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이야기 #. 72
"아빠가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이제 와서 그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야?"
작은 아이는 격앙된 말투였다.
대학생이 된 첫째가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이제 집에는 둘째와 나, 이렇게만 남았고 덕분에 대화가 더 늘었다.
감사하게도 작은 아이는 사춘기랄 것도 없이 아주 평온하게 고등학생의 시간을 지내고 있다.
그동안 엄마 앞에서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제동을 걸었던 큰애가 없자 작은 아이와 '아빠'에 대해 '우리 가족, 부모의 이혼'에 대해 나누는 대화의 강도나 밀도는 그 수위가 높아질 때도 있었다.
물론 나는 긍정적인 시선이었고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어렴풋이 느꼈지만 꼬집어 말할 수 없었던 집안 분위기와 아빠가 없던 어린 시절에 대한 궁금증 내지는 분노나 서운함을 둘째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이렇게 물어보고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엄마 곁에 있을 때 다 쏟아내고 후련해지기를 바랐었다.
"그러니 내가 아빠와 살지 않은 건 차라리 다행이었어."
아이의 이 한마디가 숭늉으로 식사를 마무리하는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이기적인 걸까.
대화말미에 꼭 나오는 푸념 섞인 이 결론한 줄이 내게는 개운한 숭늉의 역할을 했나 보다.
나는 참 유치하다.
은근히 기대했으면서도 기쁘지 않은 척하는 내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참... 아직 어른은 아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리고 한편으론 겁이 난다.
아이가 엄마 비위를 맞추느라 선택한 아부성 멘트가 아닌가 하는 불안함과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한마디에도 유쾌하게 웃거나 심하게 맞장구를 칠 수가 없다.
어쨌거나 나도 아이들에게 이혼부모로서의 50%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는 이번 여름방학 때에도 아빠의 진가(?)를 보고 왔다며 윗입술 한쪽을 삐딱하게 올렸다.
작년 여름방학을 마지막으로 이제 방학이 되어도 아빠네는 가지 않겠다고 했던 작은 아이였다.
하지만 일찍 방학을 시작한 덕분에 아빠네 미리 가 있는 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방을 쌌다.
아빠집에 절대 이틀이상은 머물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아빠네 집에 가서 저녁을 먹던 날, 늘 그랬듯 반주에 적당히 취기가 오른 아빠입에서 우연히 '엄마'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고 했다.
"니들 엄마가 그건 잘했는데..."
"엄마가 그럴 때는 이렇게 이렇게 잘했는데..."
아이 표현대로라면 아빠의 그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말투와 표정이 정말 킹 받는다고 했다.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서린 얼굴로 아이는 적당한 단어를 찾는 듯하다 말했다.
"... 엄마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그런 장점이 있었다면 같이 살 때 아빠가 잘했어야지. 그랬으면 좋았잖아. 그때 못해가지고 이렇게 다 따로 살면서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어차피 결과가 이런데 옛날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 짓는 것도 보기 싫어. 그러면서 아빠가 애도 잘 못 키우고 혼자만의 생각에 꽉 차서 고집쟁이로 저렇게 사는 걸 보면 더 싫어."
울지만 않았지 설움이 복받쳤을지도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는 부모가 결정한 선택에 대해 끝까지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을까...
후회하는 말을 듣고도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좌절감을 얼마나 더 크게 느꼈을지 나는 감히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방학기간 동안 아빠네 가 있는 큰아이가 언젠가 전화해서 아빠와 말다툼을 했다며 씩씩거렸다.
아빠는 누가 정했는지도 모를 혈액형별 성격해석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난 아빠가 현실도 모르고 자기가 믿는 것만 말하는 게 너무 싫어.
어제도 술 먹고 자꾸 허황되고 이상한 말만 하길래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아니라고 콕 찍어서 이야기해 줬지!
그랬더니 아빠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나더러 엄마랑 성격이 똑같대, 참나.
너도 B형이고 네 엄마도 B형이라서 성격이 이렇대! 그래서 A형인 아빠가 많이 참고 이해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냐고. 아빠나 되니까 너네 엄마 견디고 살았던 거래!
그래서 내가 뭐랬는지 알아?
아빠가 지금 그렇게 오냐오냐 키우고 있는 얘도 B형인 거 아냐고. 그리고 무슨 혈액형 타령이냐고, 요즘은 MBTI 지!"
심각해지려던 분위기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MBTI에 나는 웃음이 빵 터졌다.
그리고 아이에게 대신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 엄마가 성격 이상하고 하필 B형이라서 늦었지만 미안하다고 전하렴. 옛날에 엄마 성격 참아주느라 고생 참 많으셨다고 말이야."
아휴...
한숨이 절로 푹 쉬어진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적어도 내 기억에는 "네 아빠 닮아서 그러니? 어쩜 하는 짓이 네 아빠랑 똑같니?"라는 '아빠 탓 잔소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아이들은 내게 천금보다 소중했고 아빠랑 닮았다느니, 똑같다느니 하는 소리를 할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물론 외모에서 조금씩 보이는 애들 아빠 모습이 있었지만 아이들과 그 사람은 혈육으론 묶일지언정 각자가 다른 존재였고, 내가 키우고 있는 이 작은 존재들은 나에게 그저 귀하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 역시 우리를 키우실 때 '아비 닮아 저 모양이다.'라는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다.
차례차례 사춘기를 지나며 엄마 속을 무던히도 썩였을 우리들에게,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 아빠 성격이나 고집을 갖다 붙여 욕하지 않으셨다.
엄마에게 딸은 딸, 남편은 남편이었으리라.
그런데 아빠라는 사람이 좋은 말만 해줘도 모자랄 판에 혈액형을 갖다 붙이며 -적어도 자신이 제일 미워하고 있을- 너희 엄마랑 닮아서 그렇다니! 맙소사...
한편으론 나도 반성한다.
혈액형에 선입견을 두진 않지만, 전남편과 띠가 같거나 고향이 같은 사람은 나도 모르게 거리를 두게 된걸 말이다.
업무적으로 마찰이 생기는 사람이 있으면 나이와 고향이 어딘지 궁금해지고 하필이면 전남편과 같다는 걸 알게 될 땐 '그러면 그렇지! 나랑은 앉맞아.'라는 유치한 결론을 내려버리는 나다.
전남편은 딸에게 반이나 섞인 나의 DNA가 싫겠지만 나는 내 형편없는 DNA마저도 훌륭히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건강하게 잘 자라온 내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신기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