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픈 것이야 둘을 키워내면서 수없이 겪어냈던 일이었겠지만 열이 나고 아무것도 못 먹고 축 늘어져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장난감을 거실에서 어지른다고 야단쳤던 것, 우유를 쏟았다고, 씻기고 나서 바로 쉬야를 했다고 툴툴거린 며칠 전의 일들이 그렇게 후회가 될 수가 없었다.
엄마의 야단에 훌쩍이기도 하고 때로는 눈을 동그렇게 뜨고 배시시 웃으며 멋쩍어하는 아이였지만 그땐 그래도 씩씩했다.
온 방안을 뛰어놀며 나에게 잔소리와 동시에 미소를 짓게 하는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회사에 '염치불구'하고 휴가를 냈다.
아이가 아프면 똑같이 직장생활을 해도 엄마가 회사와 어린이집과 남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정해져 버린 현실.
출근 가방을 내팽개치고 아이 짐을 꾸려 며칠 동안 병원에 있었다.
그 작은 손등에 링거를 꽂은 열이 펄펄 나는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밤이고 낮이고 병원 복도를, 병원 현관을 느린 걸음으로 왔다 갔다 했다.
아이만 아프지 않다면 이제 집안을 어질러도,
물장난을 해도 뭘 해도 다 좋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 말이다.
간호를 해야 하는 것쯤은 엄마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그것을 힘들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일 다니는 엄마를 둔 나의 꼬마들에게 미안했다.
아직 엄마를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힘든 어린아이들이라 설명을 해줄 찰나도 없이 아이가 일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섰던 때였다.
어김없이 시누가 전화를 했다.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시어머니에게 듣고 위로 겸 전화를 했는데 꼭 빼먹지 않고 하는 말이 있었다.
"엄마 기도가 부족해서 아이가 저렇게 아픈 거야. 하나님이 아이를 통해 올케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하시는 거야.
무조건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애가 엄마 때문에 아파서 되겠어?"
그야말로 신앙 부족으로 아이를 아프게 하는 천하의 몹쓸 엄마였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고 뭘 그렇게 빌어야 할까...
가뜩이나 아이가 아픈 게 내 탓만 같아 고단함 중에도 믹스커피 한잔 마시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쪽잠을 자는 것도 미안해서 잘 수가 없었다.
아픈 아이를 보고 있자니
귀에 쟁쟁 울리는 시누 말이 나를 더 면목없게 했다.
결혼하면서 어머니의 강요 같은 권유로 동네 교회를 다녔다.
거기서도 역시 나는 아무개 성도가 아니라 000 권사님의 며느리였다.
어머니의 위치(?)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바쁜 직장생활 중에서도 주말이면 늘 교회에 가야 했다.
하기 싫은 교회 김장봉사를 하고
하기 싫은 아나바다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하기 싫은 구역예배에 편성되어 강제로 예배를 드리러 이 집 저 집 다니고
구역예배 식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해야 했다.
가기 싫어하는 내가 이상한 줄 알았다.
시어머니, 시누들은 당연한 듯이 이야기했고
교회 안 가도 되는 남편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큰아이를 1월 말에 낳았는데 목사님께 유아세례를 받아야 한다며 3주가 지나자 교회에 가자고 시어머니가 성화를 하셨다.
다들 우리 손녀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다.
몇 번은 거절을 했다.
남편이라도 말렸으면 모를까 말이 없었다.
"답답해도 절대 내복 벗지 말고 양말은 항상 챙겨 신어. 사돈이 어련히 알아서 잘 안 해주겠나. 찬물 먹지 말고 베란다 찬바람도 쐬지 마라, 응?"
아이를 막 낳았을 때 멀리 고향에 계신 친정엄마가 전화해서 당부했다.
산후조리를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엄마가 당부했던 대로 수면양말과 내복을 껴입고 목도리를 둘둘 두르고 산후 부기도 빠지지 않은 얼굴로 아이를 들쳐 안고 출산 3주 만에 교회에 갔다.
권사님네는 이렇게 며느리가 신앙이 깊고 잘한다며 성도들이 칭찬했다.
교회 사람들의 칭찬에 시어머니가 뿌듯해했다.
내 아이가 받는 축복이니 그래, 좋게 생각해야지 했다.
...
우리 엄마라면
우리 엄마라면
아직 봄도 오지 않은 이 겨울에
아기를 낳고 몸조리도 끝나지 않은 나를 은혜받으러 교회에 가라고 등을 떠밀었을까.
엄마는 농사일과 직장일에 바빴다.
산후조리를 하러 엄마 집에 혼자 내려갈 수가 없었다.
소아과도 산부인과도 모두 집 근처에 있었고
시어머니는 당연히 안 갈 줄 알고 산후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디서 산후조리를 하든 어때.
그냥 내가 사는 곳이 제일 편한 거지 뭐.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그런데 막상 부기도 빠지지 않은 손으로 애를 끌어안고 교회에 나와있으니
서러웠다.
찬송가를 부르는데 간증이라도 하는 듯이
서러워서 눈물이 툭하고 터졌다.
하필 슬픈 멜로디의 찬송가였다.
하필 3절까지 있었다.
친정엄마가 부탁한 말을 지키겠다고
내복까지 겹겹이 껴입고
신발도 꺾어 신어야 할 만큼 두꺼운 양말을 신고
얼굴이 호박만큼 퉁퉁부은 25살 새내기 엄마가
아이를 안고 찬송가를 부르며
펑펑 울고 있었다.
권사님 며느리답게 얼마나 신앙이 두터운지
찬송가를 부르는데 저렇게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 하나님 앞에 눈물로 찬양했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났다.
그 시간에 남편은 집에서 늦잠 중이었다.
'아비는 불러도 꿈쩍하지 않으니 내버려두고 너라도 가자. 일하고 고단하니 못 일어난다.'
시어머니는 더 자게 놔두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직장이 같았고
같은 일을 했다.
미혼모처럼 혹은 과부처럼
남편 없이 아이를 데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일요일마다 교회에 출석을 했다.
병원에 있던 나에게
엄마의 기도가 부족해서 아이가 아프다는 시누이의 말은 지금보다 더 교회에 봉사하고 십일조도 꼭 내라는 의미였다.
어머니가 하자는 대로 주말이면 남편이랑 분리되어
고분고분 교회에 가주는 것 이상으로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을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올케가 기도가 부족해서 아이가 저렇게 아프다.'
라는 말은 아이가 아플 때마다 두고두고 내가 느껴야 하는 인두 자국이 되었다.
돌잔치를 하기로 한 날 아침에야 퇴원을 했다.
아이 컨디션을 생각해 돌잔치를 예약했던 뷔페는 양해를 구하고 취소해야 했다.
아이가 퇴원을 해서 다행이었으나 며칠 동안 아이를 안고 병원생활을 했던 나는 너무 고단했다.
집에 가서 무조건 잠을 자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잠시라도 애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휴가를 내지 않았다.
그저 퇴근하고 잠시 오는 것이 전부였다.
코를 너무 골아서 병원에 있지도 못했다.
아이가 아프니 엄마는 직장에 욕을 먹더라도
도망치듯 휴가를 쓰고 오는 게 맞았고
남편은 바깥 일하는 사람이니 안 그래도 된다였다.
병원 짐을 싸서 집으로 오니 남편이 말했다.
식구들이 돌잔치도 못하고 서운해한다고 집 앞 식당에서 간단하게 가족 식사라도 하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