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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Nov 19. 2020

이혼이 완전한 끝은 아님을

이혼 후 이야기 #. 38




하루 종일 학교에 있다가 귀가한 아이들과

이제 막 퇴근한 내가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


오늘도 신나게 학교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아이의 휴대폰 벨이 울린다.

아이는 숟가락을 놓고 전화기를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또 아빠가 영상통화를 걸어온 모양이다.



아빠의 전화에 민감한 엄마가 아닌데도 아이는 알아서 방에 들어가 전화를 받는다.


'내가 눈치를 준 건가?'


괜히 혼자 머쓱해진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빠와 비교적 가까이에서 살다가 또다시 먼 곳으로 이사 온 후 애들 아빠는 매일 전화를 한다.


그것도 영상통화를 걸어온다.


아이들은 거의 전화를 받아준다.

오늘도 전남편은 이제 세 살이 채 되지도 않은 어린 딸을 씻기고 나서 언니들이랑 통화하자며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엄마랑 살지 않는다.


전남편은 재혼한 여자와 또 이혼을 했는지 아이와 단둘이 산다.

그리고 아이를 키운다는 핑계로  집에 눌러앉은듯했다.

육아휴직이란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할 때까지만 육아휴직을 잠시 하는 줄 알았는데 벌써 일 년이 넘어가고 있다.  

"어휴. 이젠 어디 가서 아빠 직업이 뭐냐고 하면 말도 못 해. 벌써 일 년이 넘었어. 아빤 이제 백수야 백수."


아이들은 어린이집 종일반에 를 보내 놓고 하루 종일 집에서 핸드폰만 하고 있는 아빠를 한심하다고 표현한다.

엄마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아이들과 매일 같이 연락하는 것을 보면서 막을 생각은 없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다.


일단 전남편은 자신의 아이를 꾸준히

아니 거의 매일 내 아이들에게 영상통화로 보여주며 접촉을 시도한다.



"저녁 먹었쪄?"

"뭐 먹었쪄? 반찬은 뭐양?"

"엄마한테 그것도 해달라고 해~~."

"뭐해?"


어린애들이 내는 콧소리로 한껏 무장한 채

용건은 늘 똑같다.


아니 정확히는 용건이 없다.

늘 같은 질문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키우고 있는 딸을 보여준다.

늘 핸드폰으로 유튜브에 빠져 있는 아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만 대답을 한다.

꽤 심심해 보인다.



늘 같은 질문만 하는 아빠에게

아이들은 의무처럼 단답식의 대답만 한다.

특별한 소재도, 소식도 없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되풀이되는 화상통화이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영상통화를 한다고 끈끈한 정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자주 보면 정이 든다고,

적어도 남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도록 아이들을 단련(?)시키는 걸까.


아이들이 싫지 않다면 통화는 언제든 환영이다.

하지만

늙어갈 아빠를 대신해 우리 아이들이 그 애를 동생처럼 보살펴줘야 한다는 아주 약간의 책임감이라도 느낄까  나는 몹시 두렵고 싫다.


전남편과 재혼한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 나와는 상관없을지라도 아이 자체 소중한 것은 맞다.

마땅히 부모의 사랑받아야 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키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아빠를 그리워했던 나이에도 저렇게 끊임없이 아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노력을 했었던가를 회상해보면 결코 지금이 고맙지 않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이리저리 이사를 다닐 때, 전남편은 말 그대로 새로운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서류 정리 조차 되지 않은 법적 부부였지만 그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만큼 내 앞으로의 인생에서는 없는 사람이었다.

 

또다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는지 여자 친구와 함께 셀카를 찍어 핸드폰에서 아이들이 그 사진을 발견하게 할 만큼 요란스럽게 연애를 했던 전남편은 아이들에게 연락을 잘하지 않았다.

그때도 아이들은 핸드폰이 있었는데 말이.


아이들이 그토록 원했을 때는 연애하느라 찾아오지도 않고 내가 데려다줘야 만났던 사람이

이제 말도 잘 통하지 않세 살배기 아이와 저녁시간을 보내려니 무료했을까.


전남편은

아이들 옆에 내가 늘 있는 걸 알면서도 매일 저녁 자신의 아이를 재우기 전에 꼭 한번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매일같이 걸려오는 전화에 밥 먹던 아이들이 아빠 번호를 보고 짜증을 내도 툴툴거려도 눈치 없이 헤헤거리며 전화를 다.


마치 나에게 아이들을 맡겨놓은 것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양해도 없이

자신이 편한 시간에 꼬박꼬박 전화하는 그 행동이 나를 너무 불쾌하게 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싶은 생각에 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 어느 드라마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아이들을 혼자 키워온 것에 대해 전남편에게 치하받을 생각도 그럴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빠가 아이들에게 자신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눠지게 하려는 것 같은 생각에 나는 조바심이 난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슬프다.

한때는 아내였고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을 돌보는 양육자가 된 사람에게

그 정도의 신뢰도 주지 못한 한 남자의 삶이 말이다. 



나는 판사 앞에서 치열하게 싸워 아이들의 보호자이자 엄마이고 친권을 가져야 함을 사력을 다해 주장했다.


내게 친권이라는 것은 아이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성인이 되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아이의 신변을 지켜내고 의식주를 책임질 거라는 의미다.


거기에다 엄마로서 아이를 최대한 따뜻하고 올바르게 자라도록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나는 또다시 이 상황들이 되풀이되어도 남편을 내 삶에서 내보내는 이혼을 선택하겠지만 아이들에 대한 책임 또한 버리지 않을 것이다.


전남편과 그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않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내 아이들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아빠랑 고모가 용돈 보내준다고 계좌번호 알려달래." 


"그래? 엄마가 너한테 준 용돈 체크카드 있잖아. 그 계좌로 받으면 되겠네." 


다음날 아이는 말했다.

"엄마, 내 통장 만들면 그때 통장번호 보내래. 엄마 계좌로는 좀... 그렇대."


안 그래도 아이의 용돈 통장으로 계좌를 개설하려던 참이었다.

통장을 만들어주자 전남편이나 애들 고모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 계좌로 용돈을 보내주었다.


...

다시 한번 느낀다.

그들은 딱 그만큼의 그릇이고

그만큼의 아량이다.


더 큰 것을 담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줄 모른다.

다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니까.


그들에게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남이다.

아이를 키워주는 보모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주는 용돈이라고 내 계좌로 보내면 나 혼자 설마 빵을 사 먹겠는가.


명절에나 보내주는 푼돈으로 장차 아이들이 컸을 때 고모 대접이나 아빠 대접을 바라지나 말았으면 한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애들한테
 매일 영상통화 걸어오는 이유가 뭐야?
아빠니까 당연히 연락하는 건 이해하는데,
출석도장 찍듯 매일은 좀 아니지 않아?
애들이 민감한 시기야.
아빠 전화를 인상 쓰면서 받는다는 건
자기들도 스트레스라는 건데,
무작정 그렇게 매일 전화하는 건 좀 삼가 줬으면 해.
가끔 해야 애들도 반가운 거지, 매일 저녁시간에
그렇게 우리 집 분위기 망치지 말았으면 해.



지켜보기만 하던 것을 멈추고 긴 문자를 보냈다.


역시나 답은 없다.

대답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 일상에 어떻게든 영향을 주는 애들 아빠의 존재에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가끔은 혼돈이 온다.


휘둘리지 않는 평정심으로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의지할 곳도 의논할 곳도 없이 매 순간 나의 판단으로만 상황을 이겨내야 하고 조율해야 하기에


늘 강한 척 하지만 사실은 순간순간 스산하게 불어닥치는 마음속의 찬 바람에 잔뜩 웅크려지는 건 내색할 수 없는 '당분간의' 고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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