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극배우 B씨 Oct 02. 2020

죽고 없는 조상한테 제사가 무슨 소용이냐

이혼 후 이야기 #. 19

엄마.

이제 엄마도 소리내서 울어(2)





"대가 끊어져서 조상 볼 면목이 없다."
"어디 가서 양자라도 들여와야 한다."


아버지와 남동생이 죽자 할머니는 이 말을 달고 살았다.

남은 손녀들과 악담을 하는 시어머니를 혼자 몸으로 죽어라 봉양하는 엄마 뒤통수에 대고 주문처럼 말했다.


엄마는 어느 날 집 앞에서 아버지와 할머니가 애지중지했던 족보를 보란 듯이 활활 불태웠다.

제사 대신 기독교식으로 추도예배를 하던 것도 그만두셨다.


"내 새끼들 입에 밥이 못 들어가는데, 죽은 귀신한테 음식 해 바쳐서 뭐할라꼬."


"후손들이 잘 살아야 조상도 있는 거지, 양반 집안? 제사?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 상황을 안다면 체면과 자존심은 제일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어려운 집안의 가장이 된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달걀을 못 먹게 했다.

달걀같이 귀한 것은 남자나 아들, 손님만 먹는 거라고 했다.

여자들은 먹는 게 아니라고 했다.


계란 프라이를 하다가 할머니가 저 멀리 오는 게 보이면 급하게 프라이팬을 숨겼다.


엄마는 월급을 받으면 그날 저녁 꼭 달걀 1판을 사 오셨다.

늦은 시간에도 달걀 서른개를 몽땅 찜통에 넣고 삶으셨다.

우리를 앉혀놓고, 할머니가 올까 봐 방문을 잠그고 금방 삶은 계란을 먹으라고 하셨다.


맘껏 먹으라고 하셨다.


우리가 다 먹지 못해도

다 먹지 못하는 양인데도 엄마는 굳이 30개를 다 삶았다.


남자들한테 달린 것을 못 달고 나왔다고 할머니에게 받던 미움을 엄마는 늘 지워주었다.

딸 많은 집안,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한 번도 엄마에게 이년 저 년 같은 욕을 들은 적이 없었다.

집에서 함부로 대하는 아이는 밖에서도 남에게 그런 대접을 받는다고 하셨다.




어렸을 때 나는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곧잘 받아왔다.


KBS 지방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수상하는 자리였다.

엄마와 같이 갔다.


"엄마가 살다 살다 니 덕분에 방송국도 와본다."


상을 받는다는 기쁨보다 엄마가 뿌듯해하시는 얼굴을 보기가 좋았다.


수자원 공사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도 상을 받았다.

상금이 50만 원이었다.

팍팍한 살림에 보탬이 되었을까

엄마는 봉투를 몇 번이고 손으로 쓰다듬으셨다.



나는 운이 좋게 반장도 하고 부반장도 했다.

언니는 고등학교 전교회장을 했다.


엄마는 학교에 한 번도 오시질 않았다.

하지만 졸업식 때 딱 한번 오셔서 꽃다발 대신 3만 원이 든 흰 봉투를 건네셨다.

"꽃다발, 받을 때는 좋지. 결국 아무 데도 쓸데가 없어. 차라리 그 돈 네가 쓰고 싶은 곳에 써라."



"나는 개처럼 벌지만 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쓰는 것이다.
지금 당장 입에 좋은 것만 쫓지 마라.
젊었을 땐 조금 헐벗어도 굶어도 괜찮다."



엄마는 월급으로도 생계를 이끌어나가기 버거워 밤낮 농사를 지으셨다.

쉬는 날 곡식을 내다 팔고 한 푼 두 푼 모아나갔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도 갚아나갔다.


남의 논에서 농사를 하던 엄마는 조금씩 조금씩 농사지을 땅을 사들였다.

두 살, 세 살 터울의 다섯 딸들은 엄마가 숨 돌릴 틈도 없이 연이어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큰언니는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며 집을 떠났다.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을 갈 수 없었던 작은 언니도 읍내에 있는 신협에 취직을 했다.

나 역시 고3이 되던 봄, 실습생을 시작으로 돈을 벌었다.


엄마의 유일한 취미는 꽃을 심는 것이었다.
높게 올라간 우리집 담장아래에 덩굴 장미를 심으셨다.


덩굴장미가 뻗어 올라가 소담스런 장미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덩굴 밑동을 댕강 잘라버렸다.

출근하는 엄마에게 늘 모진 소리를 했다.


담장 위에 축 쳐진 죽어가는 덩굴장미를 모조리 걷어낸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장미를 심지 않으셨다.



자라면서

한 번도 아버지가 없는 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할머니가 '남자가 없는 집'이라고 한탄할 때뿐이었다.


엄마가 겪었던 시집살이는 내가 본 것이 전부였을 뿐, 엄마는 가타부타 말이 없으셨다.

다만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그런 환경이지만 내가 얼마나 너희를 사랑하는지.

엄마는 풍족하지 않았지만 부족하지 않게 우리를 키워주셨다.


그런 엄마에게 사위가, 전남편이 이혼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엄마는 나에게 전화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직장에 정규직 되고 나서 그때 가서 이혼 생각하며 안되나? 너 혼자 어떻게 새끼 둘 키울라고..."


엄마가 우리를 감싸 안고 홀로 맞았던 찬 바람을 내가 맞게 되는 걸 못 견뎌하셨다.

눈물이 없는 줄 알았던 엄마가 전화기 너머로 소리없이 고 있었다.



그런 엄마가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를 볼 때마다 힘주어 말씀하신다.

"그 집구석에서 잘 나왔다. 참 잘 나왔다."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랑 살았다.

자식들이 다 독립하고 없는 텅 빈 집에서 할머니 식사를 챙겨드리며 일을 나가셨다.


엄마는 자격증을 따서 간병인으로 취직을 하셨다.

젊은 사람들이 더럽다고 비위 상한다고 하지 못하는 일을 엄마가 하셨다.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해 집 밖을 못 나가자 엄마는 기저귀를 채워드렸다.


"할매도 그냥 병원에 데려다 놓으면 되지, 엄마 편하게."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서 모셨다.

답답한 요양병원 좁은 침대에 묶여 계시지 않고

집에서 돌아가셨다.


할머니 장례를 치르던 날,

엄마는 많이 늙어있었다.


수십 년 전 먼저 간 아버지를 대신해

할머니를 모셨던 젊은 새댁은,

이제 할머니와 비슷하게 늙어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도 소리 내서 울어 이제(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