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부 채널에 라이브 방송을 편집한 동영상도 올라오지만
이야기의 맥락까지 파악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라이브 그대로 저장해 놓은 원본을 선호한다.
러닝타임이 긴 것 중에는 열 시간을 넘거나 열 시간 가까운 방송도 꽤 있어서 하루종일 듣기에 넉넉하다.
침착맨의 방송은 잔잔히 웃겨서 기운을 북돋아주는 효과가 있었다.
지루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돼서 에너지가 소진되는 것을 막아 주었다.
왜 사람들이 설거지처럼, 해야 하지만 하기는 싫은 일을 할 때 침착맨을 듣는다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나는 올 한 해에만 네 번의 작업실 이동과 한 번의 이사를 해야 했다.
짐을 옮기는 지난한 과정 뒤에 청소, 정리, 수리를 나 홀로 할 때에는
언제나 내 귀에 캔디, 가 아니라 내 귀에 침착맨이 있었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에도 침원박을 찾았다.
심신 미약 상태로 술을 마시고 취해서 선율이에게 몹쓸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금주 중이지만
그래도 마시고 싶을 때가 있는 걸. 혼술을 참고 침착맨의 술광고를 보며 대리만족을 했다.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 훌쩍
그래도 가끔 현타가 오기도 한다.
몇 개월 전, 대학교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서 ‘미장’이라는 단어를 보고 갸우뚱한 적이 있었다.
미장?
미장이 여기서 왜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미장은 벽에 시멘트를 매끄럽게 바르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미장이’밖에 없었는데 대화 흐름상 그 뜻은 아니었다.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댔으니 일단 더 지켜보자.
뒤에 이어지는 말풍선으로 추측건대, ‘미장’은 ‘미국증권시장’의 준말이었다.
휴우, 좋았어, 자연스러웠어.
단톡방 내 친구들은 각종 경제 이슈, 부동산 근황, 미래 사회 변화 등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하는 마당에 나는 들을 수 있는 게 침착맨뿐이라니.
언제 어디서 아빠눈물버튼이 눌릴지 몰라 조금이라도 자극적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외면했기에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른 채 살고 있었다.
팔 개월 정도 지났으니 이제 다른 걸 접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전혀 괜찮지 않았습니다.
OTT를 뒤적이다 11월에 뒤늦게 <흑백요리사>를 보았다.
<흑백요리사>는 재미있었다.
너무 재밌어서 과몰입한 바람에 3,4회쯤부터 과호흡 증상이 나타나서 약을 먹어야 했을 정도로.
아직 마음의 근육이 덜 붙었구나. 약을 먹어가면서 봐야 할까 여기까지만 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못 먹어도 고’를 외치던 고약한 예전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이어 보기 버튼을 눌렀다.
네가 과거에 (원했던 결과를) 못 먹었던 이유가
‘고!’를 외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구나, 어리석은 나여.
<흑백요리사> 후반부에는 각 참가자의 과거 사연이 나왔다.
듣고 있는 당시에는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넘어갔다.
슬프기는 했지만 눈물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후로 자꾸 내 기분이 하향곡선을 그리며
슬픔 쪽으로 처지는 게 느껴졌다. 왜 이러지? 두부요리대결 하는 게 왜 슬퍼?
아아, 나도 모르는 새 나는 이제 막 새살이 나기 시작한 상처를 딱지를 뜯어가면서 까지
후벼 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1월 한 달은 내내 울면서 보냈다.
꽈배기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지 팔자 지가 꼬지요?
<인사이드 아웃>은 슬픔도 인간에게 필요한 감정이니
외면하지 말고 껴안아 주어야 내면이 성숙해진다고 말한다.
내가 그걸 모를까요.
나도 슬픔을 억누르고 싶지 않다, 울다 지칠 때까지 펑펑 울고 싶다.
하지만 울고만 있으면 아이는 누가 챙기지?
배우자는 내가 울면 질색하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이라
집에서 울려면 아무도 없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어른이 되면 눈물을 꾹꾹 누르고 그래도 해야지 할 때가 더 많다고요.
다음은 자이언티의 <꺼내먹어요> 노래 가사 중 일부이다.
쉽지 않죠, 바쁘죠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죠? 바라는 게 더럽게 많죠
쉬고 싶죠, 시끄럽죠 다 성가시죠?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그럴 땐, 이 노래를 초콜릿처럼 꺼내 먹어요. 피곤해도, 아침 점심밥 좀 챙겨 먹어요.
…
후략
자이언티는 힘들 때 자기 노래를 꺼내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힘들 때 침원박을 꺼내 듣는다.
아침, 점심밥을 챙겨 먹을 때도 물론이고.
아, 침착맨 이야기가 왜 이 여행기에 들어가 있냐고?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를 보는 내내 나는 픽사 제작진이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싶었다.
폭주한 불안이 감정 제어판 기어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온몸이 굳은 채 눈물만 흘리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원래 불안하면 뭐라도 하려고 움직이지만
극도로 불안해지면 오히려 마비가 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다리만 덜덜덜 떨게 되니까.
불안이 나였고 내가 불안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국여행 가면 디즈니 어드벤처에서 슬픔이랑 불안이 굿즈를 꼭 사 올 거라고 정해놨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인사이드 아웃 2> 관련 굿즈는 거의 없었다.
커다란 슬픔과 불안 말랑인형을 껴안고 자고 싶었는데.
그래서 대신 침착맨과 인사이드 아웃을 하나로 엮어 넣었다.
언젠가 침착맨을 안 들어도 될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난 침착맨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