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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Oct 01. 2020

엄마도 소리 내서 울어 이제(1)

이혼 후 이야기 #. 18

아버지와 밭에 일을 나가셨던 엄마가 리어카를 끌고 저 멀리에서 달려오시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가 안보였다. 


'엄마가 왜 혼자 오지?'


리어카에 멍석이 덮여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장화를 신고 일하러 나가셨던 아버지가 그 안에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데리고 큰 병원으로 가셨다.

아버지는 뇌수술을 받고 구급차에 실려 일주일 만에 다시 집에 오셨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계셨다.


의사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산소호흡기를 뗐다.

약속한 듯이 일제히 사람들이 울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초점 없이 허공만 응시하던 엄마가 실신을 했다. 

엄마를 새댁이라고 부르던 동네 아줌마들이 엄마 뺨을 세차게 때렸다.

엄마를 끌어안고 울었다.

방금 죽은 우리 아빠보다 그냥 쓰러진 것뿐인 엄마 앞에 엎어져서 통곡을 했다.


엄마가 41살이었다. 


우리 6남매 중 막냇동생이 3살이었고 아들을 잃게 된 할머니가 계셨다.




경운기로 그나마 수월하게 짓던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다.

남들이 트럭, 경운기, 트랙터로 농사를 지을 때 엄마는 외롭게 리어카를 끌었다.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엄마는 남의 집 품앗이를 다니면서 일당을 벌어오셨다.


과수원에 일을 나가는 날이면 군데군데 병이 든 사과를 얻어오셨다. 

벌레가 먹긴 했지만 내 머리만 한 사과가 반가웠다.


품앗이로는 6남매와 홀시어머니를 먹여 살리는데 한계가 있었다.

엄마는 월급이 나오는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내가 기억하는 일만 해도 여관 청소, 급식시설, 정육식당이었다.


엄마는 정육점을 겸하는 3층짜리 고깃집 식당에 십 년 가까이 다니셨다.

새벽에 나가 밤 11시가 넘어서 들어오셨다.


반찬 한두 가지를 해놓고 아직 자는 우리들을 뒤로하고 새벽에 집을 나섰다.


식당 주인집 아이들이 우리와 또래였다.

엄마는 우리가 잠을 깼는지 밥을 먹는지마는지 모르는 채

주인집 아들이 학교 가기 전에 계란 프라이를 해주고 아침을 챙겨줬다.


3층 계단을 불판을 들고, 반찬 쟁반을 들고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겨울에는 발등이 얼어 퉁퉁 부었고, 락스에 찌든 손은 늘 빨갛고 피가 났다.


엄마는 한 번도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한 번도 우리 앞에서 신세타령을, 원망을 하지 않았다.

딸이 다섯이었는데 '이년 저년'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겨울

6살이었던 남동생이 갑자기 경기를 일으켰다.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동생을 둘러업고 병원에 갔다.


남동생은 며칠 뒤 산에 묻혔다.

엄마가 실신을 했고

동네 아저씨들이 동생을 묻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어디 묻혔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내 아들, 내 손자 다 잡아쳐먹은 년!

돌아가신 아버지는 외동아들이었다.

남동생도 외동이었다. 집에 남자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할머니는 엄마를 늘 그렇게 '아들, 손자 잡아 처먹은 년.'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으셨다.

그때는 그렇게 보였다. 

엄마는 화를, 원통함을 논에서 밭에서 풀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새벽이고 밤이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 농사도 지으셨다.


"어디서 남자 만나고 돌아다니다가 이제 오는지!"

"아들도 죽고 손자도 죽고  조상 볼 면목도 없고 살아서 뭐하겠냐. 쥐약 먹고 죽어버려야겠다!"


식당일로 파김치가 되어 늦은 밤 들어오는 엄마에게 할머니는 악담을 했다.

말로만 죽는다 죽는다 하는 시어머니랑 살았지만 엄마는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었다.




"내 자전거 타는 방법 좀 가르쳐 줄 수 있나?"

"왜? 자전거 배우게?"

"응. 걸어서 매일 출근할라니 오며 가며 시간이 너무 낭비된다."


바쁘게 새벽밥을 지어놓고 뛰다시피 해야 하는 출근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엄마는 오십이 다되어서 자전거를 배우겠다고 하셨다.


차가 없는 늦은 밤 엄마와 큰길에 나갔다.

"엄마. 페달을 보지 말고 저 앞을 봐. 내가 뒤에서 잡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엄마랑 며칠 밤을 큰길에 나갔다.

자전거 브레이크도 못 잡던 엄마는 이리저리 넘어지는 게 다반사였다.


"엄마, 자전거 배울 수 있겠나? 내가 볼 땐 안될 것 같은데... 자전거를 넓은 길에서 겨우 탈 수는 있겠지. 그런데 도로에 나가면 차오니까 옆으로 비켜서 탈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다."


나이도 있고 엄마는 힘들 것 같았다. 

괜히 어설프게 타고 다니다가 사고 날 확률이 더 커 보였다.


"이제 니는 들어가 자라. 내일 학교 가야 하니까. 엄마는 조금만 더 타보다가 들어가마."


엄마는 밤새도록 컴컴한 길에서 넘어지지 않는 연습을 하셨다.

가난했던 시골에서 배운 것이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고 남편이 죽고 없는 여자에겐 모든 것이 다 도전이었고 그 도전은 자식들 입에 풀칠하는 일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엄마가 호탕하게 웃으며 시퍼렇게 멍든 무릎을 보여줬다.

혼자 연습을 하다가 자전거와 함께 논으로 처박혔다고 했다.


"거봐라 엄마. 안된다카이! 더 다치지 말고 고만해라 이제. 자전거가 어디 쉬운 줄 아나!"


하나뿐인 내 엄마가 다치는 것이 속상했다. 

엄마는 무릎을 절뚝거리며 걸어서 출근을 하셨다.


일에 녹초가 되어 퇴근한 날에도 엄마는 자전거를 끌고 큰길로 나가셨다.

수많은 밤들을 길가에서 보내셨다.


한 달 뒤 엄마는 자전거를 끌고 출근을 했다.

자전거 뒤에 물건을 싣고 타기도 했다.


내가 하겠다는데 안 되는 기 어딨노!

엄마는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는 몇 안 되는 여자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일 년 사계절을 타고 다니셨다.


겨울에는 장갑 두 개를 겹쳐서 끼고 타셨다.

내가 성인이 되어 돈을 벌면서 가장 먼저 사드렸던 것이 스키 장갑이었다.


잊을 만하면(엄마는 먼저 가슴에 묻은 아들을 잊을 수도 없었겠지만)

할머니는 죽고 없는 아들과 손자 이야기를 던졌다.

며느리가 다 죽였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할매! 할매는 아빠 죽은 거 미치도록 슬프제? 우리 엄마도 아들이 죽었잖아. 할매나 엄마나 똑같이 다 자식이 죽었잖아. 근데 왜 자꾸 엄마한테 그런 소리 하는데? 할매 마음만 아프고 엄마 마음은 안 아프나? 어? 할매 미쳤나!"


"저 망할 년이 주둥이 놀리는 거 봐라! 쓸데없는 가시나 저거!"


"왜 쓸데없는데? 우리가 왜 쓸데없는데? 여자라서 쓸데없나? 집구석에 남자들 다 죽어 삐고 이 집안 살리는 게 누군데. 엄마잖아! 그런데도 여자가 쓸데없나? 그럼 할매는 여자 아니가! 할매도 그럼 쓸데없다!!"


할머니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해골이 그려진 작은 약병을 가지고 이거 마시고 죽어버린다고 난리를 쳤다. 

방에서 마당에서 할머니와 뒹굴며 약병을 뺐었다.

아무리 뺏어도 약병은 또 나왔다.


할머니는 약병을 뺏기면 울면서 산으로 올라갔다. 

손자가 묻힌 묘를 찾겠다고 온 산을 돌아다녔다. 할머니 뒤를 계속 쫓아다녔다.

우리 가족은 동생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동네 사람들이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춘기 때 엄마랑 싸운 기억은 없었다.

엄마를 힘들게 하는 할머니와 싸운 기억만 많았다.



먼저 죽은 아들에게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엄마,

그때는 죽은 남동생이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다.

바빠서 생각이 나지 않는 줄 알았다.


우리도 남동생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너무 커다란 슬픔을 굳이 말로 꺼내 직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이를 낳고 살아보니 그때 엄마 마음속에 있었을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가늠해보기조차 두려웠다.

엄마는 그렇게 아들을 가슴 한켠에 묻어 놓고,

애들 놔두고 나와서 재혼해서 살라는 외삼촌의 충고도 뿌리치고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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