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극배우 B씨 Nov 21. 2020

엄마 재혼하면  나 가출해버릴 거야

이혼 후 이야기 #. 39




엄마가 마흔한 살에 홀로 되어 우리를 키우셨지만 나는 엄마에게 남자가 필요할 거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 몰랐다.

다른 것에서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엄마가 유독 남편, 시집, 결혼생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학을 ' 계셨기에 엄마에게 남자란 우리 말고 다른 가정이란 거추장스러움을 넘어 죽을 때까지 생각지도 않을 일일 거라 여겼다.


그런 내 생각이 바뀌지 않았던 것은 엄마가 한 번도 혼자라서 힘들다는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내색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이가 들고나서 예전 일들을 편하 이야기할 수 있을 즈음에야 줄줄이 딸들만 데리고 과부가 되었을 때 외갓집에서 엄마에게 새로 시집을 가서 좀 더 편한 집으로 가서 살 것을 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엄마는 거절했다.



우리는 그야말로 비좁지만 따뜻한 집에서 엄마의 독보적인 희생과 그늘 아래 부족한 것 없이 자랄 수 있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없다고 불행한 적은 없었다.


엄마는 먹성 좋은 사춘기 딸들을 위해 라면을 박스채로 사다 놓으시고 돌아서면 밥 밥하는 아이들을 위해 락스 물에 살갗이 벗겨지는 손으로 식당 식모일을 해나가셨다.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할머니는 진작에 갖다 버렸다며 '자식 때문에 살았다'는 엄마였지만 한 번도 우리에게

"내가 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라는 찝찝한 말씀은 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인생은 너희들의 인생이고 엄마 고생은 그냥 자산의 삶이라 생각하신 듯했다.


어떻게든 이 생에 있을 때는 해내고 말아야 하는 숙명 같은 숙제 말이다.

 






엄마가 '형부'라고 부르는 친척 어른이 계셨다.

읍내에 살고 계셨던 그 할아버지는 가끔씩 보는 우리를 굉장히 인자하게 잘 대해주셨고 내 생각에 엄마가 유일하게 경계심 없이 이야기를 잘 나누는 남자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엄마 집에서 쉬는 날이나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가끔 그 형부라는 분과 통화를 오래 했다. 옆에서 들어보면 그냥 일상 이야기이고 나는 들어도 뭔가 뭔지 모르는 옛날이야기였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 때와는 다르게 많이 웃고 또 많은 말을 했다.


그냥 어른들 이야기였을 뿐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인생에 정확히는 '우리 집'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을 친척 형부일 뿐인데도 나는 엄마가 남자와 통화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엄마가 몰래몰래 애인과(그런 개념이 시골에서 통할까 싶지만) 전화를 하며 속삭이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왔다 갔다 하는 거실이나 안방에서 대놓고 통화를 하는 건데도 보통 용건이 있는 이웃과의 통화처럼 짧은 시간이 아니라 제법 긴 시간을 웃으며 통화하는 것을 보며 철없는 소갈머리가 나왔던 것일까.


엄마가 전화기를 들고 있으면 괜히 짜증을 냈던 것 같다.


성깔 있 시어머니와

'응, 아니'라고만 대답하는 사춘기 딸들과

손이 많이 가는 아직 어린 딸들이 올망졸망 모여있는 집안. 


이었던 엄마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어디에 마음을 뉘었을까.

그럴 곳이 있긴 했을까...


어른이지만 어른의 수준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우리 집.


엄마는 그야말로 돈을 버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쥐어짜 넣고 탈진해서는 집에 와 자식들이 먹을 밥을 하고 고단한 눈을 잠깐 붙였다가 다시 일터로 나가기를 평생 그렇게 반복하셨을 터였다.


그런 엄마가 유일하게 가끔 통화하는 것을 눈을 흘기며 이해하지 못했던 걸 보면 나 역시 엄마가 남자와 이야기하거나 가깝게 지내는 것을 은연중에 싫어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내 거고, 엄마는 우리만 봤으면 좋겠고

엄마는 엄마는

우리 엄마, 내 엄마야


라는 유아적인 발상만 있었던 것이다.





엄마 재혼하면 나는 가출할 거야.



아빠가 재혼이라는 것을 하고

낯선 아줌마와 아이를 낳고

그렇게 엄마와 자신들과 떨어져서 새로운 가정을 만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아이들은 장난스레 묻는 내 말에 거침없이 대꾸한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엄마는 우리 안 버릴 거지?
엄마는 우리 곁에 계속 있어 줄 거지?
아빠도 이제 다른 사람이랑 살잖아.
엄마 우리 안 버릴 거지?
그렇지?"




불안하지만 사춘기 자존심에 차마 꺼낼 수 없는 애처로운 부탁이자 소망일 것이다.


혹시나 엄마도 누군가를 만난다고 할까 봐

그럼 혼자 살고 있는 줄 알았던 아빠 집에서 여자 칫솔과 여자의 속옷을 발견했던 그날처럼 엄마가 누군가의 옆에서 환하게 웃을까 봐 아이들은 끝도 없는 불안에

하루하루 엄마를 살피고

엄마 표정을 살피고

엄마 심기를 살펴왔을 것이다.


무심한 척했지만 

어쩌다 나온 '엄마의 남자 친구'란 단어 그렇게 쐐기 박는 아이들의 슬픈 눈을 보며 나는 여자로서의 삶과 아이들 엄마로서의 삶을 저울질할 필요가 없다고 오래전에 느꼈다.


전남편이 먼저 선수(!)를 친 것도 어쩌면 한몫할지 모른다.

아빠의 재혼을 보면서

미처 여물지 못한 아이들의 여린 마음이 흔들리고 찍히고 상처가 나는 것을 옆에서 봐야 했다.


아직은 아빠를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이 흘리는 눈물은 나에게 보이지 않는 채찍이었다.



나라고 왜 외롭지 않을까.

맞벌이 부부인척 하며 이미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남자를

"네. 제 남편은 00에 근무해요."라고 소개했어야 했다.


마음은 아프고 생활은 궁핍해져 가는데

또 나가야 할 날이 정해진 비정규직인데

누구에게도 말할 사람이 없었고

그럴 인연을 만들 용기도 나지 않았다.



엄마가 우리를 키우면서 주었던 안정감.

아빠는 술 담배로 무책임하게 하늘로 가버렸지만 엄마는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엄마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선 안된다고 그럴 수는 없다고

엄마를 감시했을지도 를 나의 어릴 때 지금 내 아이들이 어떻게 다르다고 할 것인가.



엄마는 송곳 같은 홀시어머니를 떠나

이쁘지만 너무 감당이 힘든 육 남매를 버리고 그냥 여자로서의 삶을 다시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오랜 맘고생으로 병을 얻어 아빠처럼 일찍 죽고 갑자기 고아가 된 우리들이 울면서 자라야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겨운 가난이 계속될수록 엄마 손 엄마 관절은 더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테고 설마 내일 죽는다 할지라도 어제까지 매던 밭을 매고 양은냄비에 감자만 잔뜩 들어간 멀건 된장찌개를 한가득 끓여놓았을 것이다.


"나는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

엄마는 일이 힘들어도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엄마도 울었을 것이다.

밭고랑을 매면서, 쌀자루를 혼자 옮기면서,

찬 서리를 맞으며 집을 나서는 이른 새벽에도 말이다.



내 사정을 아는 지인이 말했다.

 

즐겁게 살아, 즐겁게.

뭐한다고 그렇게 애들만 보고 아등바등 사냐.

애들이 너보다 더 큰데도 뭘 아직도 아기라는 거야.

엄마가 즐거운 게 있어야 그게 표정으로 나오고 아이들도 그 기운에 즐겁지.


너 지금 그렇게 아이들만 바라보고 산다고 애들이 나중에 감사합니다 하며 너 옆에 있어줄 것 같아?

지금부터도 벌써 말 안 듣잖아.

다 자기 인생 찾아서 훨훨 날아갈 거야.

너도 이제 즐거운 일 찾고, 사람들도 만나고 해.


인생 생각보다 짧은데 거기다가 오래 산다는 보장이 어딨니.

그렇게 보면 정말 남은 시간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우린 모르는 거야.

너무 아깝지 않아?




"너희들이 반대해서 재혼을 못했다. 엄마가 너희들 때문에 즐겁게 살지를 못했어."

이런 하소연으로 죄 없는 아이들의 발목을 잡을 거면 이제라도 누군가를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지만 나는 아이들이 없으면 살 수 없기에

아이들을 붙들고 살아왔다.


나만 바라보던 아기에게 젖을 먹여 키웠지만 이제는 내가 아이들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빠네 가면 불편해. 잘 때도 브래지어를 하고 자야 하고, 여름에 샤워하고 찝찝하게 옷까지 입고 나와야 해."

여름방학 때 아빠네 다녀온 아이들이 툴툴거렸다.

두 딸과 나에게 우리 집이란

가장 편하고 즐겁고 게을러도 되는 공간이다.


씻고 나와 거실에서 알몸으로 날뛰는 아이들에게 밖에서 다 보인다고 주의를 주고 야단을 쳐도 그때뿐이다.


학교에선 한껏 얌전한 척을 하다가도 집에 오면 교복을 훌렁 벗어던지고 한껏 늘어난 파자마를 배 위로 치켜 입은 채 양푼째 밥을 비벼먹으며 행복하단다.


내가 만약 누군가를 만난다면,

남자라도 우리 집에 왔다 갔다 하기 시작한다면 가능한 일들일까.


엄마랑 살던 어린 시절 너무나 당연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이제 와서 생각하니 정말 감사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여자로서 사랑받고 사는 삶도 중요하고

아이를 키우며 엄마로서의 책임과 울타리를 견고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두 가지를 동시에 모두 해낼 수 없는 거라면

나 하나의 이익보다 아이 둘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한다.


내 인생은 나 하나로 끝나겠지만 곁에 있는 딸 둘은 나중에 엄마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단짝이 될 수도 있다.


내 아이들 자녀를 낳는다면 그런 행복한 엄마의 기운을 받아 또 건강하게 자랄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대대손손 좋은 일 아니겠는가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던 아이들이 엄마 집에 왔을 때 들어서면서부터 옷부터 훌훌 벗어던지고 짜증을 쏟아내면


별것 없는 조촐한 엄마밥상을 차려주고 밥을 다 먹었을 즈음 과일을 깎아주고 보슬보슬한 극세사 이불을 깔아놓은 엄마 침대에서 한숨 푹 자도록 하는 것.


그런 딸을 웃으며 물끄러미 바라봐주는 것.


지금은 이것보다 더 나은 노년을

상상하기 어렵다...^^


"니나 내나 남편복 없는 여자들은 그냥 혼자 사는 게 답이야."

나를 보며 하시는 말씀이 엄마의 진심인지는 모르겠다.

남편에게 상처 받고 결혼생활로 힘들었던 당신의 인생처럼 딸이 또다시 상처 받는 것을 염려해서 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다.


엄마.
복은 우리가 없는 게 아니야.
엄마나 나 같은 보석을 못 알아본 그들이
복 없는 사람들이야. *^^*






   

작가의 이전글 이혼이 완전한 끝은 아님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