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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Apr 20. 2017

아버지와 이토씨

가족은 때때로 하다 말고 미뤄둔 숙제 같다

도쿄에 거주하는 34세의 아야와 54세의 이토씨는 연인이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나게 되었고 술을 몇 번 마시다 보니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게 아야가 말하는 이토씨와의 시작이다. 두 사람에게 스무 살의 나이차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이토씨와 아야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던 두 사람에게 날벼락같은 소식이 찾아온다. 아니지 날벼락 같이 동거인이 생겨버리는데 바로 아야의 아버지다. 아버지를 부탁하는 오빠에게 아야는 분명 함께 사는 사람이 있어 곤란하다고 거절을 하고 돌아오는데, 집에는 아버지가 오셔 '살러 왔다'며 입주의사를 표명한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아야의 예측대로 두 사람의 평화로운 일상은 꼬장꼬장한 아버지의 잔소리에 엉망이 되어 버린다. 연인인 아야는 전혀 상관없는 이토씨의 나이, 형제관계, 가족관계 그리고 숨겨두었을지도 모르는 엄청난 과거에 대해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캐묻는다. 

이토씨에 대해 캐묻는 아버지와 자신은 이대로 행복하다는 아야

40여 년간 교편을 잡았던 아버지는 누군가를 '가르치고', '지적'하는 일이 일상이다. 이런 아버지를 위해 친절하게 아침밥과 점심밥을 차려놓고 나가는 것은 언제나 이토씨다. 돈가스를 저녁으로 내오면 중농 소스는 악마의 소스라고, 문명인이라면 우스타아- 소스를 먹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아버지에게 아야는 우스타아-가 아니라 우스터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이토씨는 말없이 우스터소스를 사다 냉장고에 넣는다. 

문명인이라면 우스타아-소스!를 외친 아버지와 눈치보며 중농소스를 뿌리는 이토씨


아버지는 절도범이었다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외출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궁금해진 아야는 아버지를 미행한다. 아버지가 절대 건들지 못하게 하는 비밀상자의 정체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뒤를 밟은 보람도 없이 아버지의 하루는 무료하기만 하다. 길가의 꽃을 관찰하고, 공원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둘러보는 것이 전부다. 


그런 아버지가 눈에 밟힌 아야는 세 사람의 외출을 준비한다. 영화를 보고, 고급 식당에서 메밀국수를 먹고, 볼링을 치고, 온천을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완벽한 계획! 하지만 아버지에게 영화는 정신없고, 메밀국수는 쓸데없이 비싸기만 하다. 볼링은 아버지의 기를 완전히 죽여놓기까지 한다. 

"아버지, 볼링핀은 어디 도망가지 않아요! 천천히 하세요." 이래저래 주눅 든 아버지

아야의 계획이 끝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아버지에게 이토씨는 돌아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며 대형마트로 그들을 이끈다. 곧 지쳐 쓰러질 것 같았던 아버지가 공구 코너에 가자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다. 이런 아버지에게 이토씨는 장단을 맞춰주며 공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기한 나사를 찾는 아버지와 나사의 특징을 설명하는 이토씨

텃밭을 가꾸는 이토씨가 전지가위를 사기 위해 간 가든 코너도 아버지의 취향을 완전히 저격한다. 행복한 시간이었다며 비파나무까지 사는 아버지의 모습에 아야는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이토씨가 더욱 소중해진다. 

행복한 데이트를 한 기념으로 비파나무를 사는 아버지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아야는 아버지의 안전을 확인하지만 오빠 내외와 이모로부터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버지가 절도범이었다는 것, 숟가락을 훔쳐 몇 번 경찰서에 간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 겨우 100엔짜리 숟가락이었기에, 아버지가 나이가 많았기에 치매라고 판단되어 훈방조치되긴 했지만 가족들은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아야는 절도까지 저지른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딸에게까지 수치를 들킨 아버지는 '잠시 집을 비운다'는 쪽지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시골집에서 혼자 지내겠다고 내려온 아버지

아야는 이토씨를 잃고 싶지 않고, 두 사람의 평화로운 일상도 지키고 싶다. 아버지를 찾아야 할 의무가 없다며 하루하루 미루지만 마음속은 가시방석 걱정 투성이다. 그런 아야에게 아버지의 주소를 내미는 이토씨. 옛 친구를 통해 전파 확인으로 아버지를 찾았다는 이토씨. 이토씨가 건넨 주소는 아버지와 함께 갔던 적 있는 시골집이다. 아야는 이토씨, 오빠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간다. 


어서 도쿄로 돌아가자는 자식들과 짐꾸러미처럼 사느니 여기서 혼자 살겠다는 아버지의 실랑이가 벌어진다. 어영부영 도쿄로 돌아가려는 아야와 오빠에게 침낭과 음식을 내밀며 가족의 일은 가족이 해결하라며,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토씨는 떠난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아야 그리고 오빠가 한자리에 모였다. 

가족 간의 추억을 나누는 아야 남매와 아버지

오래간만에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추억 여행도 떠나지만 좀처럼 결론은 나지 않는다. 아야 남매의 맘은 타들어 가는데 정오가 지나도 이토씨는 오지 않는다. 티격태격 남매의 말에 마음이 상한 아버지는 비를 맞으면서 집을 나선다.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온 건 이토씨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아야의 말에, 좀 더 차분히 준비해서 내년 봄에 들어오시라고 이토씨는 아버지를 설득한다. 


그때 벼락이 친다. 아버지의 풍족했던 유년의 흔적인 감나무에 불이 붙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80년도 더 된 아버지의 안식처가 불에 탄다. 그 와중에도 소중한 상자를 가져와야 한다며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아버지다. 아버지를 따라간 아야는 그 상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 훔친 숟가락들이 가득 들어있던 상자. 아버지는 왜 그 숟가락들을 훔쳤을까. 아버지는 왜 그 숟가락을 보물처럼 여겼을까.


모두 도쿄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아버지와의 동거는 풀어야 할 숙제다. 이토씨는 함께 살 수 있는 넓은 공간으로 이사를 가자고 하지만 아야는 꼬장꼬장한 아버지 때문에 이토씨가 떠나게 될까 두렵다. 그런 딸의 마음을 알았던 건지 아버지는 실버타운으로 들어갈 것을 선언한다. 유산은 물려줄 수 없겠지만, 짐은 되지 않겠다며 이미 계약을 했으니 내일 당장 떠날 것을 통보한다. 마치 집주인의 동의도 없이 '함께 살겠다'며 통보했던 처음과 같았다. 아야와 이토씨는 아버지를 배웅한다. 떠나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야에게 이토씨는 아버지를 역까지 배웅해드리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올 것을 권유한다. 


소중한 것은 어디 가지 않아.


그 자리에 있어주겠다는 이토씨의 웃음에 아야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힘차게 달린다. 여전히 마음속은 복잡하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변한 것이 없다. 하지만 조금은 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토씨를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 것 같다. 

이토씨 아야 그리고 아버지

가족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니' 넘기는 모든 시간들이 서로를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니깐. 알 수 없는 남자 이토씨를 통해 가족은 '아는 것'이 아닌 '이해'가 필요한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 간의 문제는 당장 해치울 수도 없지만 미뤄두기만 한다면 평생 풀지 못한 숙제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할 것이다. 


엄마보다는 아빠가 생각나는 영화였다. 정확히는 아빠의 낚싯대가 떠오르는 영화였다. 알게 모르게 쌓아둔 우리의 이야기를 이제는 해야 하지 않을까 망설이게 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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