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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Mar 13. 2017

언제나 나는 슬픔이 된다

박목월의 <이슬>을 읽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놓아버리는 일은 더 어려워진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주먹은 더 꽉 쥐어낸다.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가슴이 답답한 걸 넘어 뻐근해짐을 느낀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저어기 보이는 목표지점을 바라보려는데 눈앞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두 주먹은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조차 없다.


 ‘아, 눈을 감았었지.’, ‘아, 주먹을 너무 세게 쥐었나 보다.’ 생각하며 눈을 떴는데 세상은 여전히 깜깜하다. 이내 희멀건 빛이 각막을 자극하지만 세상은 온통 흐릿하다. 볼 위로 미지근한 액체가 한 방울 떨어진다. 금세 또 한 방울. 다시 눈을 감고 눈물을 참아보려 하지만, 참아낼수록 작은 방울은 굵은 줄기가 되어 떨어진다. 여전히 펴지 못한 주먹을 볼에 가져다댄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리는 액체를 스윽 닦아낸다. 이미 젖어버린 주먹은 언제 힘을 줬는지도 모르게 턱 하니 풀려버린다. 이제는 더 넓은 면적의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다. 무언가 잔뜩 들었다고 생각했던 주먹에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손이 더듬더듬 티슈를 찾는다. 


티슈로 닦아낼수록 눈물은 더 많이, 더 빨리 흘러내린다. 눈물과 덩달아 콧물도 사정없이 흐른다. ‘흐른다’기 보다 ‘쏟아진다’. 눈물의 온기로 온 몸이 달아오른다. 복잡하던 생각도 눈물과 함께 씻겨 내린다. 오랜 기간 경직되었던 가슴이 꺼억꺼억 울음소리와 함께 들썩인다. ‘아, 내가 살아있었구나.’ 눈물은 그렇게 온몸으로 쏟아진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주먹을 꽉 쥐었을 때 이미 난 울고 있었는지 모른다. 단 하나도 놓아버리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난 마음속의 눈물마저 꾹 가두었는지 모른다. 손가락으로 툭 털어내고 말아버릴 작은 눈물방울을 두 주먹에 가두고 나의 안에 더 깊게 삽입한다. 깊게 처박힌 슬픔은 아주 빠르게 나의 안에 스며든다. 그리고 이 거대한 눈물은 곧 내가 된다. 거대하기 때문에 쉬이 흘려보낼 수 없을 것만 같다. 


이슬  (박목월) 


운다는 것은

차라리 맘이 넉넉하다.

그냥

풀잎에 맺히는 이슬과 이슬의

그 가벼움,


내가 나를 부른다.

가벼운 朴木月

나는 벗어날 수 없다

이미 이슬 안에

저절로 스몄는 나......


바람이 온다

흔들린다.

구름이 간다.

흔들린다.

안으로 티어 오는

玲瓏한 외로움,

아아 나는 손을 든다

두 손을 든 채......

온몸이 풀려서

가없이 푸른 것으로 피어오른다.


박목월의 시 <이슬>에서처럼 운다는 것은 차라리 맘이 넉넉한 일이다. 막상 툭 툭 떨어뜨리고 나면 가볍게 흩어진다. 바람에도 흔들, 구름에도 흔들. 이제는 텅 비어버린 마음도 흔들거린다. 가만있어보자. 눈물로 이루어진 내가 흔들거린다. 육중한 무게의 슬픔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눈물과 콧물을 쏙 빼내버린 나를 거울에 비춰본다. 쌍꺼풀은 더 또렷해지고, 얼굴은 창백해졌으며, 팽창하려던 볼에 바람이 픽 빠져버린 모양이다. 내 안의 생기가 사라지고 나니 한층 또렷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거울 속의 나를 한참 들여다본다. 볼에 생긴 눈물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눈으로 보자 촉각으로도 느껴진다. 입 꼬리를 움직이자 눈물자국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와 빨갛고 차가운 콧등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별 것도 아닌 변화가 선연하게 드러난다. 허기가 진다. 정확히 말하면 배가 고프다. 내 안의 모든 것이 사라져 배고픔만 남았다. 시장기가 요란하다.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도 기억 못 한 체 굶주려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음만 난다. 닥치는 대로 입 안 가득 음식을 집어넣고 나면 배가 부르다. 포만감이 마음을 넉넉하게 만든다. 육중하고 거대한 나는 눈물이 되어 증발했다.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가장 또렷한 나를 발견한다. 


톡, 톡, 톡. 언제나 나는 슬픔이 된다. 그냥 흘려보내면 될 것을 꾸욱 담아두고 덩치를 키운다. 이슬 몇 방울 떨어진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아닌데, 하루하루 새롭게 주먹을 고쳐 쥔다. 뻐근한 가슴을 무시하고 미련하게 숨만 꾹 참는다. ‘얘야, 운다는 것은 차라리 맘이 넉넉한 일이다.’ 가볍게 나의 이름을 부르며 혼자 가만히 속삭여본다. 




커버이미지 출처 :   natalienet.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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