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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Nov 28. 2020

혼자라서 할 수 있는 많은 것

이혼 후 이야기 #. 41




커튼 없는  내 방창문 밖으로

어슴프레 달빛이 비치는 것 같다.


가로등 불빛인 것도 같다.

찡그리며 한쪽 눈만 떠서 핸드폰을 보고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다.


더 길게 자지 않고 눈이 떠진 것이 새삼 신나지만 몸이 아직은 더 이불속에 있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린다.


잠들지 않기 위해 이불을 걷어찬다.

이불 안에서 따뜻하던 몸에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는다.

서서히 몸도 깬다.


'일어나야지 일어나자.'


밤새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한 줌 쥐고 뱅뱅 틀어 올려 집게핀으로 누른다.

아이들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더듬더듬 주방으로 가서 아이들 물컵에 물을 담아온다.


새벽이면 건조해서 목이 까끌까끌하다고 하는 아이들에게 새벽에 꼭 물을 먹인다.

"아가, 물먹자."

나지막이 속삭이는 소리에도 아이들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준다.


잠결에 컵을 들이대니 꿈결을 헤매던 작은 녀석은 양치하는 것이랑 헷갈렸는지 물로 입을 헹구고는 이불에 뱉어버렸다.


"아가, 먹는 물이야. 삼키면 돼."


이불에 뱉은 물을 닦아내고 다시 물을 먹였다.

발로 차낸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려 덮어준다.


아이들에게는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난다.

발바닥도 보드랍고 솜털이 송송 나있는 뺨도 보드랍다.

막 올라오는 여름 채소 싹처럼 보드랍다.



주방으로 나온다.

책상에 불을 켜면 아이들이 잠을 깨니까 식탁에다 책과 일기장을 내려놓는다.

나만의 도서관이 오픈하는 시간이다.


집안에서 잠을 깬 사람은 나뿐이다.

밥솥도 자고 있고 거실 소파도 자고 있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그대로 둔 인형들도 자고 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뽑기하고 받았다는 조그만 장난감도 한쪽으로 넘어져서 아직 자고 있다.


식탁에 앉아 거실을 휙 둘러본다.

베란다에 어제 아침 출근 전에 부랴부랴 널어놓고 간 빨래가 고향집 시래기 걸려있듯 매달려있다.


'날이 밝으면 개켜놓고 이불 빨래를 해서 저기다가 널어야겠다.


어제 양말 널면서 한 짝이 없던 큰 녀석 양말은 어디 갔을까.


베란다에 사과박스를 아직 안 치웠네.

재활용 쓰레기를 저기다가 담아놔야겠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몇 가지 집안일들이 머릿속에 메모로 남는다.

오늘 짬을 내어 우선적으로 꼭 할 일이다.



일기장을 펼쳤다.

아이들이 문구점에서 사놓고 겉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안 쓴다고 내놓은 공책이었다.

그림이 너무 유치하다나...


내 일기장으로 쓰기로 하고도 한동안 만지지 않았던 노트였다.

일기장을 펴서 볼펜만 들면 억울함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


'넌 왜 좀 더 열심히 살지 않니?'


'그렇게 말하지 마. 나도 한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뭘 했는데? 뭐가 남았는데?'


'......'


매일 돈을 벌러 나가면서도

아이들을 키워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불안함이

나를 늘 다그쳤다.


좀 더 열심히 살지 않으면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면

지금보다 나아질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2년 동안 2개의 자격증과

밤마다 강의를 듣고 리포트를 작성해 학위를 받았다.

거울에 책상에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적어놓았다.


그 목표를

출근 화장하다가 중얼거리고

운전하면서 중얼거렸다.



아이들을 키워내고 직장생활을 문제없이 해낼

체력도 필요했다.

하지만 내 하루 중 제일 바쁠 때가 퇴근 이후였다.

직장 퇴근 후 집안으로의 출근이니까.


한동안은 집안일을 다 해놓고

숙제를 봐주고

밤 9시 30분에 하는 스피닝을 가기도 했지만

몸이 아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아이들끼리 잠들게 하는 것도 미안했다.


개운함보다는 여러 가지 피로가 몰려왔다.


잠을 줄이기로 했다.

잠드는 시간은 여전히 늦는데

기상시간을 앞당겼다.


'잘 거 다자고 쉴 거 다 쉬고 언제 공부하고 운동할래?

잠은 죽어서도 질리게 잘 건데.'

늘 쓴소리만 하는 내 안의 내가 말했다.


몸은 피곤한데

속에서 늘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죽거나 정체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사를 할 때마다 그 동네에서 내가 뛰거나 걸을 수 있는 곳을 제일 먼저 찾아다녔다.


사는 동네가 바뀌면서

나는 호수 주변을 돌고 있었고

새벽에 뒷산을 오르고 있었고

추운 공원을 뛰고 있었다.






새벽에 산을 올랐다.

아직 달이 뜬 시간에 뒷산 입구에 서 있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찬송가를 틀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으니 혹시나 귀신이 있을까 봐 무서웠다.

'귀신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주기도문을 외워야지.'


여름엔 금방 날이 밝았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어둠이 길어졌다.

중턱까진 컴컴한 산길을 걸어야 했다.

가까운 공원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뒷산처럼 가파르진 않기에 평지를 뛰기로 했다.


두꺼운 옷은 뛸 때 거추장스럽고 더웠다.

얇게 입고 나가면 어깨가 움츠러들고 이가 떨렸다.

그래서 자동으로 뛰었다.






뛰다 보면 눈물이 났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눈물이 났다.



뛰어서 숨이 거칠어진 건지

울음을 참아서 숨이 거칠어진 건지

혼자 새벽에 공원 한편에서 토해내듯 꺽꺽거렸다.



아침 쟁기질을 하고 온 소처럼 몸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면 집에 들어왔다.


씻고 화장을 하고 아침을 차리고 아이들을 깨우고

반복되는 하루를 또 시작했다.


얇은 옷을 입고 뛰어다니니

근육이 움츠러들어서 경직이 되었다.

어릴 때 다쳤던 발목이 아파왔다.


발목이 욱신거릴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해달라고 나를 던져서 발목이 부러졌었나 보다.

그런 방법 아니어도 충분히 기억할 텐데...



지인에게 등산로가 잘 되어 있는 산을 추천받았다.

출근 안 해도 되는 주말 새벽에 차를 끌고 그 산을 찾았다.

해가 떠오르는 것을 정상에서 볼 참이었다.


컴컴함이 파도처럼 쏟아질 것 같은

산 입구에 섰다.

중고사이트에서 산 등산화를 괜히 바닥에 쿵쿵 찍어댔다.

'난 무섭지 않아.'


음악을 틀고 뒷짐을 졌다.

잡아줄 이 없는 내 손을

허리 뒤에서 그렇게라도 맞잡으니 힘이 났다.


고개를 숙이고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나뭇가지가 바람에 휘청이는 소리만 들려도

귓볼 뒤에 있는 머리칼이 전봇대처럼 하늘로 쭉쭉

솟아올라가는 듯했다.




한걸음 한걸음 정상으로 향한 길을 내디딜 때마다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생각의 서랍을 뒤엎는다.


'큰 녀석 두통이 또 심해진다고 했지, 큰일이네...'


'작은 녀석은 폼클렌징을 좀 바꿔줘야 하나.'


'애들이 고기 먹고 싶다는데 정육점에서 사다가 구워주는 게 낫겠어.'


'어제 사무실에서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여튼 입이 문제야.'


'그 사람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업무를 모르는 사람인가.'


'결재를 어제 올렸어야 했는데. 출근하면 이미 작성은 해 놓았다고 말하자.'


'양육비는 이번에도 밀리는구나. 낮에 문자를 해서 세게 뭐라고 해야지!'


'어제 재활용 통에 버린 샴푸가 사실 조금 남았었는데, 그냥 물 좀 넣어서 흔들어 쓸걸...'


'그러고 보니 종량제 봉투가 없구나. 오늘은 장 볼 때 종량제 봉투에 넣어 달라고 해야겠어.'



산을 오르지만 머리는 이미 집안일을 하고 있고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종아리가 뻐근해질때즘 정상이 보인다.

높은 곳에 올라가 낮은 곳을

아니

나와 동등하게 펼쳐진 세상을 본다.


지나가는 산 고양이에 기겁을 하며 입산을 후회하던 조금 전의 나는 온데간데없고

내 눈으로 직접 본 세상을

휴대폰 카메라에 집어넣기 바쁘다.



정상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기도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도 많다.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하니 잘 디뎌야 한다.


이제 올라오는 사람을 보며 괜히 혼자 뿌듯해진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저는 이미 갔다 왔다고요.'

속으로 유치한 자랑을 해본다.


하지만 올라오는 분들은

나보다 적어도 열 배는 산을 수월하게 오르시는 분들 같다.






산을 오를 때의 걱정들은 온데간데없고

휘파람을 불며 내려오는 이유가 있다.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서 커피를 사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뭐라고 굳이 유턴까지 해서 커피를 산다.


차 안에 가득 퍼지는 달달한 커피 향.

처음 한 모금에 따스운 기운이 전신에 퍼진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흐뭇하게 잠시 두 눈이 절로 감긴다.



산에 오르면서 소모한 칼로리보다

더 높은 달달함의 커피를 마시며

휴일 아침을 연다.


혼자라서 할 수 있는 많은 것 중 하나다.





"엄마는 20년 뒤에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엄마는 주식 오르는 거 체크하고, 

건물 샀을 거니까 건물 잘 있는지 감시하고 

그때도 맨날 새벽에 나가겠지, 운동한다고. 

확실한 건 아빠보다는 잘 살고 있을 것 같아."




내가 원한 대답일까.


부디

아이의 말이 씨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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