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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Oct 15. 2020

친정에 자주 못가는 이유

이혼 후 이야기 #. 26

별거를 시작하면서 엄마 집에 가는 것이 자유로워졌다.

내가 갈 수 있는 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고속도로를 4시간 가까이 달려가야 했지만

엄마 집에 가는 길은 늘 설레었다.


다닥다닥 건물들이 붙은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회색빛 답답한 하늘을 가로질러


한눈에 다 담기도 힘든

넓은 하늘 아래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정겨운 내 고향, 엄마 집


내가 가장이 되지 않아도 되는 곳

쌓인 집안일도 없고

고단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야 할 것도 없고

눈치 볼 사람도 없는


작은 기척에 벌떡벌떡 몸을 일으켜야 하는

불편함마저도 없는 집


우리 엄마 집이었다.



이웃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집에 올해 농사는 어떤지

기르던 개가 강아지를 몇 마리나 낳았는지도 마치 내 일처럼 빤한 작은 시골 동네에서

동네 어르신들은 딸 많은 우리 집 사위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젊었던 엄마가 일찍 과부가 되어 눈물겹게 키운 딸들이

때를 맞춰 딱딱 데리고 오는 제 짝들을 함께 반가워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저귀를 차고 있었던 첫 아이를 데리고 집에 내려갈 때면


이쁜 손녀와 훤칠한 사위가 와서 얼마나 좋으냐며

동네 어른들은 우리 집 마당에 서서 칭찬을 했다.


엄마는 참 뿌듯해하셨다.




이혼을 지만 고향은 나에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내려가는 길은 늘 즐거웠고 푸근했고 따뜻했다.



여느 때처럼

엄마 집 앞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선물과 짐가방을 내려 두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마침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가 반겨주었다.

"아이고, 고향 내려왔나? 야들이 많이 컸네."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응. 그런데 남편은 어디있노? 같아 안 내려왔나?"

"... 네에. 이번에 휴가를 못 맞춰서 같이 못 내려왔어요."


지나가는 동네 어르신에게 한두 번은 가볍게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남편과 휴가를 못 맞췄거나'

'남편이 하필 오늘 바쁘거나'

기타 등등의 새로운 거짓말을 즉석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 둘을 앞세워 혼자 짐을 이고 지고 집에 들어가는 내 모습이 자주 보일수록 그 거짓말도 새로운 것으로 조금씩 바꿔야 하는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어쩌면 내가 내려갈 때마다 사위를 묻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처럼 급하게 둘러대야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성격상 동네 누군가라도 찾아가

'딸이 이혼해서 참 슬프다.'라고

자신의 먹먹한 진심을 털어놓을 사람은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나와 아이들은 엄마에게 아프고 곪은 손가락일지도 모른다.


늘 아프지만 돌이킬 수도 없고,

치료도 안되고,

어쩌지 못해 덮어두지만

다시 한번 그 상처를 마주하면 여전히 아픈...



엄마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언제부턴가 아이들을 데리고 셋만 내려가는 것이 죄송스러워졌다.


동네 산책을 나가는 것도 꺼려졌다.


오며 가며 동네 어르신들을 만날 것이고 늘 물어오는

"애들 아빠는 어딨니? 같이 안 왔나"

라는 질문에 그때마다 이런저런 거짓말을 생각해내는 것도 부담스러워졌다.


가까운 이웃들은 어쩌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냥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 년에 두어 번밖에 가지 않으니 그나마 잠시만 사람들을 피하면 될 일이지만 엄마는 나보다 더 곤란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집에 가는 것이 죄송스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였다.


"얼굴 자주 보여드리는 게 제일 큰 효도야."

사람들 말처럼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뵐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한 직장에서 20년 가까이를 근무했다.

그중 8년이 넘는 시간 동안은 비정규직이었다.

승진도 월급도 한계가 있었다.


정규직이 되고 수년의 시간이 흘렀다.


승진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이름이 있었다.



정규직이  것만으로도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직업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승진자 명단에 내가 있었다.


동료들의 축하를 정신없이 받고

고향에 계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직장에서 자식들 전화가 오면 깜짝깜짝 놀라기부터 하는 엄마에게 뜬금없이 말했다.



"엄마! 승진 발표 났는데, 내 이름이 있어."


"고맙습니다 엄마. 딸내미 승진해서 월급 오르면 용돈 올려 받으실라고 기도를 많이 하셨구먼!"



싱거운 내 농담에도 전화 너머 엄마는 말이 없다.


고령환자들의 기저귀를 갈며 똥을 만지고,

치매 어르신들에게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뺨을 맞으며 그것조차도 허허 웃는 엄마가.


그렇게 열심히 벌어서 손주들 용돈 주는 맛에 사시는

억척 쟁이 엄마가


딸이 승진했다는 담담한 전에 대답이 없다.


누가 볼세라 터져 나오는 울음에 입을 막고 계셨겠지.


엄마와 나는 대화를 하지 못한 채 서로의 흐느낌만 듣다가 전화를 끊었다.





금요일 저녁 퇴근길에 화원에 들렀다.

살면서 엄마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붉은 장미를 그야말로 한 다발을 샀다.


엄마가 밉다고

할머니가 낫으로 죄다 잘라버린 덩굴장미가 생각났다.

엄마같이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안개꽃도 듬성듬성 섞었다.


꽃집 사장님이 신나게 포장하시며 물었다.

"아유. 누구 주실라고 이렇게 큰 꽃다발을 사세요"

"엄마요... 우리 엄마요."


엄마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오랜 세월 그 녹록지 않았던 시간들의 일부라도 보상이 되었기를, 엄마를 보며 위로하고 축하하고 싶었다.

나보다는 당연히 엄마가 축하받아야 했다.



간병사로 근무하는 엄마가 내일 아침은 새벽 6시까지 병원을 간다고 했다.

아침 일찍 제일 먼저 엄마에게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외할머니댁에 갔다 올게. 내일 새벽에 갔다가 바로 올라올 거야."

"왜 가는데?"

"엄마 승진했으니까 제일 대빵한테 신고는 해야지."^^

"에이~ 꼴랑 장미꽃 드릴라고 하루 만에 갔다 온다고?"


꼴랑이라니 이 녀석아...

우리 엄마에겐 평생 소원이었을 거다.

내새끼 잘되는 거.

나도 너희들에게 그러하듯이 말이다.


새벽 2.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는 '번듯한' 유니폼을 갖춰 입었다.

전 날에 샀던 꽃다발을 들고 차 시동을 걸었다.



엄마는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입는 유니폼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아무나 입지 못하는 옷이라고

평생을 남의 식당에서 남의 가게에서 일하신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자식들이 여름에는 에어컨이 나오고 겨울에는 히터가 나오는 직장에서 편하게 일하는 게 소원이었다.

당신은 슬리퍼 하나로 발이 얼어가며 쉬는 날 없이 일했기 때문이었다.



비정규직일 때

아이 둘을 데리고 불안하게 홀로서기를 시작한 나를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 기억이 생생했다.


그런 엄마를 보러 어두운 고속도로를 4시간 동안 달리고 달려 고향으로 내려갔다.  


내 옆자리에는

그 옛날 슬프게 실려 있었던 엄마의 쌀자루 대신 환하고 붉은 장미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마을 어귀에 내 차가 들어섰다.

집에 면 엄마가 한창 출근 준비를 하고 계실 시간이었다.

그 새벽에 나타나면 엄마는 나를 붙잡고 우실 것이 분명했다.


눈이 부은 채로 출근하게 해 드릴 수는 없었다.  

길 건너에 차를 세우고 한참 우리 집을 바라보았다.

엄마 모습이 거실에 가끔 왔다 갔다 했다.

수를 하셨나 보다.

주방 가스밸브를 잠그시나 보다.

양말을 찾나 보다.

혼자 엄마 동선을 그려본다.


집안에 불이 다 꺼지고 외투를 입은 엄마가 나왔다.


입김이 훌훌 나오는 이른 새벽,

엄마가 낡은 오토바이의 시동을 건다.


익숙하게 발끝으로 땅을 밀어 후진을 하고 이내 읍내로 방향을 튼다.

저분은 저렇게 수십 년을 자식들을 키우려고, 살리려고 외로운 출근길을 재촉하셨겠구나.


엄마는 집을 뒤로하고 힘차게 나가신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불 꺼진 집에서 엄마가 가는 줄도 모르고 쿨쿨 잠을 자고 있었지.


차를 슬슬 몰아 엄마를 따라간다.

그렇게 당차던 엄마의 어깨가 어느새 너무 작아져있다.


엄마의 출근길을 보호하듯 100미터쯤 뒤에서 비상등을 켜며 따라갔다.

다들 비키 시라고요.

우리 엄마가, 

하나뿐인 내 엄마가, 

대단한 우리 엄마가 출근합니다.

방송이라도 하고 싶었다.


엄마가 병원으로 들어가시는 걸 보고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내릴려니 발이 안 떨어진다.


이른 아침 상상도 못 한 딸의 방문에 놀란 엄마에게

"엄마. 이제야 승진했어. 고마워요."

라는 그 짧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물이 나서 목소리가 잠길 것 같았다.


. 그럼 조금 민망할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유니폼을 다시 매만지고 장미 다발을 품에 안았다.

뚜벅뚜벅 걸어가 병원 현관 손잡이를 잡았다.






"어디서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우리 엄마 좀 뵈러 왔어요. 000 간병사님이요."

"아~그렇구나. 저기로 가시면 곧 내려오실 거예요. 연락해놓을게요."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일하다 말고 딸이 왔다니, 헐레벌떡 놀란 표정이 그대로다.


"니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냐! 응?"


등 뒤로 숨겼던 꽃다발을 엄마 턱밑에 쑥 내밀었다.

"축하해, 엄마. 딸내미 승진해서. 그래도 엄마한테 신고는 해야 승진이지."


엄마 눈을 정면에서 쳐다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세월의 주름이 거미줄처럼 내려온 눈 두 덩이가 봉숭아 꽃잎처럼 붉어진다.  


엄마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뭉툭한 손으로 당신 팔목보다 더 큰 꽃다발 손잡이를 잡는다.


"그래 그래. 우리 딸... 축하..."

또 그런다.

또 말을 못 한다.


엄마는 직원들이 일하는 시간이라며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이 시간에 애들은 우짜고 여길 다 내려오노. 

위험하다고 밤 운전하지 말라 안 캤나. 

밥은? 

집에까지 왔으면 들어와야지 왜 밖에서 벌벌 떨어 있었노."


엄마는 내내 딴소리만 했다.

눈물이 더 나면 하루 종일 벌게진 눈으로 근무하실 판이었다.


"인제 고마 올라가 봐라. 애들 밥 줘야지."

"알았어요. 이제 가볼게요 엄마."


엄마를 꾹 안아드렸다.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시던 내 유니폼에 엄마 얼굴이 폭 묻혔다.

언제 이렇게 울엄마 키가 줄어들었을까... 


엄마 봤지?

나 이렇게 잘 되잖아. 잘 살잖아요.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엄마보다 더 힘도 세고 더 많이 벌어요.

어디에 놔둬도 나 잘 살아갈 수 있어요.


엄마가 병원 현관문 앞에서 손짓을 했다.

자꾸만 가라고 했다.



엄마로부터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장미 꽃다발을 들고 서있는 엄마에게

큰절을 했다.  


손바닥과 두 무릎에 닿는 콘크리트 바닥이 하나도 차갑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엄마.

모든게 다 엄마 덕분이야.


장미다발을 안고 있던 엄마가 다시 한번 눈가를 훔쳤다.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으로

엄마에게 큰절을 올리는 것.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이고 존경이자 감사였다.



이른 아침


시골 동네 작은 요양병원 현관에는

간병사에게 큰절을 올리는 여자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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