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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Jan 16. 2021

잘 살고 있습니다!

이혼 후 이야기 #. 48


무더웠던 작년 여름.

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아빠에게 보내 놓고 퇴근  홀로 앉은 식탁에서 글을 쓰고 때로는 직장에서 틈틈이 눈물 콧물을 래 닦으며 브런치에다 타박타박 글을 쓰던 때가 생각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서기를 한지 십 년이 훌쩍 넘고 얼마 전에 다섯 번째 이사를 했어요.

이사가 끝나고 풀지 못한 짐들이 곳곳에 숨바꼭질하듯 구겨 넣어지면 늘 그랬듯 몸살이 찾아옵니다.

힘들어서라기 보다는
이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지켜내고 뉘일 곳을 찾아 또 한고비 넘겼다는 안도감에 그런 것 같아요.



암수술 후 매년 받는 추적검사를 올해도 무사히 넘겼습니다.
경과도 여전히 좋으며 혈액수치도 좋고 전이 의심도 없다고 주치의 선생님께서 밝은 얼굴로 말씀하셨어요.

"벌써 10년이 넘었군요. 그래도 일 년마다 한 번씩 보니까 좋네요. 병원에 오긴 번거롭겠지만."

당시 서른 살이었던 저를 안심시키며 수술을 집도하셨던 정정한 선생님의 머리는 어느새
은색 눈발이 잔잔하게 흩날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칭찬에 이렇게 또 매년 근심할 일들을 숙제처럼 끝냅니다.

그리고 1년 치의 약봉지를 꼭 쥐고 집으로 왔습니다.





저의 은 이혼하기 전과 이혼한 후로 나뉠 정도로 많 변화가 있었고 또 발전했음을, 걸음을 멈추고 잠시 긴 호흡 가다듬으며 돌아보니 알겠네요.

 

그리고 이사를 하는 바람에 또 다른 낯선 곳에서 살아 볼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

예전에는 홀로 아이들을 끌어안고 이 동네 저 동네 이사하는 것이 참 서럽고 힘들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그 낯섦을 즐기려고 노력합니다.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저는 부양해야 할 이제는 사춘기가 된 아이들이 고 그것은 겨우 유치원생이던 어렸을 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내 마음에는 아이들 여전히 꼬꼬마로 남아있는데 어느새 훌쩍 큰 아이들은 마치 어른 가족이 늘어난 것처럼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고 마음도 쓰이는 일이 더 많아졌지요.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좋은 엄마로 있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빠 몫까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줘야 하는데 아이들이 훗날 엄마를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겠네요.





큰아이는 여전히 공황장애와 함께 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랑스럽고 예쁜 보석 같은 딸입니다.


진료예약이 따로 되지 않는 정신의학과라서 새벽 6시에 병원 앞에 가서 번호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섭니다.


다시 집으로 가서 날이 밝으면 자는 아이를 깨워 함께 병원을 가서 차례를 기다립니다.

아이가 호명되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면 저는 또다시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습니다.


울지는 않습니다.

한탄이나 조바심이 묻은 눈물은 도움이 되질 않더라고요.


그저 감기나 홍역을 앓는 아이를 대하듯 대수롭지 않게 바라봐줍니다.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공황장애에 대해서 대화합니다.


그것이 아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자꾸 꺼내놓으면 아이도 숨기거나 공포스러운 병이 아니라고 생각할까요.


때때로 아이가 커서도 계속 공황에 휘둘리면 어쩌나, 내가 옆에 없으면 어쩌나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뒤죽박죽 올라오지만 그래도 현재에 감사합니다.


아이가 내 눈앞에 있고 내가 등을 쓰다듬을 수 있고 아이의 여드름을 놀릴 수 있고 교복을 다려줄 수 있으니까요.







애들 아빠는 양육비를 안 줄지도 모릅니다.

곧 퇴직을 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직장생활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했대요.


재혼해서 낳은 아직 20년은 더 키워야 할 어린아이가 있는데 퇴직을 한다니... 이해가 안 간다고 혀를 찰 겨를도 없이 내 아이들의 양육비는 어쩔 건데 하는 마음에 신경이 예민해졌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양육비를 완전히 의무화하지 않았기에 소득을 감추고 양육비를 주지 않거나 미뤘을 때 조치를 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소송을 할 수 있는 기관에 문의를 했다가 내가 직접 준비해야 할 어마어마한 서류와, 접수를 해도 한 달 이상을 상담 대기로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를 받고 마음이 참 답답했요.



그 사람이 잘못됐다라고만 할 순 없겠지요

우리는

삶을 대하거나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서라고 생각해요.



예상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어요.

언젠가는 양육비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정된 사실...

심적으로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막상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분노와 조바심이 또 슬금슬금 밀려듭니다.


내가 아이들을 홀로 키웠던 것과

애들 아빠가 이제 자신의 아이를 나처럼 홀로 키우는 것.

다를 바가 없겠지요.


절박하기는 매한가지일 테니까요.



소송 판결 이후 아이들의 양육비로 매달 받은 돈은 쓰지 않고 한 통장에 모아나갔습니다.

통장의 이름은 <교육비>라고 지었어요.


학원비를 제 월급에서 지출하고 있다가 두 아이 모두 교복을 입는 시기가 되어 교육비가 늘어나던 날부터 양육비에서 그만큼만 인출해서 썼습니다.


양육비는 아이들에게 지출되는 용도 외엔 입고 먹는 생활비로도 쓰지 않았어요.

별거를 시작으로 소송을 하기까지 4년 동안 없었던 돈이기도 했기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 생각하자 마음먹었거든요.


넉넉하게 벌진 못하지만, 내가 벌어 아이들 먹고 입히는 건 할 수 있으니 이 돈만큼은 꼭 아이들만 누릴 수 있게 모아 두자 다짐했었어요.


그렇게 모아나갔던 돈 마저 이제 확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어요. 원망과 미워하는 것에 에너지를 쓰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또다시 환경을 스스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고 직장에 묶인 시간 말고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새벽시간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미래의 내 모습을 소리 내어 말합니다.

그리고 일기장에 씁니다. 미래의 시점으로요.


주말에는 아이들이 늦잠에서 깨기 전에 이웃동네로 임장(현장에서 둘러봄)을 갑니다.

핫팩을 챙겨가고 바닥이 딱딱하지 않은 운동화를 신고요.




가끔 기분전환 삼아 마시던 맥주값으로 경제신문 구독을 합니다.



옷을 사지 않고 그 돈으로 책을 삽니다.

일주일에 한 권 이상씩 읽고 깨우친 것은 기록으로 남깁니다.


아직 서툴고 잘 모르지만 공부한 것을 토대로 경매에 입찰도 해보고 번번이 패찰 하는 결과에 대해 나름의 복기도 해보지요.






작년부터 썼던 지금까지의 글들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서 정말 힘을 많이 얻었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꾸 쓰다 보니

너무 우울한 이야기만 연속으로 쓰고 있는 건가

구독자님들은 왜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하실까,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들은 울면서 봐야 하는 <우울한 글>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힘든 과정 가운데 계시는 분들이 제 글을 많이 보실 것 같아요.


그분들에게 어쩌면 너무 슬픈... 기운만 전달하는 건가 하는 미안함이 크게 듭니다.


읽었을 때 웃음이 나거나 좋은 정보가 있는 글들이 아무래도 좋을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없는 일들을 지어내서 글을 쓸 재주가 저는 없어요^^



제가 겪었던 유년시절, 이십 대 초반에 시작했던 결혼생활을 그 어느 때보다 -사실 처음- 글 보따리로 풀면서 저는 굉장히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마음에 켜켜이 쌓여있던 말 못 할 과거들이 묵은 먼지를 털고 세상에 나와 일광욕을 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컸던 것은 얼굴도 모르는 저에게 댓글로 주셨던 구독자분들의 <위로>였습니다.


그리고 대가 없는 <편>을 들어주신 덕이었고요.

아마 브런치를 하면서 저만큼 얻은 것이 많은 사람도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감사한 마음이 컸습니다.


이렇게 늘 위로를 건네 줄 준비가 돼 있는 구독자분들께 또 슬픈(?), 우울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이제는 죄송스러워졌습니다.


감정의 피로를 느끼지 않을까 저도 어느새 내 글을 쓰면서 눈치 아닌 눈치를 보게 되었네요.


 따로 메일을 주시며 댓글에 쓰지 못한 마음을 나눠주시는 분도 계시고 댓글을 달기 위해 로그인이나 가입을 하셨다는 분들의 글들도 저는 항상 감사하게 읽고 있어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으실 텐데 남자분들이 댓글을 주시기도 하고요.  



아주 작게나마 겪어보니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느 부분에서 숨 고르기를 해야 하는지 어슴프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삶은 생각보다 굉장히 짧을 수도 있으며

그 짧은 인생에서 내가 겪은 이혼이나 힘든 과정 또한 높은 곳에서 보면 한낱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터널 안에서 지금 걷고 있다면 여전히 컴컴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둠 속에 있는 내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길고 지루한 터널이 될 수도 있고 밝은 빛 한줄기가 보이는 길이 될 수도 있어요.


분명한 것은 어느 길로든 <끝>이 있다는 것이지요.








고향에 계신 작지만 강한 우리 엄마는 지금도 씩씩하게 잘 지내십니다.


부잣집 고기 가득한 상보다 꿀맛이라며 당신의 밥상을 찍어서 보내주십니다.


손주들 자식들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실 텐데 코로나 시국에 혹시라도 당신이 가족에게 피해를 줄까 봐 못 오게 하세요.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참는 것>에는 일등입니다.

사람이 그리워도, 자식들이 그리워도 어쩔 수 없다고 내려오지 말라고 선을 긋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섯 딸 집에 부지런히 쌀을 보내주시네요.

콩을 보내주시고 김치를 보내주십니다.



코로나가 이렇게 길게 갈 줄 몰랐어요.



곧 찾아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해가 넘어갔습니다. 어쩌면 엄마를 볼 수 있는 날들 중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거나 흘리고 있다는 불안함이 엄습합니다.




저의 올해 목표는 매주 엄마에게 편지 쓰기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영상통화도 가능하고 문자메시지도 흔하지만, 고단한 일과를 끝내고 텅 빈 마당에 들어섰을 때 마치 딸이 찾아온 것처럼 우리 엄마 손에 따뜻하고 반갑게 닿기를 소망해봅니다.   


엄마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늘 우리가 엄마를 보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요.


며칠간 계속 눈발이 날리고 하늘이 온통 잿빛이더니 오늘은 오랜만에 굉장히 화창합니다.


저는 가끔 내 인생이 이렇게 굴곡 없고 순탄하게 흘러가되 되는 건가라는 조바심이 생깁니다.


어려움과 함께 걸어온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하기 마련인데 저는 아직 이렇다 할 극한의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밤을 포기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 4시에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하지 못하는 독서를 하고, 일기를 쓰고, 부동산 공부를 하고 있지요. 춥지 않은 날엔 새벽에 나가 뛰기도 합니다.


한탄해도 내 인생, 즐거워도 내 인생, 무언가 배워도 내 인생인 금쪽같은 시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칭찬받는 삶은 아닐지라도

언제가 될지 모를 인생의 끝 즈음 갔을 때 나에게 선물이 되었다 싶은 삶이 되고 싶어요.


이곳에 글을 올리면서 저는 혼자 울었고

많은 눈물을 흘릴수록 구독자님들이 힘을 주셨어요.


다시 한번 제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작가님들과 구독자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글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별 볼일 없는 제 일상과 함께 며칠 동안 짬짬이 시간을 내서 정리안 된 글이나마 올립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종종 글로 다시 찾아뵐게요!



-  연극배우 B 씨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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