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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Dec 21. 2020

이혼했지만 가난하게 살고 싶진 않다(1)

이혼 후 이야기 #. 46




"1층 다가구 3천만 원에 전세 나왔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주인이 집수리나 뭐 그런 건 안 해주신다고 하네요. 그거 감안하고 보시려면 보셔도 돼요."


남편과 이혼 전 따로 살기로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올 때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급한 대로 보험대출을 3천만 원 받아 집을 구하러 다녔다.


3천만 원에 구할 수 있는 집이 있겠느냐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연락처를 남기고 온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그 가격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전세 들어갔던 그 동네는 재계발 지역이었고 투자를 위해 집을 사뒀을 집주인은 수리의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도배나 장판, 집수리에 필요한 그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직장이 가깝고 아이들 학교와 어린이집이 근방이었기에 재고 따질 것도 없이 감사합니다 하며 계약을 했다.


머지않아 허물고 말 오래된 주택을 공들여 계약하러 오는 집주인은 없었다.

계약을 위임받은 부동산 사장님만 만나 계약서를 쓰고 키를 받았다.

근처 열쇠집에 가서 가장 저렴한 디지털 도어록을 샀다.



큰길 건너로 보이는 20평 미만의 오래된 아파트가 그렇게 부러울 수없었다.


'나도 주차장이 있는 저런 아파트에 살아봤으면, 샤워할 때 손이 천장에 닿지 않는 욕실에서 씻어봤으면... 세면대가 있는 화장실이었으면...


부러운 마음이 참 많이 들었다.

나보다도 아이들이 불편해할까 봐 추울까 봐 늘 걱정이었다.


150만 원이 조금 넘는 내 월급.


늘 쪼들렸고

아이들 간식을 사줄 때마다

돈을 쓸 때마다

속으로 남은 생활비를 급하게 계산해봐야 했다.






가장인 남편에게만 해주던 건강검진을 서른이 된 기념으로 나도 해보자 싶어 했는데 암을 발견했다.

결혼하기 전과 신혼 때 가입해 둔 보험에서 보험금을 꽤 많이 받았었다.

 

그때 마침 동네 근처에 택지개발이 되면서 무주택자였던 우리 부부는 청약을 했고 당첨이 되었다.


주위에서 로또라고 하는,  수억 원에 이르는 분양가의 아파트가 설마 당첨되겠어하며 재미 삼아 넣어보자던 청약이 당첨되고 나자 문제는 계약금 10%도 없는 우리의 주머니 사정이었다.


시가 사람들끼리 자주 모여 음식을 해 먹고, 명절엔 우리 집에서 모든 준비를 했고, 누구 생일 때마다 또 모여서 음식을 해 먹고, 누가 입학하면 축하금을 주고 또 조카가 결혼을 하면 돈을 걷어서 내고....


맞벌이를 했지만 시어머니에게 매달 드리는 용돈 말고도 시가에 들어가는 돈이 늘 있었다.


식구들이 와서 밥 먹는데 야박하게 조금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고 소박하게 먹는 집안도 아니었다.

장을 봐와서 거하게 차려먹고 밥상을 물린 뒤에는 치킨과 피자를 시키고, 술안주도 별도로 있어야 했다.


생활비를 아무리 쥐어짜 봐도 시가 행사에 발을 끊지 않는 이상 지출을 더 줄일 수가 없었다.

남편은 후배들 밥 사 준다, 동료 승진 회식이다 하며 카드를 쓰고 다녔다.  


사에서 약간의 보증금만 받고 내주는 낡은 직원 주택에 어머니까지 5인 가족이 살았지만 집 문제가 당장 급하지 않자 고스란히 생활비, 가족 행사비로 다 나갔었다.


시가에 쓰는 돈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남편이 싫어했다.

형제들에게 무엇이든 퍼주는 걸 좋아하는 남편이었다.


"형님, 누나들 다 모여서 먹고 노는 것도 좋은데 우리도 이제 아끼고 모아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낡은 집에서 살 순 없잖아."


이제는 돈을 좀 아끼자고 했다.

알았다고 남편은 대답했지만

회사에서 직원가로 살 수 있는 것을 몰래 사서

주차장에서 형, 누나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더 말했다간

형제간의 우애조차 나누지 못하게 하는

야박한 여자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시가 행사에는 돈을 선뜻 쓰는데

친정에 갈 때마다

엄마 드릴 용돈에서 슬그머니 십만 원씩 빼게 되는 나를 보며

마음이 서글펐다.



가계부를 늘 썼지만, 남는 게 없었고 저축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분양아파트 계약금을 낼 수 있는 현금이라곤 내 보험금밖에 없었다.


'어차피 우리 집인데 뭐, 아파트 나중에 팔면 다시 내 보험금을 돌려받아야지.'


순진한 생각을 했다.



남편은 나의 암수술 보험금을 들고 아파트 계약을 하러 갔다.

청약할 때부터 남편의 명의였다.


그렇게 내 품에 있던 4천만 원이

쑥 나갔다.






남편이 아파트 계약금을 치르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직장선배가 권유한 것인데 당진 어디쯤에 좋은 땅이 나왔다며 작은 땅은 3천만 원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했다.

6개월 만에 두배 세배는 될 거라는 땅이었다.


"그렇게 좋은 땅이면 그 선배가 사면되지 왜 우리한테까지 정보가 오겠어? 그리고 거기 직접 가본 거야? 알아는 본거야?"


가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선배 말은 틀림이 없다고 했다.


"이건 앞으로의 내 치료자금이야. 당장 쓰지 않아도 두고두고 내 몸을 위해서 써야 되는 거야..."


"알아, 그러니까 6개월 아니 1년만 있다가 두배 세배로 뻥 튀겨서 준다니까? 진짜 이번엔 틀림없어. 안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남편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가본 적도 없는 곳이지만, 직장선배가 거짓말을 했을 리도 자신에게 사기를 칠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내 보험금이야 내 보험금...'

울고 싶었다.

움켜쥐고 못주겠다고 하면 내가 못된 여자가 되는 것 같았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이룩한 모든 재산은 부부 공동의 것이라지만 암은 내가 걸렸던 것이고 그 암을 제거하는 수술도 내가 받았다.


남편은 계속 생각해보라고 졸랐고

결국 남아있던 내 보험금 3천만 원을

남편 통장으로 그렇게 이체했다.


몸은 아팠지만

언제라도 기댈 수 있는 꽤 많은 금액의 돈이 있다는 생각에 알게 모르게 한동안 든든했는데

갑자기 허전해졌다.


입고 있던

내 온기가 여전한 따뜻한 외투를

빼앗긴 느낌이었다.


'... 괜찮아. 아파트가 지어질 거고, 땅을 사둔 거니까...'

불안한 마음을

애써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두었다.



남편은 내 보험금 3천만 원과 바꾼

영수증 한 장을 들고 왔다.


여기서 더 아프면

잠시 휴직을 하면서 쓸 돈도

좋은 곳에 가서 편하게 쉴 돈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두배, 세배로 불어날 거란 남편의 말은 믿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이니까, 가정일이니까 내가 양보하고 협조하는 게 맞을 거야, 애써 위안을 했다.



돈을 가져가며 살갑던 그날 이후

퇴근이 점점 늦어지던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알게 되었고

사실을 말해 달라는 나를

의심병이 들었다,

쪽팔린다고 했다.


나는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것에 대해

물음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잠든 시간이나

혹은 문자메시지로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당신 암 걸린 게 우리 집안, 누나들 탓이라도 된다는 거냐? 당신 성질이 못돼서 걸린 거지!"


남편은

내가 평생 잊어버리지도 못할 말을

뱉었다.




혼자 정신과 약을 먹다가 용기 내어 남편에게 털어놓은 이후,

남편은 내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불안정한 아내라고 말하고 다녔다.


와이프가 당분간 가족모임에 가기 싫어한다는 말과 함께 정신과 약 복용을 이야기했고

시가 사람들은 그게 우리 탓이냐고 술자리에서 언성을 높였다.


이렇게 즐겁게 모이는 가족이 어디 있냐고

그게 왜 싫은 거냐고

'우리가 더 정신병 걸릴 지경'이라고 억울하다고 했다.



직감적으로 내 돈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독립할 준비를 하면서

남편에게서

이 집안에서

내 결혼생활이란 공간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로 상처만 주는

보이지 않는 지옥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땅을 계약했다는 남편이 받아 온 서류에 적힌 부동산에 전화를 했다.

"작년에 되파시고 돈을 받아가셨는데요."

작년이라니... 나에겐 아무 말도 없었다.


남편에게 문자를 했다.

땅을 사겠다고 내 보험금을 가져가 놓고 어떻게 된 거냐고.


남편은 회사 후배가 급하다고 잠깐 쓰고 돌려둔다고 해서 빌려줬다고 했다.


애써 분노를 누르고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런데 아직 못 받았다는 거잖아. 내가 그 후배한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부탁해볼게."


남편이 친하게 지내는 후배들이라면 나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남편은 끝내 그 후배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았다.


정말 후배에게 빌려줬는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남편의 침묵으로 인해

내 보험금 3천만 원은 누구에게 갔는지도 모를

잃어버린 돈이 되어버렸다.


불덩이 같은 화가 가슴을 짓눌렀다.


서로 대화도 없이 살던 시간들이었고

급하거나 공동의 일은 문자로만 통보하던 날이었다.


내 보험금을 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문자를 보내면

'돈 돈 거리지 마. 내가 더러워서라도 줄 거니까!'

라는 말로 되돌아왔다.


돈 돈 거리는 여자

돈밖에 모르는 여자

돈에 목숨 거는 여자...


자다가도 명치가 불에 덴 듯 뜨거워서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몸에 휩쓰는데도

더웠다.

갑갑했다.




우리는 당첨되었던 아파트가 다 지어지기도 전에 이혼을 하기로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짐을 싸서 나오면서 남편을 공증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행방조차 이야기해주지 않는 내 보험금처럼

이렇게 남편과 헤어지면 아파트 계약금마저 못 받을게 뻔했다.

아파트는 남편의 명의로 계약이 되어 있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재산이었다.


아파트가 준공되는 대로 매도하여 000에게 최초 계약금 4천만 원을 입금하겠습니다.
토지매입으로 가져간 3천만 원도 협의이혼 기일인 00월 00일까지 입금하겠습니다

부부가 와서

남처럼 삭막하게 도장을 찍는 것을

사무실 직원은 말없이 공증해주었다.


남편은 순순히 도장을 찍었다.

내 보험금에 대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집에서 나가지 않을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보기 싫은 아내를 내보내기 위해


돈 돈 거리며 자꾸만 벌처럼 성가시게 하는 여자를

내보내기 위해

공증 문서에 서명을 해달라는 대로 해주었다.



공증문서를 꼭 움켜쥐었다.

마치 내 목숨줄 같았다.

반드시 되찾을 거야. 반드시


...

남편이 언제 줄지 모르는 보험금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달동네 좁은 집에서

생활비 용도로 쓰던 카드를 잘랐다.


카드내역과 지출내역을 나열하는 것뿐이었던

가계부,

그 앞장을 다 찢었다.



남편과 함께 살며 지출을 했던 흔적이었다.



새로 날짜를 적었다.


200만 원이 채 되지 않던 월급이지만

매달 무조건 나가야 하는 고정지출과

아이들 입으로 들어가야 하는 부식비를 제외하고

무조건 다른 계좌에 이체해버렸다.


한 달을 무감각하게 카드로 쓰고

이번 달 월급을 지난달 카드대금으로

메꾸는 반복적인 월급쟁이의 삶...


신용카드 없이

통잔 잔고에 남아 있는 돈으로만

한 달을 살아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까지

꼬박 100일이 걸렸다.



아이들과 메뉴를 고를 때 가격표 안 보고

음식 사진만 보고 고르는 날을

내가 만들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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