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이야기 #.74
올여름은 유난히 덥다.
에어컨 아래에서도 갑자기 훅 더워져서 땀을 뻘뻘 흘리는 엄마를 보고 아이들은 "갱년기 아니야?"라며 놀리곤 한다.
땀이 흐르는지도 몰랐는데 옷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건강이 안 좋아진 건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되는 건가, 아무튼 세월에 장사 없네~라고 중얼거린다.
세월.
시간.
많이 흐른 것 같다.
큰 아이는 대학교 2학년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고 둘째는 고3 수험생의 과정을 착실하게 밟고 있다.
방학이라 집에 와 있는 큰아이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릴 적 사진을 꽂아둔 앨범을 자주 꺼내서 들여다본다.
키득거리며 넘기다가 휴대폰으로 찍어둔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추억인가 보다.
그리고 놀리듯 이야기한다.
딸이 기억하는 엄마의 10년 전 모습을.
자신들을 데리고 나와 낯선 타지에서 직장 다니며 분주하게 삶을 꾸려가던 엄마의 모습을.
뭐가 그렇게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표정이 그랬냐고, 사소한 것으로 화를 냈냐고,
왜 늘 피곤해했냐고.
'글쎄다.... 내가 그랬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기억해 내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나마 사력을 다해 이곳에 지난 이야기들을 써 내려갈 때가 좀 더 힘이 있었나 보다.
지금은 그때처럼 분노하지도 않는다.
아빠 이야기가 나오면 일부러라도 먼저 좋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원망과 분노가 가슴에 물들어 있을 때 스스로 얼마나 피폐해지고 썩어가는지 알아서일까, 아이들은 저 작은 가슴에 화가 없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돌아보니
직장생활은 25년째 이어가고 있다.
혼자 아이들을 키워 온 것은 14년쯤 되는 것 같다.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다.
모든 가장들은 그렇게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아가니까.
내 삶에서
아이들이, 가족이 먼저여서 다행이고
지레 겁먹고 포기하지 않았던 나라서 다행이다.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
내가 과연 백기 들어 전남편에게 보내지 않고
끝까지 키울 수 있을까?
이 직장에서 잘리지 않고
아이들 학비를 벌고
저축을 해나갈 수 있을까?
그때까지 몸과 마음 모두 아프지 않고
잘 버틸 수 있을까?...
단순한 물음표가 아니라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압도하는 이 무시무시한 책임 앞에서 밤잠을 설치고 고민하고 몸부림치던 날들이 실제로 있었다.
아이들의 어릴 적 앨범을 보면, 그 사진을 찍던 날 나의 마음이 보이고 상황들이 보이고 지금보다 한참이나 젊었던 불안한 새댁이 보인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것이 벌써 '과거'가 되었고, 예전 사진에서 그 느낌을 소환해 와도 전처럼 심장이 벌벌 떨리고 덜컥 주저앉고 싶은 증상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
그 당시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들릴 수가 없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그 시간을 견디고 견뎌서 '옛 일'로 만들고 나서야 쓸 수가 있더라.
이렇게 과거가 되어서야 그나마 말할 수가 있더라.
힘든 일은 늘 있다.
하지만 매일이 힘들지는 않다.
그래서 하루 자고 나면 또 살아갈 힘을 얻고,
오후쯤 꼬꾸라지더라도 다시 또 자고 일어나면
하루를 살아갈 힘이 생겨난다.
폭염도 한풀 꺾이는 때가 오고
소나기도 결국 그치더라.
이 모든 것은
겪고 나서야 보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