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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Nov 29. 2020

이혼을 하지 않았다면 그랬더라면

이혼 후 이야기 #. 42





내가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랬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이들이 대학을 갈 때까지 이혼을 늦추자는 내 의견을

남편이 따랐더라면 우리 가정은, 

우리 결혼생활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당시 우리의 관계는 이미 선명한 금이 간 상태였다.


잘 지내고 있었는데 교통사고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다던가

결혼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시어머니가 돌변했다거나

시누들이 보기 싫어졌다던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시가 사람들은

그들끼리 자부심을 느끼는 그야말로 '한 핏줄'이었고

그 구성원중 하나인 남편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다.

남편은 핏줄의 편에 섰기 때문이었다.



온전히 나로 살아가다가 결혼함과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누구의 안사람이 되고야 마는 여자로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그 당시 내 삶의 많은 부분은 남편과 겹쳐 있었다.


어렴풋이

이 사람과 더 이상은 살지 않겠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뀔 때 즈음엔

이미 나는 남편과 정서적으로 헤어진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아이와 여러 상황들에 잡힌 발목 때문이었다.

한쪽 발은 집안에 들여놓고 나머지 한쪽 발은 현관밖에 나가 있는 형국이었다.


상황을 벗어나기엔 풀어야 하는 퍼즐들이 너무 많았다.

내 힘으로는 안된다고 좌절할 즈음 기댄 것은 술이었다.






직장에선 늘 칭찬을 받았다.

웬만한 남자들보다 믿을만하다고 이쁨을 받았다.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밖에서도 새는 바가지라는 평을 들었다면 모르겠는데

나는 집과 직장에서의 평가가 너무도 달랐다.


출근하면 자존감이 올라갔다.

자신감이 생겼다.

잘한다고, 넌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들었다.


비정규직임에도

그 직장을 내 생명줄처럼 붙들고 있었던 이유였다.

출근을 하면 그래도 내가 쓸모 있는 생명이라고 여겨졌다.


퇴근 이후부터 다음날 새벽 출근시간까지의 일과는

나를 양주 반 병과 아이들 웃음 속에서 방황하게 했고

늦은 시간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남편의 발소리에 자는 척을 하게 했고

매일 이어지는 시어머니의 새로운 트집에 대처하는 것이 전부였다.



집이 너무 싫은데 아이들을 내 눈에 담으려면 집에 가야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를 나가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답이 없다고 느껴질 즈음

구체적인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서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니 하루라도 아이들을 더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 살겠다는 내가 그 와중에 아이들을 더 본다니 그것도 미련스럽게 보였다.

눈이 부시게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을 보면서

삶과 죽음을 매일 저울질했다.




초점 없는 멍한 눈으로 버스에 한 시간 동안 가축처럼 실려 퇴근을 했다.

정류장에 내려 집 앞에 있는 편의점까지 왔을 때 간이 테이블에 남편이 앉아있었다.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은 술 마실 사람을 못 구한 모양이었다.



일주일에 5일 이상을 술자리에 있다가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었다.

집이 코앞인데 굳이 편의점 앞에서 저렇게라도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


보기 싫은 아내가

차가운 집안의 공기가

그럼에도 웃어 보여야 하는 아이들이

귀찮아도 대답을 해줘야 하는 늙은 어머니가 집에 있어서겠지.


집에 들어가기 싫은 걸음을 편의점 간이의자에 붙들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앉아있는 편의점 바로 앞을 퇴근하는 내가 지나갔다.

우리는 마치 지나가는 행인을 보듯이 아무렇지 않게 딴 곳을 봤다.


빨리 걷는다고 걷는데 느린 화면처럼 느껴졌다.


나 역시  퇴근 후 녹초가 된 몸으로도 앞치마를 매고 집안일을 시작하기 전에 늘 하는 의식은 머그잔으로 양주를 물 마시듯 두 컵 비우는 것이었다.


술기운이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시어머니를 대할 수도 없었고

억지로 아이들에게 웃어 보일 수도 없었다.


반쯤은 정신이 나가 알코올로 헤롱 거릴 때야 집안일을 할 수 있었고

아이들과 그림 그리기를 하고 머리를 감겨줄 수 있었다.


"언제까지 아비랑 그렇게 말도 안 하고 지낼 거냐. 네가 그러니까 아비가 맘도 못 잡고 밖에서 늦게 들어오는 거 아니냐."


술기운이 있어야

시어머니의 타박을 분노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한 귀로 흘릴 수 있었다.



나는 늘 퇴근을 하고 와서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데

남편이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는 것이 왜 내 탓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어머니가 애지중지했던 그 막내아들은

엉망이 되어가는 자신의 가정을 어찌할 생각도 못하고

그 상황에서 도망치거나 관망하는 것으로 시간이 그저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전쟁통이 되어가는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

편의점에 혼자 대피해 있었던 그날처럼 말이다.



다른 일이라면 엄마와 누나가 해결해주었을 것인데

자신이 가장인 이 결혼생활만큼은 대신 해결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을 끊어내고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주고

어디부터 바로잡아야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나는 그 모든 상황에 지쳐갔다.

 

스스로 살아갈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남편은 자꾸만 엇나가고 마음의 문을 닫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야 하는지 몰랐다.


좀 더 노력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나를 다그쳤고

모든 것이 너의 불찰이라고 나무랐다.

일을 나가는 여자를 대신해 어머니가 고생을 하는데 고마운 줄 모르고 불평한다고 했다

우리 엄마를 뒷방 노인 취급했다고 시누이들이 거들었다.


타이르는 듯하면서도 끝내는 자신의 편을 드는 누나들의 보이지 않는 응원은

남편의 그런 생각을 더욱 굳혔을 것이다.

'그래 저 여자가 이상한 거지.'




휴일 아침이었다.

전날 또 과음을 한 남편이 늦잠을 자고 있었다.

어머니가 외출을 하고 안 계셨다.


아들을 위해 늘 어머니가 끓였던 해장라면을 그날은 내가 끓였다.

맛있으라고 계란을 풀었다.


한동안 서로 대화가 없었던 남편을 어색하게 깨웠다.


라면 먹으라고

이거 먹고 나랑 이야기 좀 하자고.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가 없었다.

화해를 해서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아이들이 너무 어렸다.


잠결에 내가 깨운 소리를 들은 남편은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갔다.


씻고 나와서 먹으려 나보다 했는데

얼굴에 물만 묻힌 채 나오더니 옷을 챙겨 입고 나가버렸다.

전염병이 있는 사람을 피하듯 황급하게 나가버렸다.



쌩하고 지나간 식탁에 불어버린 라면이

내 마음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잠시라도 나랑 한 공간에 있기 싫다는 표현이었다.




쾅 닫힌 현관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신이 좋아서 이러는 아니야. 나도 자존심 내려놓고 대화를 시도하는 거야.

노력이라는 걸 하려는 거야 나도.

당신은 나를 아직도 뭔가 더 길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당신 눈에는 애들이, 우리 애들이 안 보여?'


불어서 국물이 보이지 않는 라면을 젓가락으로 저었다.

면이 한 덩어리로 함께 움직였다.

젓가락에 말아서 입에 넣었다.


먹었다.

거절당한 내 마음과 이 시간을 감추고 싶었고 

무안함을 없애고 싶었다.

내 뱃속에 다 집어넣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서로가 풀어주지 못한 오해와

잠깐의 땜질에 그치지 않는 엄마와 누나 찬스로 남편은 늘 버텼고

우리의 결혼생활은 아직 너무나 어린아이들을 태운채 바다 한가운데 좌초하고 말았다.



배를 움직이기 위해 내저을 노도 없었고

우리를 변화시킬 순풍은 더더욱 없었다.


멈춰버린 배안에 멍하니 있었던 나는 결심을 했다.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배를 다시 움직이게 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배우자를 보면서,

나는 손과 마음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낡은 널빤지들을 모아 뗏목을 만들었다.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도움을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초라한 뗏목이 다 만들어지던 날,

조심조심 아이들만 안아서 뗏목에 태운 뒤 그 움직이지 않는 배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나는 연습해본 적 없는 서투른 별거와 이혼을 강행했다.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내 운명은 이것이었다.

<여자 몸으로 혼자 애들을 고생하며 키울 사나운 팔자가 아니라,

행복하자고 했던 결혼생활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을 때

스스로 힘을 내어 그 상황을 바꾸고 새롭게 내 삶을 개척할 운명>


나는 좀 더 주도적인 팔자(?)였던 것이다.

이혼이 부끄러운 일이거나 죄가 아닌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이제는 나를 보고 수군댔던 사람들보다 훨씬 주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항우울제만큼이나 열심히 털어 넣었던 제일 독한 술을 이제는 마시지 않는다.

술은 기분이 좋을 때 조금씩 한다.

그나마도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아까워 마시는 횟수가 거의 없게 되었다.


자책하던 일기를 멈추고 어제보다 하나라도 나아진 모습을 칭찬하는 일기를 쓴다.

스스로를 격려하는 일기를 쓴다.


죽을 날을 기다리던 힘 빠진 가축처럼 누워있는 게 아니라

내 발로 내 의지로 걷고 뛴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온 나를 스스로 칭찬해준다.



최대한 많이

풍성한 하늘과 구름을 옮기는 바람, 들풀, 노을을 본다.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표현하지 않는 사춘기의 슬픔과 방황을 껴안기도 하고

여드름 피부에 좋을 로션도 함께 고민하며 산다.



한동안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했던 누군가도

어떻게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살아낸 시간들이 남았을 것이고


나처럼 다른 방향을 결정했던 사람도

여기까지 와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느 인생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나중에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때의 결정은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했더라면'

이 말의 의미를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다.




내일 새벽

핑계를 찾지 않기 위해

나는 침대 옆에 운동복을 놓아둔다.



지금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



그것보다 훗날의 나를 빛나게 해 줄 것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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