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자취방, 네모의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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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함께했던 룸메이트의 수는 열 세명. 대학 입학 후부터 대학원 첫 학기까지 8학기, 꼬박 4년을 기숙사에서 살았고 4인 실과 2인실을 매 학기 전전했다. 꽤 잦은 이동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기숙사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여전히 자매처럼 만나 수다를 떠는 룸메이트가 있고, 풀어낼 이야기가 한 보따리다.
뒤늦게 사춘기를 겪은 터라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고 청소나 사소한 생활패턴의 문제가 짜증을 돋우긴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는 시끌벅쩍함이 좋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안부를 물어줄 누군가 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얻었다. 물론 정말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마땅히 눈물 흘릴 곳이 없어 작은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울곤 했는데 이제와 생각하면 눈 가리고 아웅. 모르는 척 평소대로 농담을 건네던 그녀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뿐이다.
생애 첫 휴학 그리고 생애 처음 가지게 된 나만의 공간. 기대와 설렘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번갈아가며 마음을 뒤흔들었다. 물론 이 모든 마음보다 강력한 것은 바로 '현실의 벽'이었고 기대와 설렘 그리고 두려움이 현실에 한데 섞여 반드시 처리해야만 하는 많은 '일'로 전락해버렸다. 가장 먼저 내 조건에 맞는 집을 구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좋은 집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지 싶었는데 하필 여러 가지 일이 한 번에 시작될 때라 방을 구하러 다닐 시간도 없었고, 어떤 기준으로 좋은 방을 구해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이야 각종 부동산 플랫폼이나 SNS를 통해 부동산 정보나 자취생을 위한 꿀팁 잔뜩 적힌 콘텐츠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대 근처에서 좋은 방을 구했다는 친구에게 부동산 하나를 소개받았다. 보증금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월세는 고정되어 있었고, 설상가상 신입생이 방을 구하는 시기와 겹쳐 싼 값의 매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신촌에 나 하나 살 집 아니 방 한 칸을 구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부동산에 맡긴 지 이틀 만에 전화가 왔다. 빨리 계약을 해야 한다고 오전에 집을 보러 가자고 했다. 보증금 500에 월세 35만 원인데 풀옵션이고 신촌역에서도 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에 아침 댓바람부터 집을 보러 갔다. 오늘 오후면 나갈 것 같으니 당장 계약을 하라는 중개인의 말에 그대로 계약금을 걸고 일을 하나 덜었다며 홀가분한 맘으로 일을 하러 갔다.
정신없이 일을 하는 동안 이삿날이 다가왔다. 단출한 기숙사 짐을 챙겨 이사를 돕겠다고 서울에 오신 부모님의 차에 실었다. 신촌역에서 가깝다는 내 말에, 풀옵션이란 내 말에 나름 괜찮은 집을 구했을 거라 기대하셨던 부모님의 표정은 집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서부터 굳어지기 시작했다. 신촌역과 가깝긴 하지만 노고산동 저어 끄트머리. 차로 오르기도 힘들어 보이는 가파른 언덕에 엄마는 한숨을 삼키지 못하셨고, 대문 앞에 힘들게 주차를 한 아빠는 한참을 집 앞에 서서 어이없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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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증축 건물이었다. 허가 낸 1층 건물 위에 되는대로 방 하나를 얹어놓은 형태였다. 스테인리스 계단으로 오르는 발소리는 쓸데없이 우렁찼고 신발을 놓는 현관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뭘 몰랐기 때문에 여자 혼자 그런 곳에 살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정말 겁도 없이.
방문을 열어본 아빠는 집을 다시 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현관은 그렇다 쳐도 방은 그럭저럭 평범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삐뚤빼뚤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양의 방을 보니 기가 막히신 모양이었다. 그제야 나도 찬찬히 방을 둘러보았는데 대략 구각형 정도 되어 보였다. 모서리 진 곳에 절묘하게 배치된 가구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미 계약은 했고, 다시 구할 시간도 돈도 없다는 내 말에 일단 한 번 살아보기로 했다.
짐이 적어 이사는 금방 끝났다. 모서리마다 촘촘하게 배치된 가구가 신기했고 어쩌다 빈 모서리는 내가 사다 놓은 살림살이로 하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사를 하고 처음으로 쉬던 날, 밝게 비추는 햇살 덕에 일찍 잠에서 깼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문득 모서리가 몇 개일지 궁금해졌다. 하나, 둘, 셋, 넷,... , 여덟 정도 세었을 때 늘 어떤 모서리까지 세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시 처음부터 세야지 싶었는데 정말 내가 숫자를 배운 건 맞는지 싶을 정도로 헷갈리기 시작했다. 선과 면의 경계가 모호했고 체리색 몰딩 이음새의 돌출 부위를 기준으로 해야 하는 건지 그냥 벽면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건지도 모호했다. 숫자 세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밥솥에 밥을 안쳤다.
집에서 밤샘 작업을 하거나 아파서 가만히 누워있을 때면 늘 천장의 모서리 수를 세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일치감을 보인 숫자는 11. 이 집은 총 열한 개의 모서리로 이루어져있구나 싶었다. 모서리 개수만큼이나 내 삶의 굴곡이 늘어난 것만 같아 괜히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아무런 관련도 없을 테지만 괜히 누울 자리를 바꿔보기도 하고 되지도 않는 인테리어를 해보기도 했지만 열한 개의 모서리는 견고했고 내게 닥친 어려움들도 쉽게 해결되는 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내게 가장 편한 곳이고, 가장 위안이 되는 곳이었다. 많이 웃었고, 많이 울었다. 혼자서 감내해야 할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스스로를 많이도 다독였다.
이 집에 사는 동안 모서리 개수만큼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복학을 했고, 취업을 했고, 졸업을 했다. 결과는 단출하지만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고단한 몸을 뉘이는 그 공간에 누워 난 네모의 꿈을 꾸었다. 아니지 네모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전에는 '둥근 지구'의 부속품이 모두 네모라는 노래 가사가 꽤 현실적이었는데, 그 집에 살면서는 '네모'로 살아가기조차 버거운 현실에 한참을 서러워했었다. 네모난 공간이 주는 안정감을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걸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2년의 시간이 지나 계약기간이 끝났다. 네모난 집을 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부동산에 가서 '네모난 방'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나더러 "방이 네모지 세모인가요?"라고 되묻는 중개인들의 말에 난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다행스럽게 네모난 방을 구했다. 네모난 방에 네모난 책상, 네모난 냉장고에 네모난 창문, 네모난 책장과 네모난 침대 그리고 웬만한 일은 웃어넘길 수 있는 단단한 마음가짐이 생겼다. 새로 이사한 집에 놀러 온 친구의 첫마디는 이랬다.
야, 방이 이제 사각형이네!
나의 첫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은 나와 함께 방 모서리를 세곤 했다. 신기하게 사람마다 숫자를 다르게 세었다. 이 친구는 아무리 세어도 열두 개라고 했었다. 세상에! 방의 모서리 개수를 세며 친구와 실랑이를 벌였다니. 네모난 방에 안착한 나는 이제 정말 네모의 꿈을 꿔도 되는 걸까? 삶에서 마주치는 모서리들을 조금은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스물넷, 나에게 집은 그랬다. 삐뚤빼뚤 모난 내 마음이었고, 애매모호한 경계선이었으며 알 수 없는 불안의 집합이었다. 네모난 방에 안착한 지금도 여전히 열한 개의 모서리를 넘나 든다. 아직 불안은 끝나지 않았고, 경계 또한 모호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모서리에 조금은 관대해진 내 마음 정도. 이제 '네모'가 되고 싶다는 꿈에서 깨어 '둥근' 지구가 되고 싶다는 네모의 꿈을 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