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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Dec 17. 2024

나의 인사이드아웃을 구해줘, 침착맨 4

부럽     “얘들아, 있잖아.” 


감정들은 티격태격하느라 부럽이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부럽이가 일어나 의자 위로 올라간다.


부럽     “얘들아-”


이번에는 성공했다. 다들 부럽이를 쳐다보았다. 


부럽     “얘들아, 저번에 주우재가 침착맨 채널에 나왔던 방송, 엘리가 재밌게 들었던 거 기억해?”

까칠     “흥, 그건 엘리가 좋아하는 주우재가 나와서 재밌었던 게 아닐까”


얼굴이 시뻘게진 당황이가 후드 모자를 꽉 조여서 얼굴을 다 가린다.

부럽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침착맨이 인기가 많다던데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궁금하잖아.”  


불안     “오, 침착맨 듣는 거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엘리가 원래 쓰려고 했던 이야기가 아이돌이 주인공이라서 

            요즘 젊은 애들 뭐 좋아하나 항상 찾았잖아. 최근 몇 개월 동안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지만.

            나중에 일에도 도움이 될 테니 난 부럽이 의견에 찬성!”


기쁨     “나도! 나도! 저번에 수박게임 할 때 침착맨이 주우재 옆에서 방해하는 거 진짜 웃겼어. 

            엘리가 웃으면 나도 좋아- 넌 장난이라 해도-”


벌써 신이 난 기쁨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감정 친구들이 모두 자기 의견에 찬성해 줘서 더 눈을 반짝이는 부럽이.


부럽     “다들 침착맨 원본 박물관 듣는 거 동의하는 거지?” 


엘리가 유튜브 ‘침착맨 원본 박물관’ 채널에 들어가서 동영상 목록을 훑어본다.


감정 제어판을 오랜만에 잡은 부럽.

저번에 주우재 나왔던 게 몇 월 며칠이었더라.

콧노래를 부르며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어느새 따분이가 뒤에 서서 부럽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따분     “너 설마 저번에 봤던 거 또 보려는 건 아니지”

부럽     “지난번엔 엘리가 청소하면서 중간중간 봐서 놓친 장면이 많단 말이야”


당황이는 아예 기둥 뒤에 숨는다. 그런다고 상황이가 다 가려지지는 않지만.


따분     “똑같은 거 또 보면 재미없다고.”


기쁨 이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혼자서 박수를 짝짝짝 친다.


기쁨     “내가 저번에 침착맨 무슨 방송이 유명한지 검색한 적이 있었거든. 

            그중에 삼국지 얘기가 있더라고” 

불안     “삼국지라고?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 

            읽은 지 오래됐으니 들으면서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엘리한테 도움이 될 거야.”

기쁨     “맞아, 맞아. 중요한 사건들은 머릿속에 남아있으니 이해할 수 있을 걸.”


다소 의기소침해진 부럽이. 까칠이가 부럽이의 서운함을 눈치챈다.


까칠     “부럽아, 지금은 삼국지 먼저 보자. 

            이거 한 편 보고 나서 엘리가 계속 들어도 된다고 결론이 나면  

            그다음에 주우재 나왔던 거 다시 보자, 오키?”


고개를 끄덕이는 부럽이.


따분     “그럼 이제 모두 침원박 삼국지 1편 보기로 동의한 거지?”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따분 “너무들 기대하지 말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재생버튼을 누르는 따분.


...

이 날 나는 침착맨의 삼국지를 듣다가 웃겨서 손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바벨을 놓칠 뻔했다. 

나는 초등학생 때는 세 권짜리 삼국지, 고등학생 때는 이문열 작가의 열 권짜리 삼국지를 읽었었다. 

내 머릿속 삼국지는 엣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고한 품격의 고전이었는데 

침착맨의 구연동화, 아니 구연소설은 킬킬대며 보는 만화 같아서 둘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입담 좋게 썰을 푸는 일로 돈을 벌던 전기수가 21세기 유튜버로 환생했네.

침착맨 덕분에 두 시간을 운동으로 꽉 채우고 보람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집으로 가는 길에도 침착맨의 삼국지를 들었지.

 

이 날을 시작으로 나는 이천 이십 사 년 내내 침원박(침착맨 원본박물관의 준 말)을 거의 매일 

듣거나 보았다. 

언젠가 침착맨이 본인 채널의 시청자 연령은 십팔 세에서 삼십오 세 사이에 몰려있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연령별-시청자수 그래프에서 나는 

정규분포곡선 밖으로 한참 벗어나 있다. 사십 세-오십 세 구간에 나 하나, 점 한 개만 찍혀있을지도. 


그래서 그래프를 보는 누군가는 조사에 오류가 났거나, 

아니면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할 때 실수가 있었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종이에 뭐가 묻었다고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에요! 여기도 사람 있어요! 사십 대 시청자 한 명 여기에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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