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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Dec 18. 2024

우리아빤 짜장면을 좋아하셨어

미국여행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낸시가 물었다.

“언니, 차이니즈-차이니즈 레스토랑 가본 적 있어?”

중국식 중국집? 재밌는 단어조합이라서 푸하하 웃었다. 그래도 무슨 뜻인지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짜장면과 탕수육과 짬뽕이 있는 코리안 차이니스 레스토랑 말고 

공심채 볶음이나 새우에그누들이나 

생선 한 마리를 통째로 튀겨서 그 위에 소스를 끼얹은 요리가 나오는 차이니스 차이니스 레스토랑.


없네?

기억을 되짚어 본 김에 따져보니 나는 일 년에 두 세 번 중식당을 가고 있었다. 

그 중에 꼭 한 번은 아빠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가족모임이었다. 

다른 한 번은 공부가주와 가지튀김을 시켜 친구와 함께 먹는 낮술.


미식가 가족인 낸시네가 그들 집 근처에 있는 중식당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맛있었다. 

한국식 중국집과 차이가 있다면, 한국식 중국집의 모든 메뉴는 술안주가 될 수 있는데에 반해, 

중국식 중국집의 요리는 대체로 밥반찬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작년에 아빠도 이 곳에서 맛있게 식사하셨다고 낸시가 말해주었다.


그랬겠지, 아빠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잘 드셨으니까.

작년 겨울, 여느 때처럼 아빠 생신때마다 가는 동네 중식당에서도 

아빠는 맛있다고 연신 감탄하며 그릇을 싹싹 비우셨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 저렇게 잘 드시니 우리 아빤 십년도 더 사시겠구나 방심했었네.


다양한 요리를 넉넉하게 시켜도 아빠는 야, 짜장면 한 번 먹어보자 입맛을 다시며 

꼭 식사로 짜장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짜장면이 나오면 아빠는 한 공기 정도되는 분량을 덜어서 

이것도 한 번 먹어보라고 식구들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다들 배불러서 못먹겠다고 손을 내젓는 중에도 그 그릇을 받아 먹는 건 대개 나였다. 

짜장면을 향한 아빠의 애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많이 먹는 편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빠가 짜장면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듣기 위해서는 1950년대 후반, 

아빠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미군부대에 근무하셨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미군부대에서 일하면 남들이 못 가지는 것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버려지거나 쓰고 남은 것들을 종종 들고 왔다고. 

할아버지가 가져온 게 음식이면 할머니가, 그 꿀꿀이죽 있지, 

그거 끓여서 동네 사람들에게 퍼주었고, 비누같은 거 들어오면 이웃들한테 다 나눠주고 그랬단다”

“아이고, 그걸 팔았어야지-”

“할머니가 인심이 후했지”


그러다 몇 년 후, 아빠가 자전거를 타고 할아버지에게 물건을 받아, 

살 사람에게 배달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아현동에서 용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고? 그 먼 거리를?”

“그래, 할아버지한테 돼지기름 받아서 북창동까지 갔었어, 그 때 그 동네에 화교들이 모여 살았었거든.”


라유. 중국요리에 많이 쓰이는 기름이었다. 

“그 때 기름이 귀했잖냐, 그래서 내가 중식당 골목에 가면 사장님들이 라유 좀 달라고 

여기저기서 손 들고 그랬지, 약속된 가게 앞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할아버지랑 가게 주인이 전화로 얘기하는 동안에는 그 집 애들이랑 같이 놀고 친구하고 그랬지”


대박, 빼빼 마른 소년이 자기 몸집에 비해 훨씬 큰 자전거를 몰고 용산 미군기지에서 

시청 앞을 지나 북창동까지 달리는 그림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그 꼬마는 한국에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준 미군기지와 화교사회를 잇는 연결고리였다. 아빠는 그 밖에도 격동의 시기에서나 가능할 법한 기상천외한 이야기들도 많이 갖고 있었다.


나, 이 이야기를 써야겠어. 

역사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특히 미시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신이 났다.

본가에 갈 때마다 아빠한테 어렸을 때 있었던 일에 대해 물으면 

기억력이 좋고, 말솜씨도 좋은 아빠는 에피소드를 술술 풀어주셨다. 

짧지만 그때마다 녹음을 해두었다.


“아빠, 올해까지 일하고 퇴직하면 내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나랑 밖에서 만나서 서울데이트하자. 

서울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옛날에 이 자리엔 뭐가 있었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진 어떤 풍경이었는지 아빠가 나한테 얘기해 주는 거야.

그럼 나는 아빠가 해준 이야기들 모아서 나중에 서울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글 쓰고, 어때, 멋지지”


이 얘기를 처음으로 꺼낸 건, 삼 년 전, 선율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겨울이었다. 

일 학년을 보내고, 이학년이 되어도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평일 점심부터 오후까지 네다섯 시간 비는 날이 없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기도 했거니와, 돌이켜보면 시간은 나는 게 아니라 내는 거였더라고.

선율이가 이학년 이학기에 접어드니 

두세 시간 정도는 선율이 혼자 집에 있어도 나와 선율이 둘 다 불안하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브리샤를 타고 일요일에 롯데백화점에 가서 짜장면이랑 군만두를 먹었던 일,

내가 사 학년쯤 됐을 때, 언젠가부터 아빠가 엽총과 총알 등의 사냥용품을 갖추더니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며 직접 잡은 토끼와 꿩을 들고 왔던 일


이 모든 것들이 아빠의 젊은 시절과 관련이 있었다.

아빠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렸을 때 같이 놀던 화교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러다 그 당시 한국 내 2대 춘장회사 중 한 곳에 들어가서 회장님 아들과 함께 지냈다고 했다. 

사냥도 이때 부잣집 도련님과 다니면서 접했고.


“회장님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도 어마어마했어. 거의 일주일 동안 했었던가. 

그때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기다란 쇠꼬치에 끼워서 돌려가며 불에 구워서, 간장인가, 그런 맛의 소스에 조려서 만든 음식이 있었는데, 그거 참 맛있었는데-”


하하하하하, 먹는 걸 좋아하는 아빠다운 추억담이었다.

“아빠 그거 동파육이다 동파육! 나중에 그거 먹으러 가자!”

이 이야기를 들은 건 올해 일 월 초, 아빠의 마지막 생일파티날이었다.

그 춘장회사는 망했고, 부잣집 도련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아빠는 작년에 미국에 갔을 때 이 사람집에 갔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집 벽에는 회장님을 그린 커다란 초상화가 붙어있었더라고 하셨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선율이가 삼 학년이 되면 삼 년 동안 미뤄왔던 아빠와의 서울나들이 시작이다!

개학날이 다가올수록 나의 기대는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아빠는 선율이가 삼 학년 되기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다.

아빠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이야기도 아빠의 뼛가루와 함께 조그만 단지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나올 수 없게 돼버렸다.


아빠는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이 감기라도 걸릴까 부지런히 기름을 사다 나르고 난로에 채워서 

항상 방안이 뜨끈했다고 했다. 밤이 제일 긴 날이자 낮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 

한겨울 동짓날에 태어난 나는 아빠 덕분에 등에 땀띠까지 났다고 했다.


아빠는 가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아이고 이 놈아, 내가 너 때문에 직업을 바꿨잖냐”

말씀하시곤 했다. 사실이었다.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하고 있던 아빠는 내가 태어나고 나서 자동차 수리점, 즉 카센터로 종목을 변경했다. 아이를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아빠처럼 나도 

“아빠, 내가 아빠 덕분에 첫 작품을 완성하게 됐어”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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