 불렀다. 예상은 했었지만 너무 비쌌다.


페인트와 붓만 사들고 달동네 오르막길을 타박타박 걸어 올라왔다. 아쉬운 대로 갈색의 오래된 방문들을 흰색으로 3번 페인트칠을 하고 세월의 흔적으로 노랗게 벗겨진 방문 손잡이를 바꾸었다. 

빨갛게 녹슨 싱크대 경첩을 일일이 떼어내고 교체했다. 녹이 눌어붙어 십자 나사가 어렵게 어렵게 풀렸다. 군데군데 죽은 곤충을 털어냈다.

오래된 욕실 타일 위에 천 원주고 산 미끄럼 방지 스티커를 붙였다. 아직은 어린아이들의 보폭을 생각해 촘촘히 붙였다. 이럴 땐 욕실이 넓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샤워기 줄고 헤드를 바꿔 달았다. 새 샤워기로 아이들을 씻기고 싶었다.

생활용품점에서 산 어설픈 중국산 십자드라이버와 망치를 가지고 하루 종일 빈집에서 이곳저곳을 수리했다. 손에 빨갛게 물집이 생기고 굳은살이 박히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8월의 끝자락이었다.

앞뒤로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좁은 집에서 선풍기는커녕 부채 하나 없이 순수한 내 노동력과 굵은 땀방울을 그렇게 3천만 원짜리 전셋집에 쏟아붓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마무리하자, 어서 하자, 이곳으로 탈출해 올 수 있어. 빠져나올 수 있어.'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었다. 잠시도 있고 싶지 않은 곳에 하루라도 더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차라리 무서웠다.


뜨겁던 한낮 태양이 조금씩 수그러질때즘 배가 고파왔다.

전날 밤샘근무를 하고 곧장 이곳으로 퇴근해서 집수리를 하느라 밥을 건너뛴 것이 생각났다. 시원한 냉면이 먹고팠지만 그보다는 저렴했던 옥수수 2개를 3천 원에 사서 낡은 싱크대에 등을 기대고 털썩 앉았다.


정면에 보이는 아직은 낯선 이 집의 벽지, 그 규칙적인 패턴을 멍하니 쳐다보며 옥수수를 한알씩 한알씩 뜯어물었다.


... 괴롭게 이어지고 있는 결혼생활과 현재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축복 속에서 올렸던 결혼식, 내가 선택한 사람에 대해 그 어떤 반대도 하지 않으셨던 엄마... 복잡한 감정이 밀려오자 흐느껴 우는 것처럼 어깨가 들썩거렸지만 눈물은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그저 어깨만 이리저리 떨렸다.

땀을 너무 쏟은 탓일까, 더 이상 몸에서 나올 물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직 인사도 나누지 않은 아랫집 세 들어 사는 아저씨가 신기해 보였는지 오며 가며 우리 집을 힐끗거렸다. 이 낡은 집에서 새댁이 몇 날 며칠을 뚝딱거리고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봐왔으리라.  인사를 하고 싶은 생각도, 기분도 아니었다. 이 동네에서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철저하게 은둔하리라, 출퇴근 말고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으리라, 우리 아이들도 절대 보여주지 않으리라.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혼자 결심하고 다짐했다.


어느덧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루 중 가장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늙은 소처럼 죽기보다 가기 싫었지만 아이들을 보려면 들어가야 하는 곳.

시어머니가 송곳 같은 눈빛으로 쏘아보며 "어이구 어이구 쯧쯧!!" 하며 나를 향해 뱉는 야멸찬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곳,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기분으로 버텨야 하는 그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해 심호흡을 크게 3번 했다.

손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하루 종일 집수리를 하느라 몸에서는 쉰내가 났다.

방금 전까지 근심으로 얼룩졌던 얼굴일지라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엄마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들에게 과할 정도의 명랑한 컨셉과 밝은 미소를 보여주어야 했다.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전 01화 "한 달만 집구 할 시간을 줘, 애들 데리고 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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