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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Feb 28. 2021

분가했다면 우리가 이혼을 안 했을까(2)

이혼 후 이야기 #. 53




이혼을 결심하기 전 '내가 문제가 아닐까' 싶어 마지막으로 돈을 들여 상담을 받고 있었다.


그날은 상담을 가는 날이었다.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려는 나에게 전화를 해 시누가 기다리라고 했다.


할 이야기 있다고 했다.



"지금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는데요."

"그럼 갔다 와. 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밖에서 서성이다가 일부러 집에 늦게 들어갔다.

만나기 싫다는데 굳이 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싫었다.


시누는 우리 집에서 어머니와 이야기하며 날 기다리다가 늦게 돌아갔다고 했다.


가장 편하게 쉬어야 할 내 보금자리를 그렇게 시가 사람들이 언제든지 편하게 드나들고 진을 치고 나를 기다렸다.


숨이 막혔다.


아이들만 없다면 영원히 들어가고 싶지 않은 장소로 그 집은 바뀌어 있었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집전화로 전화를 받았으니 밖에 있다고 둘러댈 방법이 없었다.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아 우리 집에 온 시누이는 그동안 어떻게 참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두 시간에 걸쳐 나에게 이것저것 불만과 협박을 쏟아놓았다.



대화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훈계였다.


네가 얼마나 못된 올케이고 며느리였는지

네가 얼마나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지

네가 얼마나 시댁과 내 엄마를 우습게 보고 있는지

식탁에 마주 앉아 조목조목 지적을 해줬다.



본인이 남편의 무심함과 결혼 초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힘들었던 시절에 대해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토로하던 그 예전의 모습은 없었다.


시누 입에서 나오는 말들의 대부분은 엄마남동생에게 전해 들은 사건들 중 내 의견은 쏙 빠진 그들만의 결론이었다.


'그동안 불쌍해서 봐줬지만 이젠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손 윗 시누로서의 가르침이고 충고였다.

(그래. 시누가 내 입장이 되어 이 집에서 똑같이 살아본 적이 단 1분도 없었지만 일단 충고라고 하자)



어머니를 잠시 다른 곳에(딸들 집이든 큰아들 집이든) 모셔두고 남편과 내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맞벌이와 육아, 가사를 함께 하며 생활해보고 싶다는 마지막 내 의견은 눈 녹듯이 없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였다.


나는 모시기 싫은 것이 아니라고, 아주 가시라고 하는 것이 분명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거의 사정하다시피 했다.



이미 은혜도 모르는 천하의 나쁜 년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다.


어머니는 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도 짐을 싸서 가실 곳이 없었다.


선뜻 모셔가겠다는 딸이 없다는 게 정확했다.


은혜도 모르는 올케로부터 우리 엄마를 보란 듯이 모시고 가버리기엔 그들도 시댁과 남편 눈치를 봐야 했을 것이고 잠시라는 시간이 고정이 돼버릴까 봐 겁이 났을 것이다.


어쨌거나 엄마를 모신다는 건 귀찮은 일이었을 테니까.

그저 올케네 집에 엄마를 두고 가끔 피난처 삼아 친정이라고 놀러 오는 편이 훨씬 좋았을 테니까 말이다.



한 시누는 시댁에 며느리가 여럿 되는데도 꼬장꼬장한 그들의 시어머니를 서로 모시지 않으려고 늘 발버둥이었다.


서로 눈치 싸움을 하다 형평성에 맞게 시어머니를 한 달씩 모시기로 했던 모양인데, 자신의 순번이 되면 시어머니가 와 있어 이번 달은 삼시세끼 꼼짝없이 챙겨주게 생겼다며 밥만 차려주고 친정(우리 집)으로 도망을 왔다.


시어머니가 냄새가 나고 안 씻는다며 흉을 잔뜩 보다가 끼니때가 되면 시어머니가 혼자 덩그러니 계신 자기 집으로 휙 다녀왔다.


유기견도 그렇게는 보살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시누들이 나를 나쁜 년이라고 했다.


'어디서 배워먹었는지 모르지만 못된 생각을 가진 맹랑한 올케'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았다.


택배 아저씨의 전화를 며느리의 외도로 의심하고 어두운 눈과 귀로 인해 날 선 비난과 다음 날 사과를 반복하셔도 어머니가 소중했다.


어머니가 끔찍이 이뻐한 손녀들이 커가는 걸 보면서 우리 집에서 오래오래 함께 사시길 바랬다.


어머니는 내 가족이었다.



단지, 자신은 쏙 빠진 채 육아와 가사를 아내와 어머니에게만 맡기는 남편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외도를 했다고 가사를 돕지 않는다고 이혼할 것은 아니니 제발 남편도 느끼길 바랬다.


커버린 아들의 수발을 언제까지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그것은 자식을 위하는 것이 아님을 어머니가 알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들이 판단하고 싶은 대로 받아들여졌다.


분가는커녕 '잠시만 어머니를 배제하고 우리가 치열하게 맞벌이 부부로 살아보자' 나의 마지막 바람은 그렇게 사그라져 없어졌다.



처음부터

몇 개월 분가조차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었다.


설령 엄청난 오류(!)로 분가했다 하더라도 남편이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음주와 늦잠, 나에겐 없는 세상 여유로움으로 인해 나는 결국 발을 동동 구르며 가사와 출퇴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고달픈 워킹맘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아마 내가 더 큰 비중으로 떠맡게 된 집안일로 인해 남편과 끊임없이 다퉜을 것이고 하소연하는 남동생을 보면서 누나들이 개입이 시작되었을 것이 뻔했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누나들, 형수, 홀어머니 등 여자들의 보살핌을 꾸준히 받아왔다.

그것은 본인에게 너무 당연한 것이며 내가 이룬 가정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책임져야겠다는 생각보다 '나를 보필해줄 여자' 한 명이 더 들어온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후 별거와 소송을 치르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바꾸려고 할수록 우리는 엇박자가 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려니 하며 참고 살기엔 내가 한참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고 포기하며 살아야 했다.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유감스럽게도 나를 부처님처럼 낳아주시질 않았다.


고부사이에서 중재는커녕 아내를 무조건 질타하고 자신의 핏줄들이 더 소중하다는 남자, 외도를 하고도 증거 없으니 아니다고 우기는 남자, 자기 이부자리 정리도 안 하고 어머니가 깨워야만 허겁지겁 일어나 물만 묻히고 출근하는 남자를 떠받들며 살 이유가 내겐 없었다.


우리 엄마는 그런 삶을 살라고 나를 힘들게 낳진 않으셨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과 하루 아니 잠시라도 내가 숨을 쉬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우울감과 불안으로 분칠 한 엄마 얼굴을 얼마나 아이들에 오래 보여줘야 했을까.


한 때는 '아이들을 봐서라도 함께 살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일단 고개를 숙였지만 남편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단칼에 거절했다.



말도 섞기 싫었는지 나와 우리 엄마에게 문자로 이혼에 대해 통보했다.


별거하던 날 아이들의 짐만 가지고 이사를 나가는 순간까지도 나에게 '다시 한번 고민해보자'라고 말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앓던 이를 뺀 사람처럼 보였다.



나와 아이들이 나가고 얼마 안 있어 무슨 마음이었는지 끔찍이도 좋아했던 어머니를 큰형 집에 무작정 보내버렸다.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홀로서기라도 할 것인가 했더니 곧 연애를 시작했다.

이혼 소송을 할 때도 여자와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재혼을 했다.

곧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을 떼놓고 재혼을 하러 온 여자와 얼마간 사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남편은 여자가 낳아놓고 간 아이와 둘만 남았다.


나에게 눈물 나는 충고를 했던 시누들은 오십 줄이 다 되어서 혼자 갓난아이를 덩그러니 키우고 있는 운 없는 남동생에게  두 번째 올케 대신 종종 반찬을 해다 나른다고 들었다.



얼마나 짠할 것인가.


시누들이나 남편 모두 나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했다.

엄마를 다른데 모시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너만 참고 살면 되는데 왜 이렇게 일을 키우냐고 했다.


남편을 믿고 결혼한 나에게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요했고 못한다고 했을 땐 용납하지 않았다.


...

그들의 반응을 보며

마침내 남편을 내 삶에서 내보내기로 했다.


남편이 꼭 쥐고 놓지 않는 시가 사람들까지 통째로 내 인생에서 빼기로 했다.





이제

그들은 그들 인생을 살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들이나 나나 새롭게 선택한 삶의 방향을 원망할 이유가 없다.


직접 선택했기 때문이다.



분가를 했더라도 우리는 이혼했을 것이다.


주변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져버리면 언젠가는 그 틈으로 다시금 물이 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물로 얼룩진 결혼생활을 하며 우연히 접하게 된 구절을

업무수첩 한 귀퉁이에 적어 놓고 십여 년을 가지고 다녔던 것이 생각난다.


'게슈탈트의 기도'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너는 너의 일을 한다


나는 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의 기대에 따르기 위해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다


너는 너

나는 나


만약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그건 멋진 일

만약 만나지 않는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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