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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Oct 16. 2020

나는 안방마님이 되는 게 소원이었다.

이혼 후 이야기 #. 27

18평 작은 아파트

시어머니를 모시고 신혼을 거기에서 시작했다. 


"아직 우리가 쓰고 있는 것도 멀쩡하다. 낭비할게 뭐 있냐. 그냥 쓰던거쓰자."


혼수를 해가려고 했지만 아들과 쓰던 살림도 멀쩡하다며 마다하셨다. 

덕분에 혼수비가 별도로 들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시어머니가 서랍이 달린 화장대 작은 것 하나를 아들 방에 의논도 없이 사다 놓으셨다. 


멋도 모르고 일찍 결혼하는 것이 죄송해 엄마에겐 내 결혼 준비를 알아서 한다고 말씀드렸다. 전세 버스비를 입금해드리며 조심히 올라오시라고 전화를 했다.


스무 살부터 직장생활을 하며 모았던 내 돈은 혼수 대신 결혼식, 신혼여행, 예복 사는 데 사용했다. 


남편은 모아둔 돈이 없었다. 

어머니와 총각시절 함께 살던 지방의 빌라 전세금 1,200만 원이 전부였다. 


그나마 전세자금도 집을 합치면서 형 사업자금으로 줘버렸다. 

내가 모은 돈은 아니니 간섭할 수는 없었지만 끝도 없는 형제애의 시작일 뿐이었다. 


예물세트도 몰랐다. 

'비싼 거 사봐야 잃어버리면 아깝기만 하지.'라는 생각에 24k 결혼반지와 액세서리 한 세트만 했다. 


시어머니가 지방에서 짐을 들고 와 합가를 하셨다. 

어머니들이 흔히 쓰는 큰 장롱이 있었는데 그나마 평수가 컸던 안방에만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안방을 사용하셨다. 


"어차피 우리는 직장에서 오래 있으니까요, 어머니가 그냥 안방 쓰세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결혼생활 내내 안방을 써보지 못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좁았던 부부방에 아기침대를 들여놓으니 공간이 없었다. 

남편과 나는 자연스럽게 거실에서 이불을 폈다 접었다 하며 생활했다. 


새벽이면 시어머니가 새벽기도를 가신다고 거실을 가로질러 가셨고, 화장실이 하나뿐인 집이라 누구 하나 볼일을 보러 가야 하면 거실 불이 켜졌다. 


늦잠을 자고 싶은 주말 아침엔 아이와 시어머니가 거실로 나와서 뽀로로를 틀고 뉴스를 틀었다. 


그냥 얹혀사는 자취생 같았다.  

부부만의 방이 없었다. 


그것을 남편도 시어머니도 자주 놀러 오는 시누이들도 당연하게 여겼다. 

어른을 극진히 모시는 것도 좋고 어머니가 넓은 방을 쓰시는 것도 좋은데, 점점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놓고 안방을 쓰고 싶다고 말하자니 모양새가 좋지 않을 듯했지만 속이 상했다. 


결혼 생활중 두 번의 이사를 했다. 

마지막 이사를 할 때 남편은 이사에 대한 의논을 내가 아닌 누나와 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여야 하건만, 이사하는 중요한 날에 누나와 조카를 불러 이사를 할 거라고 했다. 

나와 사이가 엉망이고 말도 안 섞는다는 것을 대놓고 홍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사하는 것은 집안의 모든 짐을 옮기는 것이기에 이 집에서 사는 나와 의논할 일이었는데 남편은 끝까지 누나 누나 누나였다. 


말이 안 통하니 남편의 누나에게 문자를 했다. 

-형님, 이삿날 어차피 포장 이사하니까요 힘들게 오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애들 아빠가 형님한테 와달라고 한 모양인데, 우리 집 이사니까 저랑 애들 아빠랑 할게요.
이사할 때 혹시나 위험할 수 있으니 어머니랑 애들 맡겨도 되면 하루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깔끔하게 다음날 시누이가 왔다. 

그렇게 긴 문자로 남편과 함께 해보겠노라, 간곡히 부탁을 했는데도 남동생이 오라고 해서인지 집에 왔다. 


말없이 이삿짐이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삿짐센터 직원분에게 말했다. 

"새로 이사 가는 집은요, 짐이 다르게 들어갈 거예요. 안방에 있었던 짐은 작은 방에 넣어주시고요 작은 방 짐은 안방으로 넣어주세요."


마지막 이사 때는 남편과 시어머니가 편을 먹고 나는 늘 겉돌던 시절이었다. 

이판사판 누구 눈치를 볼 마음도 없었다. 


똑같이 돈 벌어 오고 똑같이 힘든데 왜 나만 뒷방 같은 곳에서 주방에 나가지도 못한 채 숨어 지내는 꼴로 사는지 억울했다.


내가 없을 때 혹시 부부 짐을 작은방에 넣으라고 할까 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이삿짐 아저씨만 졸졸 따라다녔다. 


한심했을 것이다. 

이사하는 날 부부가 아무 대화도 없이 투명인간 대하듯 서로 멀뚱하게 있었으니. 


부부 짐이 사다리차로 올라오자마자 손으로 안방을 가리켰다. 

"저 방에 넣어주세요. 어머니 장롱은 작은방에 넣어주시고요."


시누이와 어머니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남편이 날 의식한 듯 큰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작은 방 괜찮으시겠어요? 답답한 거 못 참으시는데. 큰방 쓰셔야지요."

"아니다. 나는 됐다."

이삿짐 아저씨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고약한 며느리라고 생각했겠지...


안방을 차지했지만 비참했다. 

남편과 시누이, 시어머니 세명은 웃으며 전등을 달고, 액자를 걸 때 수평을 봐주고 곳곳에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내가 없는 듯이 세명은 즐겁게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멸감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안방 문을 닫고 혼자 걸레질을 했다.

쓸쓸했다.


결혼 생활하면서 안방을 쓰지 못했으니 장롱도 없었다.

부부 옷은 늘 작은방 행거에 걸려 있었다. 

툭하면 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행거를 다시 세우는 게 일이었다. 


그 행거를 넓은 안방에 세웠다. 

먼지 앉지 말라고 흰 보자기도 덮어두었다.

결혼생활에 더 이상 애정이 없어서일까 새가구를 사는 것도 방을 꾸미는 것도 내게는 먼 이야기였다. 

거실에서 생활했으니 꾸미고 할 것도 없었다.


이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안방에 장롱이 들어와 있었다. 

장롱이 없어서 안 좋아 보였다며 남편 누나가 중고를 갖고 왔다고 했다. 


나와 상의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 집안의 안주인이 아니었다. 


조선시대가 아니니 안방마님, 안주인의 개념은 없을지라도 가정을 꾸렸으면 그 집 안의 주축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였다. 

그리고 시누이들이었다. 


난 그냥 '들어온' 여자였다.


그렇게 이사한 그 집에 시누이는 쫓아와서 식탁에 나를 앉혀놓고 내 결혼생활에 대해 훈계했다. 

어머니에게 멱살을 잡히며 살던 집이기도 했고 남편과 이혼하기로 하고 나와 아이들 짐을 챙겨 나온 집이었다.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니었다. 

안방을 차지한 것도 잠시, 곧 그 집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별거와 이혼을 하면서 내가 가장 낯설고도 기뻤던 것은 내가 안방을 쓴다는 사실이었다. 

가슴이 벅찼다. 


이게 뭐라고, 대체 그 안방이 뭐라고.... 

이미 가장이 되었지만 안방에 들어서면서 가슴이 벅찼다. 


안방에 내 책상이, 내  책꽂이가, 내 장롱이, 내 물건이 들어왔다. 


아이들에겐 그냥 엄마방이다.

엄마방에 수시로 들어오고 푸념도 내 방에 와서 한다. 


아이들이 실없는 농담을 하고 

진지한 속이야기를 하고 

방귀를 붕붕 뀌다가 쫓겨나는 방이 내 방이다. 


아이들과 늘 함께지만 내가 필요할 땐 독립적인 공간이 되는 곳. 

피곤할 땐 창문을 닫고 조용하게 눈을 붙일 수 있는 내 공간. 

내 쉼터. 

내 안식처. 

나에게 안방은 그런 의미였다. 






엄마도 안방 없이 살았다. 

안방이래야 코딱지 만한 방이었지만 그마저도 딸들이 차지하고 뒹굴었다. 

엄마는 집에서도 쉴 공간이 없었다. 


엄마는 늘 부엌에서 서 있어도 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부엌이 편한 사람인 줄 알았다.


오래된 냉장고 한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고단하게 콩을 골라내고 있는 게 즐거운 줄 알았다. 


오래된 엄마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고려했던 것은 엄마의 방이었다. 


엄마만 쓸 수 있는 화장실을 넣고 

엄마가 화장할 수 있는 조명이 밝은 화장대를 만들고 

마가 씻고 나와도 춥지 않게 바로 옷을 입으실 수 있는 드레스룸을 포함한 안방 설계를 부탁드렸다. 


"세상 참 좋아졌다, 내 집에서 발가벗고 다닐 수도 있네."


엄마는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엄마방에 에어컨을 별도로 설치하고 온돌 침대도 넣어드렸다. 

형부가  TV도 설치했다. 

완벽한 우리 엄마의 공간이었다.



명절날 엄마 집에 모이면 저녁에 가족 구성원에 따라 방을 배정(?)해준다. 

형부랑 언니 가족, 제부랑 동생 가족은 방 하나씩 차지한다. 


우리 아이들은 조카들과 함께 밤새 놀며 거실에서 잘 것이다. 


나도 예전 4인 가족이었을 때는 엄마 집에 오면 방하나를 차지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잘 때가 되면 내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한다. 


"자자, 남편 없는 여자들은 안방으로 모이세요!

남편 죽고 없는 독보적인 장기간 솔로 김 여사님 오시고요, 거기 남편은커녕 남자 친구 하나 없는 동생도 이리 오시고요, 남편 있었는데 이제는 없는 화려한 솔로 이 몸도 안방에서 잡니다."



엄마는 눈을 흘기고 언니와 동생들은 킥킥 웃는다.

"퍽이나 자랑이다 이것아."

언니가 구박을 해도 다 같이 웃는다. 


기분 좋게 엄마방으로 간다. 

나는 철없는 딸로 돌아가 동생을 엉덩이로 꾸역꾸역 밀어내고 엄마 냄새가 나는 촌스러운 꽃무늬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려 푹 덮는다.

엄마 냄새가 나는 베개를 냅다 차지한다. 



"엄~마! 언니 봐라. 내 이불 다 뺏어간다!"

"고마 자라 인제. 다 큰 것들이 싸우고 있노!"


엄마는 몰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은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고단한 하루를 

자식들 수다를 들으며 닫는다.


다 큰 딸들에게 누울 자리를 뺏기고 안방 한쪽에서 잠을 청하는 엄마지만 불평이 없다.


오랜만에 엄마의 안방이 

그 옛날 좁은 집에 다 같이 살 때처럼

밤새 시끌시끌하다.





작은 아이는 내 침대 단골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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