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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Dec 25. 2020

이혼했지만 가난하게 살고 싶진 않다(2)

이혼 후 이야기 #. 47





메뉴판 가격을 흘끗거리지 않고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것으로

주문할 수 있는 능력.


나는 그것이 갖고 싶었다.


저축을 하지 않고 다른 물건을 사지 않고 물론 그렇게 몇 번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돈을 쓰고 나서도 남은 생활비에 대한 걱정이 되지 않아야 했다.


아이들은 내 월급이 오르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랐다.


월급날이 되어서야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나 치킨을 시켰다.


아이들이 많이 먹기 시작하자

정육점에서 고기를 끊어와

집에서 삶았다.






정규직이 되면서 공제되는 세금도 늘었지만

어쨌거나 몇만 원씩 월급이 올라갔다.


돈 없던 시절에 맞춰져 있었던 지출이 조금씩 늘어나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물론 그래 봐야 고기를 한 번쯤 더 먹을 수 있다는 것과

피자를 좀 더 맛있는 곳에 주문할 수 있다는 것 정도...


지출이 나도 모르게 꿈틀거리며 커질 기미가 보였다.

 

마음을 다잡았다.

고정으로 나가는 금액을 제외하고는 마치 애초부터 없었던 돈처럼 모조리 다른 계좌에 모았다.


명절 축하금이 나오는 달에도

성과급이 나오는 달에도

가입한 보험에서 아이들 연령에 맞추어 축하금이 나오는 것도 따로 떼서 모았다.


회사 연차가 쌓이고 직급이 높아져도

월급이 늘 고정지출만큼만 나온다고 스스로 체면을 걸었다.


모든 돈은 입금되자마자 다른 계좌로 보내버리니 사실 넉넉함을 체감할 일도 없었다.


주위에서는 연말 보너스가 두둑하게 나오면 냉장고를 새로 사고 소파를 바꿨다.

그리고 차를 바꿨다.


수술 후 등 언저리가 늘 추웠던 나는

두툼한 명품 잠바가 부럽기도 했다.

남들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는 작은 가방도

부러웠다.


그래도

나는 착실하게 모으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며 지갑을 닫았다.





아이들이 태어나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때부터 주변에서 받는 용돈이 있었다.


천 원, 이천 원이었다.


출금 카드가 없는 계좌를 하나 만들고 거기에 넣었다.


세뱃돈을 받거나 외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으면

"엄마가 나중에 줄게."

하고 받아서 곧바로 통장에 넣어버렸다. 


아무리 혼자 하는 살림이 어렵더라도

아이들 코 묻은 이 돈만은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이 돈의 개념을 아는 나이가 되고서는 

자신들이 받은 돈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하는 바람에

절반은 아이를 주고 절반을 또 통장에 넣었다.


아이들이 교복을 입으면서부터는

교통카드를 충전해주고 별도로 약간의

용돈도 주었다.


아이들은 용돈을 각자가 스스로 관리했다.



아기 때부터 천원도 쓰지 않고 모아뒀던 용돈을

10년 넘게 통장에 넣고 보니

1,000 만원이 넘는 현금으로 쌓여 있었다.




시중은행 입출금계좌에는 정말 새 모이만큼의 이자만 나왔다. 


증권사에서 CMA 계좌를 개설하여 옮겨 두기도 했고 직장인을 위한 한시적 특판 적금상품이 나오면 거기에 다시 매달 이체를 하며 몇만 원이라도 불렸다.



매일 빠듯한 가계부를 쓰며 아이들을 키워가던 중 

남편 명의로 되어있던 분양아파트가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천만 원 입금해, 그거 내 돈이야."



남편의 예전 말들이 귀에 들리는듯했다.


-돈돈 거리지 마. 보험금이 왜 니돈이야?

그렇게 돈돈 하고 싶냐?-


내 성질이 못돼먹어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줘서 암에 걸렸다고 했다.


내 몸에서 암덩이를 꺼냈는데 그래서 받은 돈인데 돈돈 거린다고 했다.


...


이젠 더 봐야 할 눈치도

더 조심해야 할 필요성도 없었다.


문자에 느낌표를 더 붙여서 보냈다.


"내 돈이야. 그거!

 보내! 

공증에도 분명히 아파트 팔리면 준다고 했어."


예전에 3천만 원을 맥없이 뺏기고 원망 한번, 큰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제는 주장하지 않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손가락 사이 모래알처럼 스스륵 없어질 것 같았다.


미친 여자처럼

그래, 돈에 환장한 여자처럼 문자로 몰아붙였다.


공증을 받아둬서일까.


얼마 후 남편은 나에게 보냈다.

내 돈.

4천만 원.


1000만 원씩 통장에 네 번 찍힌 그 숫자.



암수술 후 몸을 추스르고 있는 와중에

시가 식구들이 또 모인다고 해서 외출을 했던 그날

보험회사로부터 암 보험금이 입금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나는 더 뭉클했다.


병에 걸린 내 몸을 위로했지만

통장에만 잠시 들어왔을 뿐

한 번도 손에 만져보지 못했던 보험금이


죽을 때까지 내게 오지 못할 것 같던 돈이


내 계좌에 숫자로 찍혀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돌고 돌아 그렇게 내 보험금은 다시 내 품으로 들어왔다.


4천만 원.... 4천만 원이라...


벗겨졌던 외투를 다시 입은 느낌.

나는 그 1000만 원이 네 번 찍힌 통장을 들고

등받이 없던 은행 대기의자에 앉아 

울었다.


통장을 든 손을 바들바들 떨며

창피한 줄도 모르고

오른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울었다.


돈 이야기하려면 애들이나 보내라고 해서 보험금 이야기를 쉽게 하지 못했다.


최대한 기분을 거슬리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았다.

재촉하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여차하면 기분 나쁘다고 또 견물생심이라고, 나에게 돌려줘야 할 돈을 주지 않을까 봐 수년간 매일을 맘 졸이며 살아있는 동안 다시 찾을 수나 있을까 조바심으로 기다렸던 돈이었다.


어쩌면

나를 살리거나 죽일 수도 있는 돈이었다.


그 돈이 들어왔다.


은행에서 울고 있으니 청원경찰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보이스피싱은 아니라고 하고 은행을 나왔다.






집으로 온 나는 그 돈 역시 다른 계좌로 넣었다.


절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야. 누구한테도...


그렇게 4천만 원은 찾았지만, 남편이 후배에게 빌려주었다던 돈은 이혼소송 때도 받을 수 없었다.


상대측 변호사는 이미 위자료에 달하는 4천만 원을 입금해줬지 않냐고 주장했고


나는 변호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그건 내 보험금이었는데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이혼소송에서 양육권과 친권을 뺏겼지만

내 보험금이었던 3천만 원과

별거 후 부담하지 않았던 양육비 소급분도 면제를 받았다.


가정 파탄 유책에 대한 위자료 또한 면제를 받았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므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

남편은 그 당시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새 출발을 하려는 그 사람에게 돈은 절대적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남편은 재혼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변호사를 사서라도 경제적인 책임을 덜어내야 했을 것이다.



지난날 보험금을 양보한 것은

내 책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뭘 보고 그렇게 줘버렸을까.


다 나의 불찰이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해봐야 나의 무지함과 나약함을 광고하는 것 밖에 더 됐을까...


잊기로 했다.


그 3천만 원도

결혼 생활도

남편이었던 그 사람도 말이다.



보험금을 되찾은 이후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재테크에 관련된 영상을 보고

가계부를 또다시 수정해 나갔다.



아이들 용돈 천만 원과

아껴두었던 보험금 일부를 더해 국내 대기업 주식을 샀다. 


나는 워낙 숫자에 약하고 이해력도 부족하며 머리가 명석하지 못하다.

그래서 설명을 들어도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주식을 어떻게 사는지만 겨우 알았기에

주식계좌를 만들고 아이들 용돈으로 주식을 사는 것 까지 한 뒤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매일 아침 핸드폰 주식 화면에 머리를 박은채

흡연장을 왔다 갔다 하는 동료들

'단타로 얼마를 벌었네.'라며 난리법석을 떠는 것을 보다.



대기업 주식을 샀던 나는 그냥 묻어놓고 잊어버렸다.


부식비를 아껴서 얼마가 남으면 똑같은 주식을 한주, 두 주 사모았다.

그리곤 또다시 잊어버렸다.






'부동산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침체기이다. 거래가 없다'

라는 말들이 뉴스에서 나올 즈음

언니가 전화를 했다.


"전세 끼고 아파트 하나 사놓지 않을래? 서울에 있는 아파트야."


서울 어디라고 해도 잘 몰랐다.

다만 사람들이 비싸다고 하는 브랜드의 아파트였고

소형 평수였다.


전세가와 매매가의 차이가 3000만 원밖에 나지 않았다.


누구에게 뺏길세라

통장에 묻어두고 건들지도 않았던 보험금으로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긴 내 명의의 아파트였다.


문서에 적힌 소유자가 나라는 것뿐 실감이 나진 않았다.

내가 들어가 살 수 있는 여력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세 들어 사시는 분의 전화가 왔다.

전세로 살고 있는 이 아파트를

자신들에게 팔 생각 없냐고 물어왔다.


서울중에서도 변두리쯤에 있었던 아파트였지만 팔면 몇천만 원이 생기는 가격이었다.


쑥쑥 자란 아이들이 

유치원 때부터 탔던 엄마 차가 이젠 좁다고 성화였지만 당장 필요한 돈은 아니었다.

지출은 딱 정한 만큼 통제가 잘 되고 있었다.


팔 생각이 없고 더 보유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전세를 놓았다.



시간이 흘러

아파트 가격은 최초 샀던 가격의 두배를 향하고 있었고


대기업 주식을 샀던 아이들의 용돈은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30%가 넘는 수익률을 찍고 있었다.


모르니까

나는 잘 모르니까

그냥 묻어두고 기다렸더니 벌어진 일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내 미래를 위해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돈 공부를 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제법 자랐기에

이제 나만 좀 더 부지런하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십 년 된 자동차를 더 타기로 했다.

옷을 사는 대신

그 돈으로 책을 사기로 했다.


책 목록을 적어 중고서점에 갔다.

중고서점 몇 군데를 돌고서도 구할 수 없는 책만 새책으로 샀다.


출퇴근 시간엔 재테크 관련 방송을 들으며 간다.


용돈을 아껴 부동산 강의를 신청했다.

퇴근 이후나 주말에 부동산 공부와 숙제를 하고 있다.



과거가 된 지난 일들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의 시간들은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나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하며 살고 싶다.



마음만 부자이고 싶진 않다.


이혼했지만

혼자 벌어서 아이들을 키우지만

절대 가난하게 살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혼하기 전보다는

확실히 행복하고 

풍요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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