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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Mar 29. 2017

통찰력에 대한 정의

영화 <미스 슬로운> 후기

*통찰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이나 사람을 꿰뚫어 봄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영화 <미스 슬로운>을 보고 왔다. 영화가 끝난 뒤 내 머릿속에 남는 단어는 '통찰'이었다. 통찰의 사전적 정의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이나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미스 슬로운은 나라를 움직일 중대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혹은 막기 위해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는 로비스트로 그려진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존의 이익관계에 개입하는 것이 일이고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해 상황을 만들거나 조정한다.


영화는 미스 슬로운이 청문회 장소에 입장하기 전 담당 변호사로부터 '묵비권'을 권유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관객들은 자연히 미스 슬로운이란 여자가 아주 큰 잘못을 했거나 아주 큰 함정에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발단이 궁금해진다.   

청문회장에 입장하는 미스 슬로운과 그 변호사

잘 나가는 회사의 승률 100% 로비스트였던 그녀는 총기규제 법안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총기규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슈미트와 손을 잡는다. 모든 상황이 총기규제 강화 진영에 불리한 상황이다. 이 불리한 선택은 결국 미스 슬로운을 청문회 자리로 이끌게 된다.


총기규제 강화 쪽에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미스 슬로운은 위험을 선택한다. 다른 사람들 말로는 '선을 넘는다' 배우를 고용해서 상황을 몰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도청이나 위협까지 감행하는 그녀는 스크린 밖에서도 위태로워 보인다. 물론 불리했던 상황은 미스 슬로운에 의해 유리한 상황으로 바뀌고 승리를 코앞에 두게 된다.

트라우마로 힘들어 하는 에스미를 달래 방송에 내보내려는 미스 슬로운

하지만 결정적인 한방이 필요했던 미스 슬로운은 무리수를 둔다. 과거 총기난사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가진 팀원 에스미를 여론을 돌리기 위해 유명인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괴한으로부터 다시 총살을 당할 뻔했던 에스미는 트라우마가 재발되고 미스 슬로운에 대한 실망감을 가득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에스미 사건을 계기로 상황은 빠르게 악화된다.


설상가상 미스 슬로운을 막고 싶은 상대 진영은 국회의원들의 목을 졸라 '미스 슬로운' 개인의 비합법적인 행실을 문제 삼아 청문회를 열게 된다. 총기규제 법안을 향해 집중되어 있던 시선은 금세 '미스 슬로운'이라는 한 개인에게 옮겨가게 된다.


통찰에 대한 그녀의 정의

미스 슬로운은 프로다. 정확하게 상대방을 통찰하여 그다음 행동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는데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를 위해 24시간 잠들지 않는다. 언제나 확신에 찬 표정과 절제된 자세로 사람들을 대한다. 그녀가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건 오직 화장실 안에서 물도 없이 알약을 삼키는 순간이다.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혼자 남겨진 사무실에 앉아 알약을 삼키는 미스 슬로운

그녀에게 통찰이란 먼저 꿰뚫어 보고 상대방을 결정적인 순간에 놀라게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감정'은 그 통찰을 통해 상대방을 놀라게 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미스 슬로운은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면모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행동하고 누군가 자신에게 감정을 보이거나 약점을 보인다면 절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승부수를 띄운다.

묵비권을 행사하던 그녀가 입을 열기 시작했고 그녀는 상황 반전에 성공한다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의 '희생양'처럼 그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미스 슬로운은 통찰력을 발휘해 이 자리의 목적과 이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밑 작업을 해둔다. 그리고 마침내 '총기규제 법안'에서 '미스 슬로운'이란 개인으로 집중된 시선을 썩어 빠진 나라와 의회의 '시스템'으로 옮겨버린다.


이 과정에서 미스 슬로운은 자신이 입을 피해를 담담히 감내한다. 그녀가 다른 모든 이에게 그렇게 했듯 통찰을 발휘하는 데 있어, 이를 하나의 승부수로 띄우는 데 있어 예외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결코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대중은 '상황'만을 보며 그 안에 숨겨진 개인의 감정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통찰에 대한 새로운 정의

결코 변할 것 같지 않은 그녀의 마음은 총기규제 법안 관련 일을 하면서 조금씩 변화한다. 신념을 위해 총기규제 강화 진영과 손을 잡았다는 영화 초반의 말과 달리 그저 자신의 '승부욕' 때문에 이 자리를 선택하게 되었고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모습에서 그 변화는 시작된다.

미스 슬로운의 약한 모습을 목격하고 그녀의 편에 서는 포드

미스 슬로운은 어떤 사적인 모습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하룻밤을 보내고, 누구와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유독 잠자리를 함께한 포드에게 약한 모습을 들키고 마는데, 참지 못하고 쏟아낸 그녀의 진심은 결정적인 순간 포드의 마음을 움직인다.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었다는 청문회 측의 공격에 당사자인 포드가 증인으로 나왔을 때 미스 슬로운은 좌절하지만 포드는 그저 '한 번 본 사이'였다면서 그녀를 감싼 것이다.


진심이 때론 그 어떤 통찰보다도 더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미스 슬로운은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빈틈없는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작은 빈틈을 통해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임을 에스미 사건을 통해서, 포드의 배려를 통해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건'에 의해 '상황'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관계가 얼마나 단발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도 통찰하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결말엔 결정적인 반전이 등장한다. 반전에 대한 말을 영화를 볼 이들을 위해 아껴두고 싶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우리는 통찰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미스 슬로운의 정의처럼 먼저 꿰뚫어 보고 상대방을 놀라게 하는 것도 통찰이지만 상대방의 빈틈 속에 감춰진 진심을 발견하고 이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통찰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덧붙여서

영화 <미스 슬로운>은 기존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는 스펙터클은 없지만 미스 슬로운의 전략과 숨 막히게 몰아가는 상황 전개가 비교적 긴 러닝타임과 일정 부분 허술한 극의 단점을 보완하고 있다. 별 기대 없이 본 영화였지만 오랜만에 손에 땀을 쥐고 극에 빠져들 수 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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