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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Dec 17. 2020

아빠 없는 입학식

이혼 후 이야기 #. 45




둘째 아이는 섬으로 이사 온 후

섬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1학년으로 입학했다.


분홍색 외투를 입히고 머리를 곱게 묶은 후 1학년 교실에 함께 들어갔다.


유치원에 다니던 그저 어린 아들, 딸, 손녀, 손자, 조카들이 자기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 초등학생이 되는 감격스러운 모습을 보기 위해 학생보다 더 많은 가족, 친척들이 동행했다.



둘째 아이는

내 손만 꼭 움켜쥔 채 기대 반 낯섦 반이 된 표정으로 졸랑졸랑 언니가 다니고 있는 섬 동네 초등학교에 들어섰다.


입학식 전날

새 물건 냄새가 나는 필통, 연습장, 실내화등을 머리맡에 고이 두고 잠들었던 아이였다.


큰아이 입학식이 있었던 2년 전이 문득 떠올랐다.






큰아이가 입학했던 초등학교는

결혼해서부터 쭉 살았던 동네에 있던 익숙한 학교였다.


 나 역시 다른 부모들과 다를 것 없이 첫아이, 첫째에 대한 신기함과 기대가 컸다.


아이의 성장 속도에 따라 모든 육아의 첫 경험을 큰 아이와 함께 겪어냈었다.


동시에 결혼생활에서 오는 낯선 우울함과 부부 사이의 삐걱거림 또한 같이 겪어내고 있었다.



큰 아이가 입학하던 날

우리는 상의 없이 각각 휴가를 냈다.


일찍 아이를 깨워 머리를 곱게 빗겨주고 옷을 입혀놓았더니

남편은 큰아이를 혼자 데리고 학교에 가버렸다.


황급히 외투를 들고 따라나갔다.


저만치 아빠 손을 잡고 아파트 골목을 내려가는  딸이 보였다.



가끔 확인하듯 다짐받듯 아이는

뒤를 돌아 엄마를 쳐다봤다.


같이 걷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남편과 아이를 쭐레쭐레 쫓아가는 듯한 모양새에 비통함과 모멸감에 눈물이 났지만 아이가 뒤돌아보려는 순간에는 입술을 옆으로 벌려 미리 씩 웃었다.



'괜찮아 아가 괜찮아.

엄마 괜찮아, 너 뒤에 있을게. 꼭 따라갈게.

엄마가 멀리 서라도 꼭  서있을게.  


누구보다 우리 딸 입학 엄마가 축하해.

엄마 괜찮으니까

넘어지지 않게 앞을 보고 걸어가, 아가.'



동화책이나 공익광고 포스터처럼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신나게 학교에 등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 앞에서는 웃고 있었지만

그 당시 남편과는 대화도 없이 나에게 엄마자격이 없는 여자, 이 집에서 나가라 라는 문자를 받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만 보아도

걷는 모습만 보아도 싫었지만

아이의 첫 입학식에서 그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있기 싫었다.

"내가 데리고 갈 거야. 그 손 놔!"

 라며 신경전을 벌일 순 없었다.


아이에게 그런 광경을 보여주느니

누가 데리고 가든 무슨 상관인가.


엄마와 아빠가 사이가 나빠서 따로 걷는 게 아님을

마치 엄마가 나갈 준비가 조금 늦어 뒤따라 나오는 것처럼 뒤를 쫓아갔다.

그저 아이가 이상한 기류에 불안하지 않길 바랬다.


이미 느끼고 있었겠지만 굳이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전남편은 입학식에서 같은 유치원을 졸업한, 안면이 있는 친구 엄마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대화를 했다.


나는 거기 끼지 못하고

몇 발자국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흔히 영화에서 나오는 쇼윈도 부부라도 되었으면 남들 앞에서 다정한 척이라도 했을 텐데

벌레 보듯 나와 멀리 떨어져 서 있는 남편이었다.  



아이가 보는 동안만이라도, 아이와 관련된 지인들이 있는 곳에서만이라도 좋은 척을 할 수는 없을까...


아이 엄마들은 아빠가 어쩜 이렇게 다정하고 아이를 잘 챙기시냐며 연신 남편을 칭찬을 했다.


아내 없이 혼자 딸을 키우는 씩씩한 아빠 같아 보이길 원는지

친화력이 남달랐던 남편은

주부라도 된 양 엄마들과 마구 수다를 떨었다.



아이는 담임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또래들과 줄을 서있으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아이가 돌아볼 때마다

멀리서

개그우먼처럼 웃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름표를 목에 건 아이가 씩 웃었다.



웃고 있지만 눈은 불안해 보였다.

내 딸의 표정은 엄마라면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젖을 먹이면서 눈을 맞추고

안아주면서 씻기면서 눈을 맞추고

하루에도 수십 장 사진을 찍어주면서

아이의 동공만 흔들려도 작은 표정 하나에도 무엇이 필요한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세 알 수 있는 사람이 엄마 아닌가.


아이는

좀처럼 말이 없는 엄마와

유난히 말이 많은 아빠의 모습을

불안게 흘끔흘끔 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이 슬펐다.


할 말은 많은데 할 수가 없는, 정리되지 않은 복잡함이 눈에 서려있었다.


차라리 느껴지지 않는다면 내 속이라도 편할 텐데 또래에 비해 키가 컸던 아이의 추워 보이는 뒷모습만 보고도 마음이 조각조각 났다.



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은 없다.



엄마 아빠와 함께 찍은

막 꼬꼬마 티를 벗어낸 아이의 여덟 살 사진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입학식이 끝나고 서둘러 아이손을 낚아채듯 잡고 교문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뗐다.


"아빠랑 엄마랑 사진 한 장 찍을까 우리?"


나라면 아이에게 먼저 물어봤을 것이다.


시어머니는

'너희 엄마 아니다! 할미한테 와서 놀아라.'라고 나 들으라는 듯이 윽박질렀던 시절이었다.


남편도 시어머니도 아이에게서 나를 떨어뜨려놓기 위해

아니, 아이들이 엄마보다 할머니와 아빠를 더 좋아한다고 보이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빈틈을 찾아 겨우 손가락을 끼워놓고 피가 흘러도 그 틈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버티고 있었다.


아이들을 볼 수만 있다면,

아이와 함께 숨 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해야 했다.  


편은 나보다 높은 연봉과 지금까지 시어머니가 양육을 도와줬다는 것,

애엄마라는 사람이 '자기 생각만 하고 일한다고 나가기 때문에 가까이 사는 시누들이 자주 와서 들여다보고 보살펴준다.'는 양육환경을 이유로 아이들을 저 여자에게 줄 수 없다는 게 백번 맞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내세울 것이 없었던 그 당시의 나로서는 그저 힘없이 손가락 하나라도 끼워 넣은 채 아이들을 데리고 나올 수 있을 때까지 내쳐짐을 당하지 않기 위한 애를 쓰고 있어야 했다.





2년 전 그날의 기억을 애써 지워보려고 애쓰면서

은아이 초등학교 입학식에 다. 

하지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도 지금은 얼마나 좋은가.


아이손을 잡고 학교에 같이 들어갈 수 있고

불안하지 않게 뒤에 든든히 서 있어 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2년 전과 다르게 아이 아빠는 휴가를 내서 오지 않았다.


섬으로 이사한 후엔 늘 '섬이라 멀어서 못 온다'였다.


"아빠 못 와서 너무 서운하지? 그래도 다음 달에 육지 나가면 친구들 이야기랑 학교 이야기 꼭 해 드려 알았지? 또 나중에 여기 놀러 오시면 학교도 같이 와보면 되잖아. 네가 이곳저곳 소개도 시켜주고 말이야."


아이는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주섬주섬 말을 걸었다.

그저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였다.


그렇게 엄마랑 둘이서만 입학식에 갔던 아이가

섬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육지로 전학을 갈 때까지

아빠는 한 번도 와보지 않았다.


3년을 우리가 섬에서 지내는 동안

아이 아빠는 배가 도착하는 여객선터미널에서만 아이를 기다렸다.


그날 1학년 1반에서 자기 자리를 배정받게 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학교 행사 때마다 휴가를 내고 혹은 양해를 구하고 급히 찾아가 사진을 찍어주었다.


부모님 참관수업 때면

<우리들의 솜씨> 게시판 앞에 자리 잡고 서서

돌아보는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는 부족한 엄마를 생각는 듯이

학교에 잘 적응해 주었다.

매일 쓰는 일기를 통해 나를 웃게 했다.  


"! 우리 학교 쉬는 시간은 주사 맞는 시간 같아요."


"왜?"


"시간이 너무너무 빨리 가버려서요!"


어렸던 아이가 육지로 가서도 초등학교를 두 번을 더 옮긴 뒤 졸업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아이 아빠를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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