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크노크 Apr 30. 2017

엄마는 왕따였다

친구라는 이름의 엄마

엄마, 왕따였잖아.


지난 금요일, 38년 만에 국민학교 동창들을 만나고 온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한껏 들떠있었다. 윗마을 을순이가, 아랫마을 규빈이가, 같은 마을 누가 이러쿵저러쿵. 난생처음 듣는 이름의 사람들이 단번에 친근하게 느껴질 만큼 엄마는 열성을 다해 동창회 후기를 풀어놓았다.


시골마을의 작은 국민학교에서 엄마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깍쟁이 소녀였다고 한다. 패션을 중시하는 외할머니 덕에 매일 잘 닦인 구두에 정갈한 원피스를 입고 등교를 했고, 공부를 잘했던 탓에 전교 1등과 반장을 도맡아 했다고 했다. 또래 여자애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외로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 외로움마저 응당 견뎌내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였더랬다. 요즘 말로 하면 '왕따' 아니냐고 묻는 내게 엄마는 활짝 웃으면서 "맞아, 그거!! 왕따. 엄마, 왕따였잖아."라고 받아쳤다. 우리 엄마가 왕따였다니... 아니 공주병이었다니...




인간관계에 있어 엄마는 늘 현명했다. 내가 이모라고 부르는, 삶의 중요한 지점마다 얼굴을 맞대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엄마의 친구들 덕분에 엄마는 늘 마음이 풍족한 사람이었다. 자존감이 낮았던 시절, 내가 친구 문제로 힘들어할 때면 엄마는 늘

널 그렇게
힘들게 만드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야.


라고 단언하셨고 쓸모없는 관계 때문에 속상해하는 날 안쓰러워하셨다.


엄마는 유독 '친구'라는 이름 앞에서 관대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곁에 남는 사람이 '친구'라는 것이 엄마의 지론이었고, 엄마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엄마의 지론을 납득하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2,3년 주기로 찾아오는 힘든 시기 덕분에 엄마가 말한 '친구론'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서른을 코 앞에 둔 지금은 친구에 대한 엄마의 정의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정말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곁을 떠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변함없이 곁을 지켜주는 소수의 사람들 덕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날 힘들게 한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었고, 그저 내가 거쳐야 할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주 고된 날이면 친한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몇 마디 하고 나면 주고받는 말이 다 농담뿐이어도 기분이 나아진다. 친구 녀석이 힘들다고 전화를 하면 장난을 치더라도 괜찮다는 연락이 올 때까지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내색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관계, 우리는 그 관계를 '친구'라고 부른다.


지난해,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 그러니깐 나의 이모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다. 사업에 문제가 생겨 집이 넘어갔고 꽤 큰 경제적 손해를 입어 대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같은 대전에 산다고 매일 같이 보던 것도 아니면서 친구의 물리적인 이동에 엄마는 몇 날 며칠을 마음 아파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이모가 이사 가기 전 날, 집에 불러 저녁을 먹고 평소처럼 집 앞까지 나가 그녀를 배웅했다고 한다. 그뿐이었다고 했다. 신기하게 이모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았고, 고마워했다.


고향으로 떠나기 전 이모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나와 함께 외할머니에게 가자고 했다. 차로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 이모는 그저 친구의 엄마에게 '엄마, 오래오래 건강해요.' 그 한 마디를 건네고 돌아왔다. 작은 행동들에 꾹 눌러 담은 마음이 새어 나와 기분이 이상해졌다. 펜팔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38년을 꽉 채워온 그들의 시간이 참 경이롭게 느껴졌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시간들을 온전하게 인정하고 응원해줄 수 있는 그들의 우정이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왕따였다. 당시에는 외로웠지만 38년 만에 만난 친구들과 허물없이 웃으며 정말 즐거웠다고 했다. "넌 늙지도 않는다"며 여전히 눈을 흘기는 친구 덕에 국민학교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참 편해졌다고 했다. 못난 질투의 마음이었음을 술잔에 담아 용서를 구하는 그녀들이 하나도 밉지 않았다고 했다. "솔직히 우리 중에 윤정이 한 번 안 좋아한 놈들이 어디 있냐?"라고 언성을 높이는 배 나온 중년의 아저씨에게서 여전히 장난꾸러기 꼬마의 모습을 볼 수 있어 행복했다고 했다.


맥주 한 캔을 더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자정이 넘은 시간에 딸에게 맥주를 권하는 엄마가, 기분이 좋다며 지갑을 꺼내 용돈을 주는 엄마가 낯설었다. 현명한 인간관계의 표본이었던 엄마가 '왕따'였던 시절의 이야기가, 이내 외할머니와 떨어져 살며 무수리의 삶으로 전락했다는 청소년기 엄마의 이야기가 참 듣기 좋은 밤이었다. 잔뜩 들뜬 엄마의 목소리와 계속 울리는 엄마의 단체 채팅방 메시지 알림이 쿵짝쿵짝 두근 거리는 밤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는 알았다고 한다. 또래 남자애들이 자신을 어렵게 생각했다는 것을, 또래 여자애들이 질투의 시선으로 엄마를 보았다는 것을. 조금 일찍 경험한 외로움 덕분에 '나'를 나로, '너'를 너로 받아들이며 '친구'가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기다릴 인내가 생겼다고 했다. 뭔가 이상한 부분에서 보살력을 발휘하는 엄마다운 말이었다.


애늙은이 같이, 세상을 다 산 사람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좋은 거야.'라고 말하는 그녀가 앞으로도 친구들을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 38년 전 솔티마을의 꼬마 악동들이 자주 만나 꽤 긴 시간 속에 묵혀둔 이야기들을 조금씩 풀어나갔으면, 가장 모자랐던 그래서 순수했던 서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행복해했으면 좋겠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지난한 과정을 되풀이해온 엄마가 친구들 덕분에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열한 개의 모서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