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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Dec 10. 2020

엄마도 '엄마'가 보고싶어 운다

이혼 후 이야기 #.44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 하거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이른다는 40세.


공자께서 겪으셨던 40세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사십이 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아이 같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이 켜진 집이 잘 없는 새벽,

쌀을 씻어 취사를 꾸욱 누른다.


아이들 방 문을 빼꼼히 열고 이불을 차고 자는 것은 아닌지 방이 건조하거나 춥진 않은지 들어마신 방안 공기로 살핀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차 한잔을 타서 책상에 앉는다.

어제 잠들기 전 덮었던 책을 다시 꺼내서 페이지를 찾고 수첩에 적힌 스케줄을 확인한다.


직장에 매인 몸이라 매일 하는 일은 같지만

출근해서도

틈틈이 처리해야 하는 개인적인 일이나 머릿속으로 고민해두어야 하는 집안일이 많다.


직장에서는 어린 직원들에게 모범이 돼야 하고 하나라도 내가 먼저 본을 보여야 하고 때로는 혼자만 떠안고 있어야 하는 일들도 있었다.


많은 직장 업무는 나에게

씩씩하게 잘 처리하거나 아니면

펑크가 나서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 등 둘 중에 하나이다.


피드백을 좀 세게 받는 업무가 있어도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 다독이며 쉽게 잊게 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유난히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하필 그 순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념의 너울로 인해 기분이 얇은 와인잔 같은 날은


아주 작은 일에도 울컥하거나

화가 올라오거나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짜증을 꿀꺽 삼키며

내 몸에 녹여내기도 한다.


계속 반복이 여지없이 눈이 침침해지고 기분이 가라앉는다.


요즘은 40대여도 여전히 젊은 사람이건만

직장에선 40세가 넘었으니

이제 좀 더 어른스럽게 나잇값에 이은 월급값을 하라는 말들은

나를 많은 상황에서 연기하게 만든다.


어려운 대본을 소화해내야 하는

연극배우 같은 느낌이다.


...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는 새벽

혼자 주섬주섬 주방에 나가 찬물을 틀어 쌀을 씻을 때면

나는 여전히 우리 엄마의 딸인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아 손 시려. 엄마~ 이거 해줘!"

어릴 때 외쳤던 말들이 둥둥 머릿속을 헤엄친다.  


언제고 울면서 부르면 엄마가 와서 도와줄 것 같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적막이 흐르는 집안 공기와

내가 보살펴 주고 키워내야 하는

잠들어 있는 두 아이뿐.


가끔

내가 있는 이 잠깐 놀러 온 남의 집  

곧 끝날 여행 같다.


아이를 두 명이나 키우는 엄마임에도

나는 여전히 10살 11살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누구보다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노트며 일기장에 수없이 써 내려간 문장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지만 가끔 현실부정하고 싶어 하는 어린 내 모습을 마주한. 


이게 꿈은 아닐까? 혹시 내가 오랫동안 꾸고 있는 꿈은 아닐까...




파란색 낡은 플라스틱 바가지에

보드라운 어린 나물을 무치면서

"밥 먹고 자게 일어나라." 

라며 설핏 낮잠이 든 나를 깨우는 젊은 우리 엄마가 목소리가 곧 들릴 것 같다.


그럼 나는 일어나서 부엌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엄마가 나물에 살짝 두른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기분이 썩 좋아지겠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잔심부름만 잘해도

엄마가 내 모든 것을 돌봐주고 책임져 주었던 날들.


무서운 재래식 화장실에 같이 가주고

비 오는 날에는 새우깡 한 봉지를 사 주시는 고운 우리 엄마가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이곳에 여행을 와 있는 것 같다.

아니면 곧 끝날 교회 수련회 같은 것 말이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엄마는 자주 들려주시진 않았지만 희미한 옛 기억에도

나의 외할머니는 참 고운 분이셨다.



엄마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였다고 한다.

소풍 가는 날이었는데 엄마 옆집에 살던 동무가 소풍이라고 엄마가 부침개를 싸주신다라는 소릴 듣고 나도 부침개 싸가고 싶다고 아침부터 졸랐다고 한다.


농사일에 집안일에 몸이 열개라도 부족했던 외할머니는 좋은 말로 타일렀지만 엄마는 듣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미쳤지. 뭐한다고 그 아침에 그렇게 엄마한테 쎄웠는동(고집 피웠는지)!"

엄마는 그때가 생각나는지 피식 웃었다.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아침부터 혼이 났

분했던 엄마는 결국 소풍을 가지 않았다고 했다.


부침개가 없으면 안 간다고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전 내내 방구석에서 훌쩍이던 엄마는

배고픔에 지쳐 잠이 들었고 컴컴한 저녁이 되어서야 외할머니가 부엌에서 깨우는 소리에 일어났다.


"00아! 일어나라. 이거 먹고 자라." 


엄마가 방문을 열고 다보니

들에 나갔다가 머릿수건도 벗지 못한 외할머니가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기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밭일을 끝내고 어둑어둑해진 후에야 집에 들어오셨고 아침에 잔뜩 혼을 내고 갔던 딸이 땟국물이 쫄쫄 흐르는 얼굴로 방 안에서 울다 지쳐 자는 것을 보았으리라.


어렸던 우리 엄마가 본 것은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그 위에 부침개를 부치있는 외할머니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식에게 매를 들었던 아침나절이 마음이 아파 울어서 퉁퉁 부은 외할머니의 얼굴이라고 했다.


눈이 부어서 내 엄마 같지 않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종일 굶어 홀쭉해진 배를 한채 허겁지겁 들이키듯 부침개를 먹었다고 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면 엄마의 마음을 안다고 하던데 나는 출산을 하고서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할머니 말 안 듣고 징징거렸으니 소풍도 못 갔지!"

하며 엄마를 놀렸다.



그러고 나서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엄마 집에 내려가서 그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이야기의 끝을 아는 나는

엄마가 부침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스위치를 누른 것 마냥 코끝이 따끔따끔 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바가지에 든 밀가루 반죽을 휘휘 저어 널따란 솥뚜껑에 척척 부침개를 부쳐냈다며 마치 그림을 그리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평소에도 욕 한번 안 하는 노인네가 아침에 그렇게 야단을 쳐놓고 그 길로 밭에 가서 밭고랑을 무릎으로 기며 얼마나 울었겠노."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가 절정에 이를수록

나는 눈앞이 흐려지고

급기야 눈물이 쭉쭉 흘러나왔다.


소풍을 못 간 어린 우리 엄마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아침부터 야단맞고

방에 쭈그리고 앉아 우는 딸의 모습을 명치에 콕 박은채 마른 가슴을 치며 종일 밭을 매셨을 외할머니가 그려서였다.


그 젊디 젊은 새댁의 마음도 모른 채

태양은 얼마나 따사롭게 내리쬐고

산새들은 쉬지도 않고 명랑하게 지저귀었을 것인가.


"엄마가 말 좀 듣지 그랬나, 엄마가....

 외할머니가 우리 엄마 시집보내고 고생하면서 사는 거  그때 못해준 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나 말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흘겨보았다.


그쯤 되면 엄마도 울었다.


외할머니보다 이젠 더 늙은 엄마인데도

아이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우리 엄마는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워서 울었고

나는 외할머니 심정이 이해돼서 울고 

그걸 애달파하며 우는 우리 엄마를 보며

또 울었다.


내가 사십이 넘어도

엄마가 칠순을 훌쩍 넘겨도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마주 앉아 그렇게 울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살다 보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마치고

엄마한테 갈 수 있겠지.'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손꼽으며 살아가는 나를 본다.


오늘도 '어른'인 척하며 출근할 것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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